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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에서 발행한 '이비총' 모습. 임진 정유의 두왜란 당시 희생된 조선인의 귀무덤과 코무덤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에서 발행한 "이비총" 모습. 임진 정유의 두왜란 당시 희생된 조선인의 귀무덤과 코무덤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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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1597년) 당시 조·명 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진 남원성 전투를 취재한 후 왜군에게 희생된 조선인들의 귀(코)가 잘려 일본에 묻힌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 김문길 교수가 보낸 <이비총(耳鼻塚)> 책을 꼼꼼히 읽었다.

(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가 펴낸 책에는 '이비총(耳鼻塚)'에 얽힌 사연과 (사)겨레얼살리기국민운동본부 회원들이 2007년부터 2020년까지 일본 교토에서 봉행한 위령제 사진과 '이비총'과 관련된 자료들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뒷부분에는 오랫동안 일본에 있는 한국인 귀·코·머리 무덤을 연구한 김문길 교수가 쓴 글이 수록되어 있다.

요즈음 젊은이들은 나이든 사람들이 어린애 시절 부모나 어른들로 부터 흔히 들었던 "에비! 에비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말을 들으면 울던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는 "에비! 에비야!'의 어원은 원래 "이비, 이비야"에서 유래됐다.

한국인들의 아픈 역사 지닌 "에비! 에비야!"

'이비(耳鼻), 이비(耳鼻)야'는 '귀'와 '코'를 의미하며 '야'는 호격조사로 임진·정유 두 왜란 당시 만들어진 말이다. 임진·정유 당시 왜적들은 자신들의 전공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여주기 위해 조선 사람들의 귀를 자르고 코를 베어 소금에 절인 상자에 담아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고했다.

왜적들은 죽은 사람의 귀와 코뿐만 아니라 산 사람까지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다. '산 채로 코베어 간다'라는 말은 여기서 유래했다. 심지어 아이를 갓 낳은 집에 금줄을 끊고 들어가 산모는 물론 갓난아이의 귀와 코를 잘라간 일까지 있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왜적이 쳐들어오면 '귀 자르고 코베어 가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이비야 온다'고 했고 '이비야 온다'는 말을 들으면 우는 아이도 울음을 뚝 그쳤다. '에비, 에비야'는 음운변화를 겪으면서 탄생한 말이다. 임진·정유 두 왜란 당시를 기록한 서애 류성룡의 <징비록>에는 당시의 처참했던 기록이 나와 있다.
 
"왜놈들은 조선인을 보기만 하여도 코나 귀를 베어갔다. 전투가 극심했던 경상도 일대에는 코나 귀가 없는 조선 백성들이 많았다"
 
정유재란 당시 남원성전투(1597.8.13.~8.16) 후 왜장 '도오도오 다가도라'가 보낸 조선인 코를 받아 든 풍신수길이 도오도오 가다도라에게 보낸 코 영수증에는 당시 왜군의 코베기 참상이 잘 나와있다.
       
임진 정유 두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장 '도오도오 다가도라'에게 코 잘 받았다며 답장을 보낸  코 영수증이다.
 임진 정유 두 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남원성을 함락시킨 왜장 "도오도오 다가도라"에게 코 잘 받았다며 답장을 보낸 코 영수증이다.
ⓒ 남원문화원 발행 <정유년 남원성 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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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6일 보낸 보고서 봤소. 전라도 남원성을 명나라 군대가 수비하고 있었는데 지난 13일 그 성을 포위하여 15일 밤에 함락시켜 목 269개를 베어 그 코가 도착하였소. 수고했소. 전번에 원균이 지휘한 주선수군을 괴멸시켜 큰 공을 세웠소. 앞으로 부대장들이 상의하여 잘 작전하시오. 마시다 나가모리, 이시다 미쓰나리, 마에다 겐이에게 잘 말해 두겠소"
 
당시 남원성에서 희생된 수많은 조선인과 명나라 군사들은 왜군들이 휘두른 칼에 목과 귀 코가 잘렸다. 당시 왜군 중에는 코 수집관인 '군목부'가 파견되어 병사들이 베어 온 코를 모아 소금 석회 등으로 방부 처리한 다음 자루나 통발에 담아 일본에 있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보냈다. 왜란당시 종군한 일본 중 경념이 남원성에서 본 당시의 비참한 광경을 기록에 남긴 <조선일일기> 내용이다.
 
