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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박동완
 민족대표 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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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뜨랑제, 많은 사람이 지상낙원이라 부르는 하와이도 인종과 계급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자기 땅에서 발붙이지 못하여 이민선을 타고 흘러온 한국인들이 이곳에 삶의 뿌리를 내려 2세가 성장하고 있었다. 부모들은 노동에 시달리고 자식들은 현지어로 소통하여 점차 모국어가 잊혀지고 있었다.

박동완은 이민사회의 이런 현상이 안타까웠다. 그래서 교회 일과 함께 한글 교육에 열정을 바쳤다. 오하우섬에 세운 국어학교에서 매일 두 차례로 나누어 한글을 가르쳤다. 첫 시간은 교포 어린이, 두 번째 시간에는 성인을 대상으로 하였다. 그는 목사이면서 한글교사가 되어 교민들과 함께 하였다. 

그는 이들에게 스승이고 목자이며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교민들은 여전히 가난했다. 교회에 십일조나 헌금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것은 월급이 없거나 적어진다는 의미다. 하여 끼니를 거른 채 잠자리에 든 날이 잦았다. 그런 중에도 급료의 일부를 떼내어 고국의 어려운 선교회에 보냈다. 기독교 정신과 애국심이 마르지 않았던 것이다.  

국내에 있을 때부터 인연이 있었던, 정신여학생들이 만든 수예품을 1929년 미국으로 수출하는 길을 텄다. 비록 몸은 조국을 떠나 있었으나 마음만은 항상 조국과 동포에 가 있었던 것이다.    

2년 쯤 지나면서 몸이 몹시 쇠약해졌다. 1930년 11월, 고문의 후유증에다 이역만리에서 혼자 살다보니 제대로 끼니를 챙겨먹지 못하면서 나타난 병세는 뇌경색이었다. 뇌의 혈행(血行)의 일부가 두절되는, 그러니까 뇌조직이 연화하는 증세가 나타난 것이다.

박동완의 민족얼은 하와이 교민사회에 뿌리를 내리고 싹을 틔웠다. 3ㆍ1절에는 한국의 고유명절인 설ㆍ추석과 함께 교민들이 교회에 모여 떡을 빚고 한국음식을 차려 나눠먹었다. 모두 한복을 입고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쳤다. 독립선언서가 낭독되고, 33인 출신인 박 목사가 한국어로 연설을 하였다. 유창한 영어실력에도 그는 한국어로 말하고 설교하였다.

병든 육신을 신앙심으로 지탱하면서 순회전도를 멈추지 않았다. 순회기행문의 일부를 소개한다. 

18일 새벽 세시 반에 화아이나에 도착하였다. 그 선창은 아직도 완전치 못하여 종선을 타고야 내리게 되었다. 상륙하여 짐을 찾아가지고 보니 이은구ㆍ김치연ㆍ이영옥 세 분이 파이아니에 와서 맞으신다. 가까운 곳에서라도 밤중에 나오심은 미안하겠거든 하물며 원처(먼 곳)에서 그렇게 맞아 주시니 미안하고 감사하였다.

넷이 자동차를 타고 파이아에 와서 쉬고 낮에는 교우를 심방하고 밤에는 모여서 예배할 새 다수가 모여서 자못 생활을 이루었으며 특히 성찬과 아동 22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이 교회는 수년 째 담임목사가 없어서 교회가 매우 부진하는 형편이나 여러분의 열정으로 양재구 씨를 부사로 택하여 서로 협조하여 몸으로 별 탈 없이 지내오며 근일 소식을 들으면 청년회도 조직하여 차차 발전되는 형편이라 하니 감사할 바이다.

22일 아침 8시 반에 배는 다시 떠났던 곳에 대였다. 몇 분이 선창에 나와 맞아서 자동차를 타고 예배당으로 갔다가 오후에 집에 왔다. 이것으로써 순회는 무사히 마치고 왔으니 하나님께 감사한다. (주석 1) (현대문 정리)

박동완의 이같은 헌신이 바탕이 되어 와히아와 교회 출신 중에 의사와 변호사, 판사가 많이 배출되고, 하와이주 대법원장까지 나왔다.


주석
1> <한인기독교보>, 제1권 제2호, 1934년 10월 1일.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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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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