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01.14 11:55최종 업데이트 22.01.14 1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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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이 당선된 2007년 대선에서 단일화 압박을 강하게 받은 후보가 창조한국당 문국현이다. 1949년 출생한 그는 대학 졸업 3년 뒤인 1974년 유한킴벌리에 입사했다.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앞으로 자립해서 살아라"라는 유언을 자식들에게 남기고 재산 대부분을 사회에 환원한 유한양행 유일한이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의 일이었다. 문국현이 입사한 데는 유한양행과 미국 킴벌리클라크가 합작해 설립한 회사다.

21년 뒤인 1995년에 사장이 된 그는 그전부터 유일한을 연상시키는 길을 밟았다.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라는 환경보호운동을 벌이고, 기업 이윤의 사회적 투자를 실천했다. 1997년 IMF 위기 때는 대규모 해고 대신에 근무 시간 감축의 방법으로 생산성과 시장점유율을 높였다.


이명박과 비슷한 면도 있었다. 한 곳에서 오래 근무하다가 CEO가 된 것도 닮았고, 대주주 출신이 아닌 고용 사장이라는 점도 닮았다. 하지만 사회적 책임을 특별히 강조하는 기업에서 그런 가치를 몸소 실천한 CEO라는 점이 달랐다. 국가의 공공 역할을 축소하고 재벌의 시장 주도를 긍정하는 신자유주의의 수혜를 입은 일반적인 대기업 CEO들과 비교되는 길을 걸었다는 점도 달랐다.

신자유주의 대결장

그런 그가 '사람 중심 진짜 경제'를 표방하며 2007년 8월 23일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24일 자 <세계일보> 기사 '문국현 출마 선언... 재벌 중심 가짜 경제와 맞대결'은 "문 사장은 출마 선언에서 '이번 대선은 가혹한 신자유주의의 경제 모델을 추구하는 건설·재벌 중심 가짜경제와 성장·복지를 함께 추구하는 사람·중소기업 중심 진짜 경제가 대결하는 국민적 축제가 될 것'"이라며 "'한나라당 후보에게 신자유주의와 사람 중심 경제성장 모델 중 무엇을 선택할지를 놓고 대논쟁을 정식 제안한다'고 밝혔다"고 보도했다.

대선 이듬해인 2008년은 신자유주의 역사에서 중요한 변곡점이다. 68혁명 등으로 대표되는 반(反)자본주의 물결에 대한 대응으로 1970년대부터 본격 가동되고 1980년대 초반에 공고해진 신자유주의가 상징적 타격을 받은 해였다.

2008년은 신자유주의 리더인 미국에서 글로벌 금융위기가 발생하고 신자유주의 반대편의 중국이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경제대국 이미지가 짙어진 해였다. 그런 2008년이 되기 직전 연도에 벌어진 한국 대선에서 신자유주의에 맞서는 후보와 신자유주의를 수호하는 후보가 비록 양강 구도는 아닐지라도 대선 후보로 만났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볼 수 있다.

문국현이 출마 선언을 한 날은 정동영·손학규·이해찬·유시민이 대결한 대통합민주신당(민주신당)의 후보 경선이 공고되고 2일 뒤였다. 그의 출마 선언이 위력적이었다는 점은 경선이 막 시작된 민주신당에서 문국현 지지자들이 나오고 문국현 대안론이 꿈틀댄 사실에서도 나타난다.

8월 27일 자 <내일신문> '꿈틀거리는 문국현 대안론'은 "문국현 대안론의 요체는 경제담론을 틀어쥐고 50% 이상의 지지율을 확보하고 있는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맞설 맞춤후보론"이라며 이명박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경제담론을 표방하는 문국현을 내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민주신당에서 힘을 얻다고 있다고 보도했다.

2013년에 고려대 정치외교학과 석사학위논문으로 나온 정재관의 '대통령선거에서의 선거연합 형성 요인'에 정리된 대선후보 지지율 추이에 따르면, 문국현은 출마선언 이틀 뒤의 한국갤럽 여론조사에서 1.5%를 기록하며 이명박(60.7%), 정동영(7.2%), 권영길(1.6%)에 이어 4위를 기록했다. 그는 9월 26일 조사에서는 3.7%로 3위로 올라서고, 10월 29일 조사에서는 여전히 3위이지만 9.1%로 올라갔다.

단일화 제안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 대선후보와 창조한국당 문국현 대선후보가 21일 조계사 불교역사기념관에서 열린 '2007 불교계 대선후보 초청토론회'에서 악수를 하고 있다. ⓒ 유성호

 
지지율이 올라가는 동안에 창조한국당 시·도당들이 창당되고 10월 30일에는 중앙당이 창당됐다. 그렇게 세를 늘려가는 문국현을 상대로 민주신당이 손길을 내밀었다. 그를 상대로 하는 단일화 제안이었다. 10월 15일에 민주신당 후보로 선출된 정동영이 이명박에게 현저히 밀리고 있어 단일화 없이는 힘들다고 판단됐기 때문이다.

