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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궁 본전과 상, 중 광장 모습. 멀리 경성(서울)역이 선명하게 보임.
▲ 완공 직전 조선신궁 조선신궁 본전과 상, 중 광장 모습. 멀리 경성(서울)역이 선명하게 보임.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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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이 기독교신앙을 바탕으로 민족운동과 사회활동을 치열하게 전개하던 1920년대 중반 일제의 지배체제와 압제의 양상은 더욱 강화되고 있었다.

총독부는 1925년 5월 치안유지법을 공포한데 이어 6월에는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었다. 역사교육을 통해 일본 민족의 우수성을 입증하고 한국민의 민족의식을 말살하기 위해 조선총독부 직할로 설치한 것이다. 총독 사이토는 '조편수'의 설치에 앞서 '교육시책'이란 것을 발표했다. 

그것은 "① 먼저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일ㆍ역사ㆍ전통을 알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민족혼ㆍ민족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② 그들의 조상과 선인들의 무위 무능과 악행을 들추어내 과장하여 가르침으로써 조선의 청소년들이 그 부조를 경멸하는 것을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③ 그 결과 조선의 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에 관하여 부정적인 지식을 얻어 실망과 허무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 일본 서적ㆍ일본 인물ㆍ일본 문화를 소개하면 동화의 효과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 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요결인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일환으로 조선사편찬 작업을 서두르도록 한 것이다.

일제의 조선사 왜곡 날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들이 조선사의 날조 왜곡에 얼마만큼 열중하고 비중을 두었는지는 '조편위'에 총독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고, 위원장을 정무총감이 맡았으며 총독부 주요 인물과 일본의 명성 있는 관학자를 위원으로 끌어들였다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한국인 사학자들도 동원하였다. (주석 1)

총독부는 1925년 10월 남산에 이른바 조선신궁을 만들었다. 한국의 기독교 세력을 탄압하고 전체 한국인을 일본인화 시키기 위해 우선 '일본종교'인 신사를 한국에 끌어들였다. 총독부는 1915년 8월 "신사는 국가의 종사로서 존엄한 우리 국체의 성립과 빛나는 국사의 발자취와 표리일체를 이루며, 경신의 본의를 명징하고 이 도의 흥륭을 꾀하는 것은 역시 국민 사상 함양상 간절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신사 사원 규칙이란 것을 발표하여 해외 식민지에 있어 천황제 지배의 상징으로서 신사 제도를 실시하였다. 
 
1930년대로 추정되는 조선신궁 항공사진.
▲ 조선신궁 항공사진 1930년대로 추정되는 조선신궁 항공사진.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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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로 하여 일제의 신사 제도가 전개되기 시작하더니 3ㆍ1혁명 직후에는 조선신궁 설립이 고시되고, 1920년 이른바 지진재(地鎭齊)를 거행하고 한국의 주산(主山) 남산에 조선신궁을 세웠다.

일제강점 초기 기독교인들의 저항은 강력했다. 한국기독교인의 활약상은 3ㆍ1혁명 후 체포투옥자의 통계에서도 나타난다. 3, 4월 중에 피체된 사람은 1만 9,000여 명인데, 이 중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전체의 약 17%를 차지한다. 또 그해 6월 말 현재 투옥된 사람이 도합 9,456명이었는데 그 중 기독교인이 2,033명으로 21%에 해당한다. 당시 국내의 기독교인을 30만 명으로 추산할 때 인구 2,000만 명에 비하면 1.3%에 불과한 숫자이다. 전체 인구의 1.3%에 해당하는 기독교인이 만세운동 주동세력의 25~38%, 초기 피체자의 17%, 투옥자의 21%를 차지한 것이다. 이것은 3ㆍ1항쟁 전체적 역량의 20% 이상이 당시 한국 인구의 1.3%에 불과한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조선총독부의 통계에 보면, 3ㆍ1혁명과 관련, 파괴된 교회당이 47동, 일부 파괴 24동, 피해 41동이며, 1919년 6월 말 현재 투옥된 사람이 151명, 고문당해 죽은 신자가 6명이었으며, 기독교재단이 경영하는 학교 2동이 불타 없어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일제는 한국기독교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면서 기독교와 민족운동의 연계를 차단시키기 위하여 온갖 음모와 공작을 서슴치 않았다.

일제는 병탄 초기부터 기독교를 적대시 내지 위험시하였다. 한국을 지배하는데 기독교를 장애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유는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도에 의해 뒷받침된 천황제에서 찾을 수 있다. 천황제가 지닌 국수주의적이고 침략주의적 성격, 그리고 현인신(現人神) 천황과 신도의식에서 엿볼 수 있는 종교적인 성격 모두가 한국 기독교와의 충돌을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일제는 신궁을 세우고 치안유지법을 통해 민족운동을 더욱 옥죄었다. (주석 2)


주석
1> 김삼웅, <일제는 조선을 얼마나 망쳤을까>, 235쪽, 사람과 사람, 1998.
2> 앞의 책, 23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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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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