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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1일 오전 경기도의 한 학교에서 찾아가는 학교 단위 백신접종이 진행되고 있다
 2021년 12월 21일 오전 경기도의 한 학교에서 찾아가는 학교 단위 백신접종이 진행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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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맞겠지' 했던 기대는 사라지고 또 다른 불안 속에 새해가 밝았다. 코로나 확진자 제로 행진 속 일상을 누리던 이곳 호주도 몇 주 동안 내리 기록 경신 중이다.

현재의 코로나 재확산 원인으로 백신 정의의 부재를 꼽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백신의 개발과 생산, 접근성에 있어 만연한 국가 간 불평등이 변이 출현과 팬데믹 장기화를 가져오고 있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백신 '원조'가 아닌, 백신 '정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렇지만 백신 정의마저 '의무에 기반한 윤리(deontological ethics)'가 아닌 '결과에 기반한 윤리(teleological ethics)'로 이야기해야 더 힘을 얻는 현재의 상황에 마음이 편치만은 않다. 국제개발 분야에서의 인권과 윤리에 대해 주로 연구해 온 필자로서는, 자국 보호와 보건 안보라는 구호 앞에 규범과 의무의 언어는 얼마나 힘이 없는가를 절감하는 요즈음이다.

타인 접촉 힘든 코로나 시대... 타자는 더 멀어졌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1년간 필자의 연구 주제는 인권, 정의, 글로벌 연대를 가능하게 하는 기저 감정이었다. 팬데믹은 우리가 정말 지구촌에 살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 주었지만, 그런 인식과는 별개로 우리가 아닌 '타자'에 대한 감정적 거리는 더 멀어졌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최근 백신을 둘러싼 국제개발협력 분야의 담론을 '감정'이라는 렌즈로 살펴보고자 했던 필자의 시도를 짧게 소개하고자 한다. 아울러 지난해 11월 시민건강연구소에서 발간한 연구보고서인 '코로나 백신 접종과 시민의 권리'에 시민 연구자로서 참여하면서 느끼고 배운 바를 나누고자 한다.  
 
지난해 11월 27일(현지) 캐나다 토론토의 한 대형 백신 센터에서 시민들이 코로나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 토론토시는 이날 '토론토 백신의 날'을 맞아 하루 동안 400여 명의 보건 관계자를 동원해 2만5천여 명의 시민들에게 백신을 놔줬다.
▲ 백신의 날" 코로나19 백신 맞는 캐나다 토론토 시민들 지난해 11월 27일(현지) 캐나다 토론토의 한 대형 백신 센터에서 시민들이 코로나 백신을 접종받고 있다. 토론토시는 이날 "토론토 백신의 날"을 맞아 하루 동안 400여 명의 보건 관계자를 동원해 2만5천여 명의 시민들에게 백신을 놔줬다.
ⓒ 토론토 신화=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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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주변에서는 거의 1, 2차 접종을 끝내고 부스터샷을 맞기 시작한 지금, 왜 백신 정의를 이야기해야 하는지부터 살펴보자. 전 세계적으로 88.5억 회분의 코로나19 백신이 세계 인구의 57%를 대상으로 접종됐다. 그런데 대부분의 물량이 고소득 국가와 중상위 소득 국가에 집중돼 있고, 2021년 12월 20일 기준 저소득 국가에서는 여전히 인구의 8.1% 만이 백신을 접종한 상태다(관련 기사: WHO "백신 불평등을 끝내야 팬데믹 끝난다").

아래 그림에서 보듯 아프리카, 태평양 도서 지역에서는 백신 접종이 심각하게 지연되고 있어, 아직 1·2차 접종자의 비율이 전체의 3%에 미치지 못하는 국가들도 많은 실정이다. 지난 3개월 간 소비된 부스터샷이 1년 내내 저소득 국가에서 사용된 백신보다 많다는 통계는 이 불평등이 더욱 심화될 것임을 보여준다.
 