"남원성을 함락하고 성과 온 산천을 불태우니 사람들이 죽어 타는 냄새가 온 동네에 가득했다. 우리 병사들은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아 큰 칼을 가지고 죽은 자의 코를 베어 대바구니에 담으니 대바구니마다 잘린 코가 가득했으며, 길바닥은 비가 온 듯 붉은 피로 젖어 있었다"
  
조선인들의 귀를 절이는 모습. 임진 정유의 두 왜란 중 도요토미는 "조선인들의 귀, 코, 머리를 잘라 바쳐라"고 명령했다. 김문길 교수 설명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시절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교과서에 수록한 내용이라고 한다
 조선인들의 귀를 절이는 모습. 임진 정유의 두 왜란 중 도요토미는 "조선인들의 귀, 코, 머리를 잘라 바쳐라"고 명령했다. 김문길 교수 설명에 의하면 일제강점기시절 자신들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해 일본교과서에 수록한 내용이라고 한다
ⓒ 김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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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 전쟁 때에는 귀를 잘랐으나 정유전쟁 때는 코를 잘랐다. 한 사람을 죽이고 두 사람으로 계산해서 전공을 쌓으려는 것을 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하나뿐인 코를 자르도록 명령했다. 임진·정유 두 왜란 상황을 가장 잘 알고 기록한 자는 오카와우치 히데모토이다. 당시 그가 쓴 <조선물어>를 보면 조선인 18만5738명, 중국 명나라군 2만9014명으로 총 합계 21만4752명이 된다.
  
일본 교토 히가시야마구 차야마치에 있는 조선인 귀무덤으로 임진, 정유의 두 왜란 당시 죽은 조선인 12만 6천여명분의 귀와 코가 묻힌 무덤이다. 원래는 코무덤이라 불렸지만 야만적이라 하여 귀무덤으로 개명했다. 무덤 위에는 '고린토'라 불리는 석탑이 세워져 있고 높이 약 7.2m, 높이 약 9m, 폭 49m이다.
 일본 교토 히가시야마구 차야마치에 있는 조선인 귀무덤으로 임진, 정유의 두 왜란 당시 죽은 조선인 12만 6천여명분의 귀와 코가 묻힌 무덤이다. 원래는 코무덤이라 불렸지만 야만적이라 하여 귀무덤으로 개명했다. 무덤 위에는 "고린토"라 불리는 석탑이 세워져 있고 높이 약 7.2m, 높이 약 9m, 폭 49m이다.
ⓒ 김문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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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물어>에 보면 "고니시 유키나가 군에서는 머릿수 879명의 코를 베었다"는 기록이 있다. 머리를 베었다고 하는 기록은 머리를 벤 뒤 두 귀를 잘라 본국에 보낸 것이지 머리를 일본에 보낸 것은 아니다. 장군이라든가 의병장 같은 경우는 머리를 보냈다.

'귀·코베기'와 관련된 왜란의 원흉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이름에 얽힌 사연

보잘 것없는 천민 가정에서 태어난 도요토미는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챙겨주는 일을 맡았다. 추운 겨울날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을 품에 안아 따뜻하게 데운 신발을 주면서부터 신임을 얻은 그는 눈치 빠르고 잔꾀가 많으며 윗사람에게 충성하는 장수로 성장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이름도 그가 전쟁에서 적을 많이 죽이고 머리와 귀, 코를 많이 베었다고 하여 오다 노부나가가 하사해준 이름이다. 당시 오다는 신하들이 잘라 온 적의 머릿수로 등급을 매겨서 수·우·미로 판정했는데 도요토미는 수(秀)에 속하니 히데요시 '수길(秀吉)'이라 했으며, 가장 뛰어난 가신이라 하여 도요토미 풍신(豊臣)이라는 성을 주었다.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일본의 수장이 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두 번에 걸쳐 조선을 침략했다.

