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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최초의 교사노동조합은 1960년 '4‧19교원노조'다. '4‧19교원노조'의 본래 명칭은 '한국교원노조총연합회'다. 대구지역, 그것도 경북여고 교사들이 중심이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항거했던 1960년 2‧28 고교생 데모를 교사들이 막아선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통절한 반성의 결과였다. 오늘날과 달리, 당시 대구는 진보운동의 핵심도시였다.

그러나 '4‧19교원노조'는 창립 1년도 안 돼 5‧16 군사쿠데타 세력에 의해 가장 먼저 짓밟혔다. 군사정권은 '4‧19교원노조'와 관련된 교사들을 쿠데타 이튿날 체포했고 투옥시켰다. 1961년 5월! 박정희 군사독재권력이 '4‧19교원노조'를 잔혹하게 탄압했듯이 1989년 5월! 노태우 군부독재권력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약칭 전교조)을 철저히 짓밟고 탄압했다.
 
1989년 광주광역시 서강고 3학년 졸업생들이 졸업식날 해직된 전교조 선생님들을 기리며 교정에 세운 참교육비석으로 졸업생들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교정에 세웠다. 고난 끝에 지금은 전남대 교정에 있다.
▲ 전남대 교정에 있는 참교육 기념비석 1989년 광주광역시 서강고 3학년 졸업생들이 졸업식날 해직된 전교조 선생님들을 기리며 교정에 세운 참교육비석으로 졸업생들이 십시일반 모금하여 교정에 세웠다. 고난 끝에 지금은 전남대 교정에 있다.
ⓒ 정희곤 선생님, 장권호 선생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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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압 이유는 교사노동조합, 전교조를 탈퇴하지 않았다는 단 한 가지 이유였다. 수구언론들은 교사가 노동자가 아니라며 탄압을 부추겼다. 게다가 색깔론을 내세워 전교조가 내건 '참교육'을 좌파 이념교육으로 내몰았다. 당시 한국사회 지배집단은 부패했고 그 양상은 교육계도 마찬가지였다.

윗물이 맑지 않고 혼탁하다 보니 학교 현장엔 '촌지'란 이름의 뇌물이 횡행했다. 촌지뿐만 아니라 부교재(참고서) 채택료와 수학여행 비리를 비롯해 온갖 추잡한 관행들이 학교에서 공공연히 벌어지는 일상이었다. 서울지역의 경우 교장, 교감이 되려면 '교감 5백만 원, 교장 천만 원'이라는 '감오장천'이 부끄러움도 없이 회자되던 시절이었다. 매관매직뿐만이 아니었다. 촌지를 넙죽넙죽 받아먹거나 노골적으로 촌지를 요구하던 일부 타성에 젖은 교사들 가운데엔 강남 지역 학교 발령을 강렬히 욕망하던 시절이었다.
  
1989년 5월 전교조 창립 이후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에도 전교조는 그해 10월 28일 최초로 합법집회를 개최했다. 전국적으로 45개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전개된 이 날 집회에 교사, 학생, 학부모 4만 명이 참가해 <촌지거부운동>을 펼쳤다.
▲ 촌지거부운동을 전개한 전교조 집회장면  1989년 5월 전교조 창립 이후 군부독재정권의 탄압에도 전교조는 그해 10월 28일 최초로 합법집회를 개최했다. 전국적으로 45개 지역에서 동시다발로 전개된 이 날 집회에 교사, 학생, 학부모 4만 명이 참가해 <촌지거부운동>을 펼쳤다.
ⓒ 전교조 <교육희망>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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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년대 후반 "강남지역 고3 담임은 연간 2,000만원, 1학년 담임은 1,500만원, 2학년 담임은 1000만원이 촌지로 들어온다"는 이야기가 교사들 사이에선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80년대 후반 당시 교사의 월급은 40-50만원 정도였다. 교사 연봉을 몇 배로 훌쩍 넘어서는 거액이 촌지로 들어오던 시절이었다. 따라서 학교장에게 밉보일 경우, 고3 담임은커녕 담임 자체를 맡을 수가 없었다.

