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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수님~"하며 시동생들이 이한인을 불렀다. 어린 시동생들은 자기 몸집보다 큰 빨래를 이고 있었다. 동두천 미군부대에서 받아온 미군 군복 무더기였다. 이한인은 얼른 달려가 빨랫감을 받아들었다. "아이구. 고생했어요." 소년 티를 벗어나지 못한 최병각(1933년생), 최병탁(1935년생)은 볼이 빨갰다.

이한인(1924년생)은 건네받은 빨랫감을 논가 둠벙(웅덩이) 옆에 내려놓았다. 매서운 추위에 둠벙은 꽁꽁 얼었다. 그녀는 머리통만한 돌을 들고 내리쳤다. 처음에는 돌이 튕겨져 나갔지만 몇 차례 반복하자 쩍하는 소리와 함께 얼음이 갈라졌다. 빨래는 얼음물에 닿자마자 뻣뻣해졌다. 이한인의 손은 빨갛다 못해 시퍼래졌다. 빨랫줄에 군복을 널면 금세 고드름이 달렸다. 밤이 지나면 군복은 얼음덩어리가 됐다. 

그나마 시동생들이 빨래거리라도 얻어와 이한인을 비롯한 가족들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다. 이한인의 시동생 최병각과 최병탁은 미군부대 하우스보이였다. 한국전쟁 당시 주로 전쟁 고아 소년들이었던 하우스보이는 미군부대 안에서 빨래, 청소, 군화닦이 등의 허드렛일을 했다. 1951년부터 1954년까지 이한인은 군부대 인근에 방을 얻어 군복 빨래를 했다. 전쟁 전에는 유복한 집안 도련님이었던 최병각과 최병탁은 어쩌다 하우스보이가 됐을까.   

우익인사 살려 준 인민위원장

1950년 9월 말 경기도 화성군 태장면 병점리. 인민군이 밀고 내려와 인민공화국 세상이 되었다. 우익인사들은 병점분주소 옆 창고에 갇혀있었다. 보초를 서는 이는 자리에 없었다. 깊은 밤 그림자 하나가 나타났다. "봉진이 형님 잠깐 나 좀 봅시다." 그림자는 창고에 갇혀있던 윤봉진(30대 후반)을 불러냈다.

"형님, 아무 말 하지 말고 얼릉 도망가시오." 그림자의 주인공 최병기가 말했다. "고맙네. 동생" 윤봉진은 무작정 뛰었다. 대한청년단 병점리 부단장이었던 윤봉진이 목숨을 건진 것은 병점리 인민위원장 최병기 덕분이었다. 윤봉진은 그렇게 살아났지만, 그를 남몰래 풀어준 최병기는 그해 12월경 목숨을 잃었다. 이후 물러갔던 대한민국 군경이 돌아오자 인민위원장을 한 최병기는 부역죄에 걸려들었다. 
 
1.4 후퇴 직전 희생된 최병기
 1.4 후퇴 직전 희생된 최병기
ⓒ 최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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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에 양정고보를 중퇴한 최병기(1922년생)는 해방 직후 수원 시내 신풍국민학교에서 잠시 교사 생활을 했다. 이후 그는 아버지가 경영하던 누룩창고 관리인으로 일했다. 퇴근 후 그는 병점에서 야학을 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글을 모르는 문맹자가 많았기에, 야학당은 언제나 만원이었다. 큰 경제적 어려움이 없이 지내던 최병기에게 고난이 닥친 것은 6.25가 터지면서였다.

전쟁통에 두 아들 잃고 화병 난 아버지

1950년 6월 병점국민학교에 입학한 최영섭(1944년생)은 얼마 안 가 이하선염(볼거리)에 걸렸다. 할아버지에게 업혀 병원에 갔다 오는 길에 소년은 트럭 행렬을 만났다. "즉시 피난 가시오!" 트럭에 탄 군 장교가 외쳤다. 이상한 것은 트럭에 탄 군인들이 모두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인민군과 싸우다 도망치는 군인들이 눈가림으로 민간인 복장을 한 것이다. 

그럼에도 일반 국민들은 피난길을 택할 수는 없었다. 거기에는 6월 27일 이승만 대통령의 '서울 사수' 방송이 한몫했다. 서울을 달아나 대전에서 방송을 녹음한 이승만은 국민을 기만했다. 다음날인 6월 28일 서울은 인민군에 점령당했고, 7월 4일에는 수원-화성도 인민군 수중이 되었다. 수원이 함락되기 하루 전인 7월 3일에는 미군의 폭격으로 수원시가 불바다가 되었다.

화성군 태장면 병점리에서 지식인층에 속했던 최병기는 인민군이 진주한 후 인민위원장이라는 감투를 떠안게 되었다. 그가 인공 시절 어떤 활동을 했는지 밝혀진 바는 없다. 요즘으로 치면 마을 이장을 한 정도이니 대역죄를 지을리도 만무했다. 오히려 그는 '어떠한 억울한 죽음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대한청년단 병점리 부단장을 풀어주기도 했다. 