일본에서는 소학교부터 대학까지 학생들의 성적을 수·우·미·양·가로 매기는 학교가 많다. 이런 성적평가는 일본 전국시대에 생긴 평가용어라고 한다. 이런 연유를 몰랐던 필자 학창 시절에도 성적평가를 수·우·미·양·가로 했으니 기가 막힐 노릇이다.

김문길 교수... "'논개'의 이름 원래 이름으로 바꿔야"

김문길 교수(명예교수)는 일본에서 15년간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후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역사와 한일 관계사를 강의했다. 그는 두 왜란 당시 있었던 '이비총'과 강제징용, 일본군 위안부, 약탈당한 한국문화를 조사 연구할 뿐만 아니라 츠야마 귀무덤, 대마도 귀무덤, 오카야마 귀무덤, 후쿠오카 귀무덤을 발견 연구한 '이비총' 권위자다. 그가 논개와 관련된 자료를 보내왔다.
 
일본에서 15년간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후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역사와 한일 관계사를 강의한 김문길 교수(명예교수) 모습. 일본에 있는 조선인 귀무덤과 코무덤을 발견하고 연구했다.
 일본에서 15년간 한일관계사를 전공한 후 부산외국어대학교에서 일본역사와 한일 관계사를 강의한 김문길 교수(명예교수) 모습. 일본에 있는 조선인 귀무덤과 코무덤을 발견하고 연구했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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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성씨 계보는 아무리 오래되었다 하더라도 백년이 좀 넘을 뿐이고 아예 일본 가문에는 족보라는 것이 없어요. 임진왜란 때 오카야마 성주였던 우키타 히데이에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을 받아 조선에 보낼 군사를 뽑는데, 오카야마 성 서쪽 가가토에 키가 6척이나 되고 힘이 센 사람이 있었어요. 파병하는 데 이름이 필요하므로 그에게 가가코 로쿠스케(香登六介)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도요토미 군의 기수로 참전시켰습니다.
   
'개(介)'는 일본 고어에서 '크다' '뛰어나다', '특수하다'의 의미가 있어요. 이름과 성이 없을 때 신체 특징을 붙여 키가 큰 사람은 '육개(六介)'라 하고, 몸이 뚱뚱하면 '비개(肥介)', 눈이 큰 사람은 '목개(目介)'라하고 말솜씨가 좋으면 '논개(論介)'라 불렀어요. 호적법이 제정되고 '개(介)'자는 '액개(厄介)'라 해서 '개(介)'자 대신에 '조(助)'자로 바뀌어 오늘날에도 일본인의 이름 끝자에는 '조(助)'가 많습니다."


임진왜란 때 진주 남강에서 충절의 미인 '논개(論介)'에 의해 죽은 왜장도 게야촌의 로쿠스케 육조(六助)이다.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기생 논개는 전라북도 장수에 살던 신안 주씨 양반 가문의 자손으로 학식이 높고 구변이 좋아서 임진왜란 때 진주성을 친 왜장들 가운데 소문이 자자했다. 김문길 교수가 말했다.

"말솜씨가 좋다는 의미로 왜장들 사이에 말쟁이로 통하여 논개라 불린 이름을 역사 교과서에서도 논개라 불리고 있으니 하루빨리 본래 이름을 찾아 바꿔줘야 합니다."

1992년 11월 25일 오카야마에서 출발한 코무덤 영령들은 11월 26일 고국으로 돌아와 1주년이 되는 1993년 11월 26일 전북 부안 호벌치에 안장됐다. 호벌치는 정유재란 때 어느 지역보다 왜적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전라북도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일대이다.

세계 10위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고 5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 '이비총'을 일본에 그대로 둔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하루빨리 우리 조국 땅으로 영혼들을 모셔와 원한을 풀어드려야 한다. 미군 특수부대인 '전쟁포로 및 실종자 확인 합동사령부'가 내세운 슬로건이 주는 의미를 깊이 되새겨야 한다.
 
"조국은 당신을 잊지 않는다 . 한 사람의 병사도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 그들이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뉴스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이비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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