촌지로 상징되는 교육계 부패와 살인적인 입시경쟁교육이 당대 교육계가 처한 고통스러운 현실이었다. 그 고통 속에서 매년 300명에 이르는 청소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986년 1월 서울사대부속여자중학교 '0양의 유서'는 당대 교사들을 한없이 부끄럽게 했다. 그해 5월 교육주간을 맞아 교육운동을 하던 교사들이 발표한 '교육민주화선언'은 '0양의 죽음'에 대한 교사 집단의 통절한 참회록이었다.

서명으로 선언에 동참했다는 이유만으로 교사들은 학교에서 징계를 받거나 쫓겨났다. 그러나 징계가 두려운 게 아니었다. '0양의 유서' 전편을 읽다보면 교사들은 깊은 자괴감으로 전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만큼 '0양의 유서'는 당대 교사들에겐 죽비로 내리치는 충격이었다. 한 마디로 '0양의 유서'는 1970년 절망적인 노동현실에 죽음으로 항거한 전태일의 분신항거에 버금가는 일대 사건이었다.

살인적인 입시경쟁교육과 난무하는 교육계 부패에 저항하며 무엇보다 '교육의 본질'을 회복하려는 교사집단의 철저한 자기 성찰이 교사노동조합, 바로 '전교조'를 탄생시켰다. 따라서 전교조는 당대 교육민주화운동으로 시대정신을 고스란히 구현한 결정체였다. 전교조가 가장 먼저 교육개혁으로 실천한 과제가 '촌지거부운동'이었다. 나아가 출판업자에게 참고서를 채택하고 뒷돈으로 받는 '부교재 채택료 거부운동'이 있었다. 

이어서 전교조 교사들은 교육운동을 통해 "교장의 명을 받아 학생을 지도한다"는 황당한 교육악법을 폐지하는 데 앞장섰다. 학교운영에서 교장의 독단과 전횡을 막고 민주적인 학교운영을 촉구하며 교원인사위원회 설치를 주장한 것도 전교조 교사들이었다. 나아가 지시와 전달을 교무수첩에 받아 적으며 침묵만이 흐르던 교직원회의를 변화시킨 일도 전교조 교사들이었다. 회의 도중 벌떡 벌떡 일어나 당당히 발언함으로써 교직원회의가 토론이 가능한 회의여야 한다는 사실을 몸으로 실천한 '벌떡교사'의 등장 또한 전교조 교사들이 수고한 헌신의 결과였다.
  
2019년 5월 전교조 30주년을 기념해 조계사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하기 전에 조계사 근처에 내걸린 교육개혁 걸개 표어들.
▲ 2019년 전교조 30주년 기념 집회 당시 내걸린 플래카드 2019년 5월 전교조 30주년을 기념해 조계사에서 청와대까지 행진하기 전에 조계사 근처에 내걸린 교육개혁 걸개 표어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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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제 야간자율학습과 강제 보충수업을 폐지시킨 것도 전교조 참교육 운동의 결실이었다. 나아가 학생체벌 금지를 통해 학생인권을 옹호하고 '학생권리선언문'을 작성한 것도 전교조 교사들이었다. 식민지 시절부터 관행처럼 내려온 '학습지도안 작성'을 폐기하고 일숙직과 방학 강제 근무를 폐지시킨 것도 전교조 운동의 결실이었다. 교사통제장치였던 '출근부 날인제도'를 폐지시킨 것도 전교조 단협 투쟁의 결과였다.
  
2020년 전교조는 학급당 학생수 20명을 상한으로 하는 교육관련법 개정을 국민청원 입법 발의한 상태로 학급당 학생수 감축투쟁을 추진하고 있다.
▲ 전교조 본부 건물 입구에 있는 <학급당 학생수 20명 이하 감축>을 촉구하는 걸개 표지 2020년 전교조는 학급당 학생수 20명을 상한으로 하는 교육관련법 개정을 국민청원 입법 발의한 상태로 학급당 학생수 감축투쟁을 추진하고 있다.
ⓒ 하성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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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전교조 창립과정에서 100명이 넘게 구속을 당했고 1500명이 넘는 교사들이 일거에 학교현장에서 쫓겨났다.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교육대학살'이자 전 방위적인 국가폭력을 노태우 군부정권이 서슴없이 자행한 탓이다. 전교조 조합원 교사를 동료 교사가 얼굴을 구타하거나 '참교육'을 받고 싶다며 전교조 교사들을 따르던 학생들을 모욕하고 구타한 사건은 너무도 빈번해 여기에 다 옮길 수 없을 정도다. 글쓴이가 해직된 학교에선 참교육을 지지한 학생을 무릎 꿇리고 콘크리트 바닥에 머리를 박게 한 채 구둣발로 차며 반성문을 쓰게 한 일도 있었다. 어느 시골학교에선 전교조를 지지한 학생을 삽으로 위협하며 폭력을 자행한 교사도 있었다.

