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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을 '시를 읽지 않는 시대'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불리는 까닭, 시를 읽지 않아서가 아니라 시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이나마 익숙함을 만들어 드리기 위하여 일주일에 한 편씩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와 산문은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에 동시에 소개 됩니다[기자말]
직진금지
- 김명기

직진금지 표지판 앞에서
그대로 내달리고 싶었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고
살라고 말했지만
쳐다본 곳까지 오르지 못한 채
엄나무뿌리보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셨다 긴 시간
아버지는 세 시 방향
나는 아홉 시 방향으로 꺾어져
서로 다른 곳을 쳐다봤다
간혹 여섯 시 방향을 향해 돌아섰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화석처럼 굳어버린
혈연의 회한을 확인할 뿐이었다
생각과 몸은 바뀌어 갔으나
열두 시 방향에서 만난 적은 없다
아버지가 생의 간판을 접고
폐업하는 순간에도 나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
산다는 건 그냥 어디론가
움직이는 일이란 걸 알았지만
경험의 오류를 너무 확신했다
어쩌다 녹슨 족보에서나
쓸쓸하게 발견될 이름들이
숱한 금기 앞에서 내버린 시간
껴안지도 돌아보지도 못한 채
너무 오래 중심을 잃고 살았다

- <돌아갈 곳 없는 사람처럼 서 있었다>, 걷는사람, 2021, 13~14쪽

'속도보다는 방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삶에 있어서 속도도 중요하지만, 속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확인하고, 그 방향을 향해 직진하는 것입니다. 다소 느린 걸음이지만, 우직하게 직진하는 것이 가장 빠른 길입니다.

토끼가 아무리 빠른 걸음으로 달음질을 친다고 해도 그 방향이 반대 방향이거나 횡의 방향이라면 달리면 달릴수록 목적지와 멀어질 뿐입니다. 거북이의 걸음을 지녔다고 해도 직진할 수만 있다면, 최후의 승리를 움켜쥘 수 있습니다.
 
김명기 시인의 시집
 김명기 시인의 시집
ⓒ 걷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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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요, 직진도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길이라는 것이 반듯하게 뻗어있지만은 않기 때문입니다. 계획된 도시라면, 사각형 모양으로 반듯하게 구획 정리되어 있겠지만, 보통의 도시라는 것이 사람들이 모여 살면서 비대해지기 마련입니다.

길도 같이 구불구불해지고, 어느 곳에서는 딱 끊기기도 합니다.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러한 것처럼요. 가장 현명한 방법은 '내비게이션'을 켜고 목적지를 향하는 것입니다. 내비게이션은 우리를 가장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로 데려다줍니다.

내비게이션에는 다양한 옵션이 있습니다. 유료도로 이용, 무료도로 이용, 빠른 길, 최적화된 길, 최단 도로 등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또한, 휴게소나 음식점, 가장 저렴한 주요소 등도 알려줍니다. 우리는 내비게이션의 안내에 따라서 이동하기만 하면 됩니다.

삶의 목표를 정할 때도 이렇듯 여러 '조건'들을 삽입할 수 있습니다. 시에서 화자의 아버지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내려다보지 말고 쳐다보고 살라고'라고요. 이 말 또한 삶의 '조건'으로 갈음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짐작해 보면, 보통의 아버지들이 훈계처럼 하시던 말씀, '조금 더 높은 목표를 세우고 살라'는 의미였을 것입니다. 그런데요, 정작 화자의 아버지가 도달한 곳은, 엄나무 뿌리보다 더 낮은 곳이었습니다.

'더 낮은 곳'이라는 위치와 함께 '방향'이 등장을 하는데요. 제 가슴에 특별하게 다가옵니다. 화자의 아버지는 세시 방향, 화자는 아홉 시 방향이라고 말합니다. 이 방향성이 상징하는 것은 화해하지 못한 부자의 모습입니다.

시에서 '간혹 여섯 시 방향을 향해 돌아섰다'고 하지만, '서로에 대한 이해라기보다 화석처럼 굳어 버린 혈연의 회한을 확인할 뿐이었다'고 얘기합니다. 화자의 관점에서 부자의 사이가 회복할 수 없는 것처럼 그려지고 있는데요, 이것이 그의 진심이었을까요.

화자는 얘기합니다. '아버지가 생의 간판을 접고 폐업하는 순간에도 나는 등을 돌리고 울었다'고요. 비록 등을 돌리고 있었지만, 울었다고 말합니다. <닮은 꼴>이라는 시에서도 이렇게 얘기합니다. '눈과 코가 닮은 아버지를 입관할 때 등을 돌린 채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가'(같은책 18p)라고요.

저 등을 돌리고 울었던 울음이 어떤 울음일지, 저 또한, 한 아버지의 아들로서 이해가 되는 구절입니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서먹함과 끈끈함 그사이의 어느 지점입니다.

그런데요, 왜 하필 직진금지 표지판 앞에서 아버지를 떠올렸던 것일까요. 그것은 화자 스스로가 아버지처럼 살고 있음을 발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또한 모든 아들이 가진 아이러니 중의 하나입니다.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맹세하지만,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의...

처음으로 되돌아가 봅니다. 오늘 내가 의지하고 있는 내비게이션을 확인해 봅니다. 어떤 '조건'이 입력되어 있었던 것입니까. 누구의 주소를 경유하고 있습니까. 혹시 목적지에 오타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요.

목적지를 향한 일방적인 직진도 좋겠지만, 때로 주변을 돌아보며 풍경을 즐길 수 있는 잠깐의 여유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피곤하면 잠시 휴게소에서 쉬어가도 좋고요. 이런 잠깐의 해찰이 우리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줄지도 모릅니다. 

시 쓰는 주영헌 드림.

김명기 시인은...

경북 울진에서 태어나 2005년 계간 <시평>으로 등단했습니다. 시집 <북평장날 만난 체 게바라>, <종점식당> 등과, 맛 칼럼집 <울진의 맛 세상을 만나다>를 냈습니다. 제2회 작가정신 문학상을 수상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시와 산문은 오마이뉴스 연재 후, 네이버 블로그 <시를 읽는 아침>(https://blog.naver.com/yhjoo1)에 공개됩니다.


태그:#김명기시인, #걷는사람, #직진금지, #주영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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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쓰기'보다 '시 읽기'와, '시 소개'를 더 좋아하는 시인. 2000년 9월 8일 오마이뉴스에 첫 기사를 송고했습니다. 그 힘으로 2009년 시인시각(시)과 2019년 불교문예(문학평론)으로 등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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