인구 100명당 백신 투여 횟수를 나타낸 지도. 한 사람이 여러 회 접종을 한 경우 각각의 횟수가 개별적으로 집계되었으므로 100명당 투여 횟수가 100 이상일 수 있다.
 인구 100명당 백신 투여 횟수를 나타낸 지도. 한 사람이 여러 회 접종을 한 경우 각각의 횟수가 개별적으로 집계되었으므로 100명당 투여 횟수가 100 이상일 수 있다.
ⓒ Our World in Da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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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유의 팬데믹 상황을 맞아 백신의 개발과 생산, 공평한 접근을 촉진하기 위해 세계 정상들은 지난 2020년 세계 백신 공동 분배 프로젝트인 코백스(COVAX)를 출범시켰다.

그렇지만 미국과 영국을 시작으로 각기 자국 국민을 위한 백신 사재기에 돌입하다 보니 백신 구매를 위해 약속한 기금 마련이 지연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백신 물량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백신을 '글로벌 공공재(global public goods)'라 부르며 같이 구매해 나눠 쓰자는 초기 취지는 사라지고, 쓰고 남은 백신을 나눠 주는 방식의 백신 원조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실패의 원인에는 뿌리 깊은 불평등 위에 세워진 글로벌 거버넌스 시스템의 한계, 그리고 위기를 이용해 이윤을 창출하는 '재난 자본주의 (disaster capitalism)' 등 여러 가지가 있다. 원조 및 개발 관련 이슈로만 한정해 보아도 ODA 자금 덕분에 개발된 백신을 ODA의 취지와 무색하게 사기업의 이윤 추구 모델에 맡겨도 되는 것인지 , 백신 외교라는 이름 아래 이루어지고 있는 잔여 백신 기부를 ODA 기금으로 환산해도 괜찮은 것인지 같은 윤리적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재난 위기서 이윤 만들어내는 재난 자본주의 

현재의 백신 원조는 개발원조의 정치화와 자국 이익 추구 경향 강화로 이해해야 한다. 물론 이는 새삼 새로운 건 아니다. 원래 개발원조는 단지 국제사회에 대한 연대의식이나 책무성만이 아니라 자국의 이해관계를 고려해 이루어져 왔다. 그러나 코로나 시대가 이와 같은 원조의 자국주의화를 가속화하고 노골적으로 천명하게끔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앞서 설명했듯, 필자는 이를 감정 사회학에 비추어 이해해보려 했다. 울리히 벡(Ulrich Beck, 독일 사회학자)은 일찍이 '위험사회(risk society)'에서는 안전의 가치가 최우선이 되고 타자화가 일어난다고 했다. 위기의 시기에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와 불안은 높아지고, 비난과 분노의 대상을 찾기 쉽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반중국, 나아가 반이민자, 반외국인 정서가 확산된 것처럼 말이다.

UN 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헤스(António Guterres)가 "우리는 이를 함께 겪고 있고 함께 극복할 것이다 (We are in this together. We will come through this together)"라고 했지만, 많은 이들에게 이 '우리' 의 의미는 배타적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도 다양한 사회적 약자에 대한 '타자화'가 진행되었는데, 물리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멀기만 한 저소득 국가 사람들의 타자화는 말할 것도 없다. 백신은 일반 공공재와 달리 공급이 제한되어 있다 보니 배분의 경합성 문제가 생겨 더욱 그렇다. 코백스를 통한 백신 조달 시스템을 지지하던 한국 정부도 결국 백신 구매와 백신 원조라는 이중 트랙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기존 공여국 다수가 ODA예산을 삭감한 가운데, 한국 정부는 이례적으로 2022년에 ODA 규모를 약 12.3% 확대하고 그 중에서도 보건 분야와 인도적 지원 분야에 지원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렇지만 2021년도에 나온 제3차 국제개발협력 종합기본계획에서 보듯 개발원조의 목표를 대놓고 '국익 실현'이라고 제시하며 원조를 수단화하고 있다. 코로나19 대응을 통해 높아진 국제적 위상과 자부심이, 그나마 국제적 책무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작용할 수 있기만을 기대해 본다. 

한편, 앞서 이야기한 울리히 벡은 위기가 '세계시민화'를 촉진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세계시민주의'는 종종 자국주의의 반대 개념으로서 논의되곤 하지만 사실 단일한 정의가 존재하지는 않는다. 대신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전 세계가 다 연결되어 있는 공동의 운명체라는 인식, 그리고 인간의 존엄성이나 정의 같은 공통의 가치이다.

