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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업구락부 회원들의 전향성명서(매일신보, 1938.9.4.) (매일신보)
 흥업구락부 회원들의 전향성명서(매일신보, 1938.9.4.) (매일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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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독부는 '문화정치'라는 이름 아래 1921년 5월 이광수를 중국에서 회유ㆍ귀국시키고 이해 6월 복역중인 최린과 최남선을 가출옥시키면서부터 '실력양성', '참정권청원'(또는 자치청원), '민족성 개조' 등 '민족개량주의'의 슬로건을 내걸고 민족주의 우파세력에 대한 선무ㆍ회유에 들어갔다.

일제는 우파인사들과 친일단체들에게 '공존공영' '일선융화' '참정권획득' 등의 기만적 슬로건을 표방케 하면서 이들에게 '민족개량주의' 사상을 침투시켜 일제에 타협하고 협력토록 하였다.

혹독한 무단총칼통치보다 이와 같은 '개량정치'가 민족주의자들에게는 더욱 견디기 어려웠다. 민족의 정신을 말살하는 책략이었기 때문이다. 총독부의 통치가 교활해지면서 조선사회는 숨막히는 공동묘지처럼 변화되었다. 박동완은 <신생명>을 떠난 후 한동안 생계 수단으로 동서문안 경성공업사에서 일하였다.

"박동완 선생은 그간 기독신보사 주필로 계시다가 7월부터 창문사에서 발행하는 신생명을 주간하여 왔는데 모든 것에 뜻과 같이 아니되어 붓을 버리고 약 1개월 전부터 동서문안 경성공업사에서 일을 보신답니다." (주석 16)

박동완은 일체의 글쓰기를 중단하고 직접 민족운동에 뛰어들었다. 3ㆍ1혁명으로 큰 타격을 입은 YMCA 부흥운동, 흥업구락부 활동, YWCA가 추진한 금주ㆍ금연운동, 조선민립대학 기성회 참여, 병탄 이후 급속히 들어온 일본산 상품으로 민족산업이 붕괴되자 조선물산 장려운동 등 당시 전개된 각종 민족운동에 빠지지 않고 참여하였다. 더러는 핵심적인 역할도 맡았다. 

이 시기에 그는 특히 물산장려회 이사, YMCA 연합회 농촌부위원, 중앙YMCA 교화진흥연구중앙위원 등으로 맹활약하였다. 또 1921년 11월 신문ㆍ잡지의 발행인 편집ㆍ기자 등 언론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로 조직된 무명회(無名會)가 결성될 때 큰 역할을 했다. 조선인의 언론자유 신장과 회원의 권익옹호를 내세우고 신문ㆍ잡지의 검열 및 허가제도 철폐에 앞장섰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성과는 총독부의 철벽을 넘기 쉽지 않았다.

무명회는 회원 자격을 "민중의 정신과 배치되지 아니하는 언론인"으로 규정하여 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기자들은 회원에서 배제시켰다. 또 1925년 4월에는 한국초유의 '전조선기자대회'를 여는 등 일제와 힘겹게 싸웠다. 그는 <기독신보>와 <신생명> 편집인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박동완은 1925년 3월 23일 사직동 신흥우 집에서 이상재ㆍ구자옥 등 기독교 유력 인사들이 조직한 흥업구락부에도 참여했다. 명칭을 실업단체로 위장하고자 흥업이라 취한 것이고 실제로는 독립운동의 비밀결사였다. 초대 부장에 이상재, 회계에 윤치호ㆍ장두현, 간사로 이갑성ㆍ구자옥이 선출되었다. 흥업구락부는 여섯 가지의 사업목표를 설정하였다. 

① 민족관념을 보급하고 조선독립을 도모할 것. ② 단체적 행동을 위한 필요상 단체의 지도자에게 복종할 것, ③ 산업의 발전과 자급자족에 노력할 것, ④ 계급 및 종교 지방적 파벌을 타파하고 민족적으로 대동단결할 것, ⑤ 목적을 설명하여 상대방을 선도하고 열복(悅服)시켜 (동지를) 획득할 것, ⑥ 교화사업에 노력할 것. 즉, 학교ㆍ문화단체로 하여금 민족적 계몽강연회를 개최할 것 등이다. 

기독교 장로와 목사 및 학교직원 기타 사회유력자로 구성된 흥업구락부는 산업부흥과 회원들의 복지향상을 도모하는 친목단체로 위장하면서 해외에 있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보내주었다. 