민주신당의 단일화 추진은 11월 5일의 '반(反)부패 미래사회 연석회의' 제안으로 본격화됐다. 이 제안은 사실상 문국현을 겨냥했지만 외형상으로는 범여권을 상대로 했다. 민주신당·창조한국당 등과 시민사회단체들이 힙을 합쳐 이명박에 맞서자는 제안이었다.

11월 7일의 이회창 출마 선언은 민주신당을 더 난처하게 만들었다. 이회창이 나섬에 따라 이명박의 표가 분산되는 효과도 있었지만, 이회창의 기세가 대단해 정동영이 3위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민주신당 후보가 한나라당 후보가 아닌 무소속 후보와 경쟁해야 할 처지가 됐던 것이다.

이회창의 등장은 한나라당의 표뿐만 아니라 범여권의 표도 잠식시켰다. 그래서 문국현에게도 불리했다. 11월 10일 갤럽 여론조사에 따르면, 이명박은 10월 29일 조사 때보다 12.1%포인트 감소한 41.6%를 기록했다. 9월까지 10% 미만에 있다가 10월 16일 16.2% 및 10월 29일 17.1%로 상승세를 타던 정동영은 11월 10일에는 14.2%로 내려갔다. 문국현 역시 10월 29일 9.1%보다 낮은 7.8%를 기록했다.

민주신당의 단일화 제안은 갈수록 강해졌다. 이명박의 당선을 위험시하는 범여권과 시민사회단체들도 이에 가세했다. 하지만 문국현은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단일화 제안은 그의 출마 포기를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신자유주의에 맞서겠다는 세계사적 의의를 표방하며 출마 선언을 한 그의 입장에서는 신자유주의를 지지한다는 측면에서는 한나라당과 다를 바 없는 민주신당을 위해 그런 희생을 감내하기가 힘들었을 수도 있다.

자신을 향한 단일화 압박이 점점 거세지자 그는 분명한 입장을 내놓기 시작했다. 12월 3일 그는 창조한국당 대변인을 통해 "하늘이 두 쪽 나도 그런 일은 없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민주신당도 포기하지 않았다.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겠다며 더욱 적극적으로 구애했다. 대선에 승리하면 공동정부를 구성할 것이며, 문국현이 지향하는 가치가 실현될 수 있도록 보장할 것이라고 약속했다. 또 문국현을 지지하는 정치세력이 차기 총선을 통해 국회로 진출할 수 있도록 돕겠다며, 이런 약속을 시민사회 원로들을 통해 보증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요지부동이었다. 12월 초부터는 진보 성향의 시민사회 지도자들까지 중재에 나섰지만, 문국현은 끝내 거부했다. 12월 8일 그는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3일 뒤인 11일 밤에 함세웅 신부가 정동영·문국현을 서울 제기동성당으로 초청해 자정을 넘기면서까지 협상을 진행시켰지만, 그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문국현이 단일화를 거부한 가장 큰 이유는 정동영의 지지율에 있었다. 단일화해도 승산이 별로 없었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이다. 또 자신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의 정서도 감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치권과 거리가 먼 그를 지지해준 유권자들은 정치권 전반에 대한 개혁을 희망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기성 정당과 단일화를 하게 되면 선거 승리 여하를 떠나 향후 입지가 불안해질 수도 있었다.

자신을 지지하는 정치인들의 미래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신당이 문국현 지지 세력의 국회 입성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하기는 했지만, 거대 정당이 대선 뒤에 약속을 이행하리란 믿음도 갖기 힘들었다.

그에 더해 민주신당의 협상 태도도 그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12월 8일 자 <뷰스앤뉴스> '문국현, 후보 단일화 결렬 선언'에 따르면, 그는 자신은 '정동영 필패론'을 믿으면서도 단일화 제안에 부응하고자 정책 토론회를 제안했지만 민주신당이 거부했다고 설명했다. '굳이 정책 토론을 할 필요가 있느냐?', '상처만 나는 거 아니냐?'는 반응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는 그런 단일화는 '죽음의 키스'가 될 뿐이라고 말했다. 상처가 날 것을 각오하지 않고 세만 불리려 하는 단일화는 공멸만 초래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위 결렬 선언에서 그는 "상처가 나야 해원의 굿풀이가 되는 것이고 국민이 용서를 하는 것인데, 어떻게 용서 없이 세만 자꾸 불리려고 하니까 죽음의 키스처럼 모이기만 하면 숫자가 자꾸 늘지 않고 줄지 않느냐 그런 이야기들이 아마 실무자들과 대변인들 간에 오고간 것 같다"며 "나는 그분들의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고 못을 박았다.

문국현의 표현대로라면 정동영과의 단일화는 서로를 죽이는 죽음의 키스였다. 두 사람을 살리는 키스가 아니라 두 사람을 죽이는 키스였다. 신자유주의에 맞서겠다며 대선에 출마한 그는 그 죽음의 키스를 피해 대선운동을 완주했다. 12월 19일 대선에서 한나라당 이명박은 48.67%, 대통합민주신당 정동영은 26.14%, 무소속 이회창은 15.07%, 창조한국당 문국현은 5.82%, 민주노동당 권영길은 3.01%를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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