그런 세계시민주의를 구성하는 기저 감정으로는  타인의 처지에 공감하는 마음(empathy)과 타인의 고통을 나누는 마음(compassion)을 들 수 있다. 전자는 타자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하고, 인권이나 정의 같은 규범적 가치에 대한 헌신을 높인다. 후자는 타인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넘어서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한다. 더구나 마사 누스바움(미국 철학자)은 이들 감정을 배우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으니, 희망적이지 않은가? 세계시민'화'라는 변화형 명사가 보여주듯, 이는 '되어가는 과정'인 것이다. 
 
지난해 6월 각국 정상이 참여한 G7 정상회의 모습. 코로나19 백신 공급 확대 및 보건 역량 강화 방안을 다룬 확대회의 1세션에 문 대통령이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가운데),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오른쪽)과 참석해 있다.
 지난해 6월 각국 정상이 참여한 G7 정상회의 모습. 코로나19 백신 공급 확대 및 보건 역량 강화 방안을 다룬 확대회의 1세션에 문 대통령이 영국 보리스 존슨 총리(가운데), 미국 조 바이든 대통령(오른쪽)과 참석해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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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개발협력 섹터에 몸담고 있는 우리는 이 과정이 항상 현재 진행형일 수 있도록 끊임없이 자기를 돌아보고 있나? 그리고 더 나아가 각자 몸담고 있는 자리에서 그 과정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고 있을까? 글로벌 백신 정의의 실종으로 인해 저소득 국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서 보고 경험하는 우리이다. 우리가 한국 사회에 이를 알리는 것을 통해, 앞서 언급한 'empathy(공감하는 마음)'과 'compassion(고통을 나누는 마음)'의 감정을 고양시킬 수 있다. 

하지만 한국 개발협력계 내에서 백신 정의 이야기는 실종된 것 같다. 앞서 언급한 건강시민연구소의 보고서를 보면, 제 6장에 백신 정의를 위한 글로벌 시민사회의 운동이 소개되어 있다. 지식과 기술의 공유를 위해 지적재산권을 한시적으로 유예하자는 '트립스(TRIPS) 유예안'이 주요 아젠다 중 하나이다.

트립스 유예안은 공급 제한을 완화함으로써 백신의 생산량 자체를 늘리고, 나아가 중저소득 국가의 자체 생산 지원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이는 이번 백신뿐 아니라 향후 치료제 보급, 나아가 다른 질병에 대한 건강권 강화를 위해서도 중요한 이슈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 운동에 참여한 수백 개의 단체 중에는 액션에이드, 옥스팜, GCAP(Global Call to Action against Poverty) 같이 익숙한 국제 단체들의 이름은 보이는 반면, 한국 단체들은 찾아볼 수 없었다. 작년에 코로나와 관련해 열린 무수한 국제개발 유관 행사들에서도 글로벌 보건 거버넌스를 보다 정의롭게 만들기 위한 방안에 대한 논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모두가 안전하기 전엔 누구도 안전할 수 없다"는 슬로건은 글로벌 연대 없이 현 위기의 끝은 없음을 시사한다. 불확실성과 불안을 업고 백신의 정의로운 분배는 원조 메커니즘에 갇혀 버렸으며, 원조 담론은 안보화와 자국 이익 추구 강화로 흐르고 있다. 국경을 넘어서는 'empathy(공감하는 마음)'와 'compassion(고통을 나누는 마음)'에 기반해 인권과 정의를 가치를, 그리고 글로벌 연대를 이야기하자. 나부터 시작하자.

덧붙이는 글 | 발전대안 피다는 성장중심의 현행 개발원조 패러다임을 극복하고, 지구촌 모든 삶이 꽃필 수 있는 대안적 담론을 확산하려 활동하는 시민사회단체입니다. 글쓴이 노재은은 '발전대안 피다'의 전문위원으로,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대학교(University of Western Australia)에서 박사 후 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저널 게재 심사 중이며, 단체의 홈페이지(https://pida.or.kr)에도 올라갈 예정입니다.


태그:#코로나19, #코로나백신, #백신정의, #국제개발협력, #개발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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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대안 피다(구 ODA Watch)는 시민들과 함께 '개발'을 넘어 '발전'을 고민하고, 국내의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개발을 '감시'하며 '대안'을 찾아가는 시민사회단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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