흥업구락부 회원들은 13년여 동안 재미한인독립운동단체인 동지회와 밀접한 연락을 맺으며 활동을 하다가 1928년 5월 미국에서 돌아온 윤치영을 취조하던 일경에 덜미가 잡혀 핵심간부 54명이 구속되었다. 박동완도 이때 구속되어 서대문서에서 견디기 어려운 문초를 받았다.

일제당국자들은 이 사건의 중심인물들이 모두 유식 지도자계급의 인물들로 사회적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 사건을 계기로 이들을 '전향'시켜 그들을 전쟁협력자로 역이용하고자 온갖 위협과 회유를 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의도는 "다수 유식인사를 사회적으로 매장해 버리지 말고 총후활동(銃後活動)에 자발적 협력을 하게 하여 충량한 제국인민으로서 갱생시키는 것이 각반의 정세로 보아 가장 적절 타당한 것으로 믿기 때문에……경무당국에서도 사건의 취급에 관해서는 특히 유의하여 장래에 사건관계자의 갱생과 활약을 간절히 희망하고 있는 바……"라고 하는 미하시  (三橋) 경무국장의 말에 잘 나타나 있다. (주석 17)

일제는 이들 중 상당수 인사를 친일로 '전향'시켜 앞장이로 활용하였다. 이로부터 전향자가 속출하고 국내 우파 민족진영이 허물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박동완은 끝내 전향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흥업구락부원의 주요경력(1925〜26년 현재) 

이상재
독립협회 부회장, 중앙 YMCA 교육부 위원장, 중앙 YMCA 총무, YMCA 연합회 위원장, 조선교육협회 회장, 민립대학기성회 위원장 

윤치호
독립협회 회장, 한영서원 교장, 청년학우회 회장, 중앙 YMCA 총무

유성준
중앙학교 교장, 충북 도지사, 민립대학기성회 상무위원, 물산장려회 이사장, YMCA연합회 농촌부 위원 

신흥우
배재고보 교장, 중앙 YMCA 이사

이갑성
3ㆍ1운동 민족대표(장로교), 민립대학기성회 집행위원, 물산장려회 이사

오화영
3ㆍ1운동 민족대표(감리교), 중앙 YMCA 종교부 위원장

박동완
3ㆍ1운동 민족대표(감리교), 물산장려회 이사, YMCA연합회 농촌부 위원, 중앙 YMCA 교화진흥연구 중앙위원

홍종숙
중앙 YMCA 이사, 중앙 YMCA 교화진흥연구 중앙위원

구자옥
YMCA 연합회 도시부 위원

안재홍
중앙학교 학감, 중앙 YMCA 교육부 간사, 조선사정연구회 회원

유익겸
조선사정연구회 회원

장두현
흥일사(興一社) 사장, 조선상업은행 감사,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 취체역, 광장주식회사 취체역, 경성융흥주식회사 취체역, 민립대학기성회 회금보관위원, 물산장려회 이사

정춘수
3ㆍ1운동 민족대표(감리교), 중앙 YMCA

신석구
3ㆍ1운동 민족대표(감리교)

신흥식
3ㆍ1운동 민족대표(감리교)

김영섭
동지회 간부, 뉴욕 한인감리교회 목사

김일선
중앙 YMCA 회우부 간사, 민립대학기성회 회금 보관위원, 인창의숙 이사장

홍병덕
중앙 YMCA 교육부 간사, 중앙 YMCA 교화진흥연구 중앙위원

이건춘
중앙 YMCA 회원부 간사

이상협
매일신보 편집장, 동아일보 편집부장,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

김동성
동아일보 조사부장, 범태평양기자대회 부회장

김준연
조선사정연구회 회원

조정환
조선사정연구회 회원

최두선
조선사정연구회 회원

정대현
민립대학기성회 발기인

박승철
조선신작장려계 회원, YMCA학교 동창회장, 조선사정연구회 회원

김윤수
동양물산주식회사 상무취체역, 범태평양상업대회 부회장, 민립대학기성회 회금보관위원, 물산장려회 이사

이정범
범태평양상업대회 참석

최  남
조선상업은행원, 조선일보 기자, 덕원상점 사장

구영숙
감리교 전도사

<출전> 김성태, <1920~1930년대 동우회ㆍ흥업구락부 연구>, <한국사론> 28, 234~235쪽, 1992.


주석
16> <동아일보>, 1925년 10월 4일.
17> 김승태, <흥업구락부>, <한국독립운동사사건(7)>, 701쪽, 독립기념관, 2004.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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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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