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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어통역사 박미혜씨와 농통역사 이현미씨
 수어통역사 박미혜씨와 농통역사 이현미씨
ⓒ 월간 옥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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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통역사의 책상이라면 꼬부랑 글씨가 빼곡히 적힌 종이와 펜이 떠오르는데, 이곳은 뭔가 다르다. 종이와 펜 대신 스마트폰 거치대. 수어통역사 박미혜씨와 농통역사 이현미씨는 화면을 통해 이용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차린다. 많은 경우 읍·면 곳곳으로 찾아가기도 한다.

수어·농통역사의 활동은 지역 장애인 행사를 제외하고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러나 이들은 지역 청각·언어 장애인의 귀와 입이 되어 일상에 스며 있다.

수어통역과 농통역, 뭐가 다를까

농인, 구화인, 난청인. 청각장애인의 범주다. 농인은 귀가 들리지 않고 입으로 말을 할 수 없어 수어를 제1 언어로 사용하는 사람, 구화인은 청각 보조장치를 사용하고 입 모양으로 상대의 말을 파악하며 훈련을 통해 음성 언어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이른다. 난청인은 후천적으로 소리가 잘 들리지 않게 된 경우로, 보통 노인성이 많다.

충북 옥천군 농아인협회에 등록된 사람은 53명(2021년 11월 기준)이고 이 가운데 수어 구사자는 30~40% 정도다. 수어통역사는 이들의 의사 전달이 필요한 상황에서 수어를 음성어로, 음성어를 다시 수어로 전달한다. 또 한글도, 한국수어도 배우지 못해 문맹 상황에 놓인 농인의 의사를 정확한 문법을 갖춘 표준수어로 전달하는 일을 하는 이가 농통역사다.
     
농통역사 이현미씨는 농인들의 관용수어(수어를 모르는 농인이 의사 전달을 위해 임의로 표현하는 몸짓)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표준수어로 통역하는 일을 한다. 그 역시 구화인이다.

"문맹 농인의 수어는 환경이나 성격에 따라 모두 다르게 나타나요. 농통역사는 이들이 하고자 하는 말을 알아채서 수어로 전달하는 중계 역할을 하죠. 농인 개개인의 표현이 모두 달라서 그간 일을 하며 만나온 농인들의 관용수어에 대한 경험으로 말을 이해하기도 하고요. 일하면서 계속 배워야 해요."
 
충북 옥천군 수어통역센터에서 스마트폰 영상통화로 수어통역업무를 하고 있다.
 충북 옥천군 수어통역센터에서 스마트폰 영상통화로 수어통역업무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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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의 영역은 정부청사나 행정복지센터 등 공식적인 민원업무만이 아니다. 병원이나 개인적인 일에 통역이 필요할 경우도 직접 나선다. 최신 정보를 빨리 접하기도 힘들다. 그 때문에 중요한 소식을 전달하는 것도 수어통역사의 일이다. 사실상 이용자가 필요로 하는 모든 업무를 맡는 것이다.

청각장애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청인 자녀를 뜻하는 말, 코다(CODA). 코다이자 집안의 첫째인 박미혜 수어통역사는 부모님의 언어를 통역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처음으로 배우는 언어가 수어라 자연스레 옹알이도 수어로 했다.

"부모님이 휴가를 신청하셔야 할 땐 제가 회사에 전화로 말씀을 드려야 했어요. 그러면 수화기 너머로 장애인을 비하하는 욕설이 들려와요. 그런데 그걸 부모님께 그대로 통역해드릴 수는 없잖아요. 중간에서 속상한 일이 많았죠."

그렇게 진로의 방향도 자연스레 수어통역이 됐다. 홍성군수어통역센터에서 3년을 일하고, 지난해 옥천으로 일터를 옮겨왔다. 벌써 6년 차 수어통역사. 청인(비청각장애인)으로 농사회에 녹아드는 것이 쉽지 않았지만, 부모님께 물려받은 언어를 사용하고 장애 인식을 개선하는 것을 '해야 할 일'로 생각했다는 그다.
 
내 이웃의 제1 언어, 나의 언어


'수화'라는 단어 대신 '수어'를 사용하게 된 것은 2016년, '한국수화언어법'이 제정된 후다. "수어도 한국의 공용어"라고 공식 인정받으면서 한국어와 한국수어 두 개 모두 한국의 언어가 된 것이다.

군 단위 지자체 가운데 한국수어 활성화 조례를 제정한 곳은 다섯 곳(충북 괴산·제천·진천, 강원 홍천, 충남 홍성). 특히 충남 홍성은 공무원에게 수어 교육을 진행하고 있기도 하다.

박미혜 수어통역사는 지역사회 인식 변화를 위해 수어통역센터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장애인의 어려움을 공감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실질적인 활동을 펼쳐나가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
     
지난해 옥천문화원이 진행한 '어르신 청춘 수어 교실'은 수어통역센터나 지역 평생교육기관이 아닌 단위에서 진행한 예외적인 경우라 의미가 깊다. 앞서 옥천군은 2017년 평생학습원 상반기 정기과정으로 수어교실을 열었지만, 인원 부족을 이유로 이후에는 개설되지 않았다.
 
지난해 옥천문화원이 운영한 어르신문화프로그램 '어르신 청춘 수어교실'에서 강의를 맡았다. 사진은 수료식 현장.
 지난해 옥천문화원이 운영한 어르신문화프로그램 "어르신 청춘 수어교실"에서 강의를 맡았다. 사진은 수료식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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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수어 교육이 지속되면 좋겠어요. 농촌에는 노화로 인한 난청인 비율이 높아요. 어르신들이 수어를 배움으로써 만약에 대비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죠. 귀가 잘 안 들려도 수어를 알면 막힘없이 대화할 수 있잖아요." (박미혜 수어통역사)

코로나19 이후 수어에 관한 관심은 조금씩 높아지는 추세. 뉴스화면 아래 조그맣게 나오던 수어 통역이 이제는 코로나19 정례 브리핑에서 화자 바로 옆에 위치하고 '덕분에 챌린지', 비접촉 인사 등으로 수어가 주목받기도 했다.

보이지 않아도, 들리지 않아도 연결되는 세상. 갈 길은 멀지만 언젠가 우리가 꼭 가닿아야 하는 세상이 아닐까.

[관련기사] "시댁 형님이랑 대화하고 싶어 공부 시작했어요" http://omn.kr/1x1x0

월간 옥이네 통권 55호 (2022년 1월호)
글·사진 소혜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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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옥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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