후퇴했던 군·경이 수복하자 최병기는 몸을 피했다. 하지만 그는 용인군 구성면에서 체포돼 병점지서로 연행됐다. 그 사이 경찰들은 최병기의 동생 최병문(1927년생)을 연행해 고문했다. 형이 도망친 곳을 대라는 이유에서다. 최병기가 붙잡힌 후에야 병문은 풀려날 수 있었다. 만신창이가 돼 지서를 나오는 병문의 등 뒤로 형님 최병기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이후 최병기는 수원경찰서를 거쳐 수원형무소에 투옥되었다. 그러다가 1951년 1.4 후퇴 직전 목숨을 잃었다.

최병기의 또다른 동생 최병무(1925년생)도 전쟁통에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최병무는 일제강점기 때부터 사회운동에 뛰어들었고 일경에 검거돼 고춧가루 고문, 물고문도 당했다. 해방 직후 최병무는 남로당 활동을 하다가 국민보도연맹에 강제로 가입됐다. 전쟁 직전 수원에서 철도공무원 생활을 한 그는 인민군 주둔 시절에도 활동을 했다. 수복 후 그는 행방불명되었는지 아직도 정확한 생사는 밝혀지지 않았다. 가족들은 다만 월북을 했거나 군·경에 학살되었을 걸로 추측한다. 

난리통에 두 아들을 잃은 최성보(1897년생)는 화병으로 1951년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일제강점기 때 경찰조직에 10년간 몸 담았던 최성보는 누룩 사업을 크게 벌여 병점역에 누룩 창고를 짓기도 했다. 누룩을 전국적으로 매집해서 이듬해 봄에 파는 사업으로 부를 축적했고 양조장도 경영했다. 그렇게 남부러울것 없던 최성보는 난리통에 두 자식을 잃고 삶의 의욕을 잃었다. 수복 후에는 '반공청년단'이 땅을 전부 빼앗아가기까지 했다. 

부잣집 딸이 겪은 '난리'

최병기의 부인 이한인은 화성군 남양면 무송리 출신이다. 그는 일제강점기 후반 이른바 '처녀공출'을 피하기 위해 병점 유지의 자제인 최병기와 결혼을 했다. 결혼 전 그녀는 남양보통학교를 나와 서울에 있는 상급학교 재수를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여성이 서울 상급학교에 진학하려고 했다는 것 자체가 그만큼 집안이 유복했음을 보여준다. 

그런 그녀에게 한국전쟁은 고통 자체였다. 남편과 시동생이 죽고, 시아버지도 화병으로 세상을 떴기 때문이다. 먹고 사는 것은 이제 이한인의 몫이 되었다. 다행히 전쟁통에 우익청년단에 빼았겼던 땅 일부는 38마지기는 되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빨갱이 집안'이라는 손가락질 때문에 병점에서는 더이상 살 수 없었다.

땅을 헐값에 팔고 친정인 화성군 남양면 무송리로 갔다. 그곳에서 논을 사 소작을 주고 이한인은 시골로 행상을 다녔다. 처음에는 떡장사, 엿장사를 하다가 옷장사를 했다. 이한인은 쌀 2말을 이고 서울에 걸어가서 옷을 샀다. 쌀 2말은 옷값이었다. 다음날 다시 옷을 이고 화성까지 걸어와 마을을 다니며 옷을 팔았다. 쌀과 옷 무게 때문에 그의 목은 자라목이 되었다. 
 
증언자 최영섭
 증언자 최영섭
ⓒ 박만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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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병기 아들 최영섭은 초등학교 1학년을 세 번 다녔다. 병점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한 달도 안 되어 6.25가 났다. 당연히 학교가 문을 닫았다. 이듬해인 1951년 화성군 남양면에 있는 활초초등학교에 다시 입학했다. 이번에는 일주일만에 학교를 그만뒀다. 엄마 이한인이 서울로 행상을 다녀 3살짜리 여동생을 봐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 해인 1952년에야 다시 활초초등학교에 입학했고 이번에는 끝까지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이후 그는 경동 중·고등학교를 거쳐 경희대 상과를 졸업했다.

1965년에 군에 입대한 그는 경기도 양평 9사단 백마부대로 배치되었다. 당시는 베트남전쟁이 벌어져 한국군이 베트남에 파병될 때였다. 그는 '명분 없는 전쟁에 왜 가는가'라며 베트남전쟁에 부정적이었고 결국 베트남 파병에 응하지 않았다. 그는 대학 졸업 후 사진재료상을 하기도 했으며, 서울 돈암동 성신여대 입구에서 치킨센터를 열었다. 장사가 잘 되었지만 건물주와의 갈등으로 장사를 접었다. 이후 그는 여주로 낙향해 농사를 지었다. 팔십을 앞둔 그는 아버지의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태그:#한국전쟁, #인민위원장, #부역혐의, #민간인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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