노태우 군부독재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병상에 누워계신 부모님에게 전화를 걸어 회유하거나 말기 암투병 중인 부친을 위해 부득이하게 탈퇴한 교사에게 교육청 고위관료가 직접 전화를 걸어 탈퇴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야만성을 버젓이 저질렀다. 결혼식 주례를 선 선배교사를 동원해 회유하고 대학 선후배 사이 연줄을 통해 교육자로서 양심을 쉼 없이 흔들어댔다. 모두 글쓴이가 재직한 학교에서 벌어진 탄압 양상이다. 학교당국의 묵인 하에 동원된 일부 학부모들은 단식 농성 중이던 교무실로 난입해 "이 새끼, 저 새끼" 거친 욕설을 내뱉으며 "불에 태워 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12명은 다 감옥에 쳐 넣어야 할 놈들!"이라고 소리 지르며 입에 담을 수 없는 폭언을 퍼부었다.

전교조 교사들은 노동조합을 지키기 위해 불의한 권력의 탄압에 맞서 목숨을 걸고 단식투쟁으로 맞섰다. 잔혹한 국가폭력이 자행된 현실에 죽음으로써 항거한 선생님도 계셨고 거듭된 단식 투쟁 끝에 위암으로 악화돼 30대 젊은 나이로 유명을 달리한 선생님도 계셨다. 학생들 또한 학교당국의 징계 겁박에도 굴하지 않고 '참교육 지지 투쟁'에 결연히 거리로 나섰으며 파면 당한 선생님을 지키기 위해 혈서를 쓰거나 투신도 마다하지 않았다.
  
1989년 7월 14일 전교조 교사 파면에 항의하는 고교생들이 운동장 항의 집회 후 거리로 진출했을 때 전경들이 무자비하게 몽둥이로 내리치는 장면(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학생사업국에서 발간한 학생탄압사례집 표지를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 스승을 돌려달라는 학생들의 외침과 거리 시위를 몽둥이로 탄압하는 전경들 1989년 7월 14일 전교조 교사 파면에 항의하는 고교생들이 운동장 항의 집회 후 거리로 진출했을 때 전경들이 무자비하게 몽둥이로 내리치는 장면(출처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학생사업국에서 발간한 학생탄압사례집 표지를 글쓴이가 다시 찍은 것임)
ⓒ 전국교직원노동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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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30년도 넘는 시간이 흘러 한 세대가 지났다. '교육민주화운동'으로 고통을 겪은 교사와 학생들에게 국가는 사죄해야 한다. '민주화운동관련자'라는 증서 한 장으로 외면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이미 100명이 넘는 교사들이 유명을 달리했다. 가족이 해체되거나 병마에 시달리다가 저 세상 사람이 돼버렸다.

참교육 1세대 전교조 해직교사들은 이제 60-70대 고령의 나이에 접어들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당시에 참교육을 위해 전교조 교사들을 지지했다는 이유만으로 구속되고 퇴학당하며 징계를 받았던 학생들의 고통에 대해서도 국가는 마땅히 사과하고 바로 잡아야 한다. 그 길이 비틀린 교육계 역사정의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다. 교육개혁은 과거 비틀린 교육정의를 바로 세우는 일에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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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원으로 가입하게 된 동기는 일제강점기 시절 가족의 안위를 뒤로한 채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펼쳤던 항일투사들이 이념의 굴레에 갇혀 망각되거나 왜곡돼 제대로 후손들에게 전해지지 않은 점이 적지 않아 근현대 인물연구를 통해 역사의 진실을 복원해 내고 이를 공유하고자 함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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