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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고독한 미식가>의 주인공은 소소한 탐식을 통해 일상의 고단함과 노곤함을 이겨냅니다. 고독한 방구석 연주자인 임승수 작가는 피아노 연주를 통해 얻는 소소한 깨달음과 지적 유희를 유쾌한 필치로 전달합니다.[편집자말]
인간의 감각기관은 그 정체성이 끊임없는 갈증과 공복감에 있는 것 같다. 수백 병의 와인을 경험한 애주가는 자신의 미각을 더욱 만족시킬 와인을 찾아 동분서주하며, 수백 편의 영화를 섭렵한 애호가는 다가오는 주말에 감상할 영화를 선별하느라 여념이 없다. 오디오에 진심인 자들은 이미 보유한 기기보다 한층 뛰어난 성능의 스피커, 앰프를 장만하기 위해 주택담보대출도 불사할 기세다.

피아노가 취미인 이들도 마찬가지다. 한낱 보잘것없는 방구석 아마추어인 나 역시 88개의 건반을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눌러 가능하면 더욱 아름답고 감동적인 소리를 만들려고 애쓴다. 이러건 저러건 음악의 본질은 소리 아니겠는가. 더 좋은 소리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마추어와 프로는 동일한 정서와 목표 의식을 공유한다.

지난 2021년 11월에 4회에 걸쳐 개인레슨을 받으며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의 완성도를 제법 끌어올리고 나니, 지금의 내가 '최상의 조건'에서 연주했을 때 만들어낼 수 있는 소리의 한계를 가늠하고 싶었다. 여기서 최상의 조건이란 음악 공연을 위해 설계된 전용 공간에서 프로 연주가가 사용하는 피아노로 연주했을 때를 의미한다.

일단 피아노는 스타인웨이 그랜드피아노, 그것도 길이 274센티미터에 이르는 풀사이즈 D-274 모델로 해야겠지. 뉴욕 말고 독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에서 제작된 피아노가 더 좋다니 기왕이면 그놈으로 말이야. 그래야 랑랑, 김선욱, 조성진 등과 동등한 조건으로 연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방구석에서 비비는 주제에 무슨 장비 타령이냐고? 오히려 처참한 결과물이 나오더라도 피아노 탓을 할 수 없는 가혹한 조건 아닌가. 가격이 거의 3억 원에 육박하니 집을 팔지 않는 이상 구입은 불가능하고, 결국 원하는 피아노를 보유한 공연장을 빌려서 연주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방구석 아마추어의 연습 대관

이래저래 관련 정보를 검색하니 서초동에 있는 201석 규모의 모차르트홀이 독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 풀사이즈를 보유하고 있으며 독주회 및 실내악 공연에 최적화된 연주홀이었다.

공연을 목적으로 대관한다면 엄청난 비용이 소요되겠지만, 홈페이지를 살펴보니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한 '연습대관' 항목을 발견할 수 있었다. 공연장에서 스타인웨이 풀사이즈를 연주하는 체험 자체에 목적을 둔 사람에게 적합한 선택지였다. 일반적으로 전공생이나 입시생 혹은 프로 피아니스트들이 무대체험을 목적으로 활용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연습대관이라 하더라도 순도 100% 방구석 아마추어가 대관하겠다고 연락하면 공연장 측에서도 선뜻 내키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다. 취미생 개인이 스타인웨이 풀사이즈를 연주하겠다며 모차르트홀을 빌리는 경우는 흔치 않을 테니 말이다. 상황이 그리하여 공연장 측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연습대관이 성사될 수 있도록 진심과 정성을 담아 메일을 작성했다.

"음향이 좋은 홀에서 최고의 피아노로 연주했을 때 어떤 소리를 경험할 수 있는지 제 아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습니다. 아이들이 음악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고요. 음악을 평생의 업으로 삼으신 분들이 이용하는 공간이라 저 같은 아마추어가 이런 문의를 드리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름다운 소리가 무엇인지 체험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 간절한 마음으로 문의드립니다."

아이의 교육적 목적을 강조하면 좀 더 긍정적으로 검토하지 않을까 싶었다. 실제로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초등학교 5학년, 2학년 두 딸을 데려갈 계획이기도 했고. 다행히 진심이 통했는지 가능하다는 메일이 왔다.

날짜를 협의해 2021년 12월 21일 오후 1시 30분부터 3시 30분까지 2시간 동안 대관하기로 했다. 구체적인 일정이 잡힌 후 더욱 열심히 피아노 연습을 했다. 연습대관이라고는 하더라도 글 팔아 먹고사는 작가에게는 꽤 부담되는 비용을 치렀으니 최고의 성과를 뽑아내야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드디어 12월 21일! 모차르트홀에 모인 사람은 나와 아내에 초등학생 두 딸, 그리고 피아노에 몹시 진심인 지인 한 명 해서 총 다섯 명이었다. 코로나 확진자 수 급증으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화되어 공연장에 네 명 이상 입장할 수 없다 보니 아이 둘 중 한 명은 밖에서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 문제는 곧 자연스럽게 해결되었다. 아이 둘 다 스타인웨이보다 스마트폰 게임을 좋아해 기꺼이 공연장 밖으로 나갔기 때문이다.

고유번호 594147인 독일 함부르크 스타인웨이 D-274가 압도적 위용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일단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살려 '저 들 밖에 한밤중에'부터 연주했는데, 집에 있는 피아노와는 격이 다른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음향이 뿜어져 나와 온몸을 휘감는 것 아닌가.

캐럴 연주를 마친 후 뭔가에 홀린 듯 "대박이다! 어떻게 이런 소리가 나지? 미쳤다 미쳤어"를 되뇌며, 벌거벗고 '유레카'를 외치던 아르키메데스처럼 무대에서 정신없이 왔다갔다했다. 메일에서 그렇게 아이들 교육 운운했는데 정작 애들은 스마트폰 삼매경이요, 되레 내가 난생처음 달고나를 경험한 어린이마냥 들떴구나.

내 연주로 이런 소리가 가능하다니
 
집에 있는 피아노와는 격이 다른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음향이 뿜어져 나와 온몸을 휘감았다.
▲ 모차르트홀의 스타인웨이 D-274 집에 있는 피아노와는 격이 다른 섬세하면서도 웅장한 음향이 뿜어져 나와 온몸을 휘감았다.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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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구체적인 인상을 얘기하자면, 일단 건반이 상당히 가벼웠다. 그랜드피아노는 덩치도 그렇고 소리도 훨씬 크니 대부분 건반도 묵직하고 무거울 것으로 예측한다. 하지만 스타인웨이의 건반은 1밀리그램의 하중 변화에도 반응할 준비가 되었다는 듯 하늘하늘 가벼웠다. 그 가벼움을 통해 구현해낸 예민함과 섬세함은 완성도 높은 피아니시모를 구현할 수 있게 만드는 핵심적 요소다.

성능이 떨어지는 (우리 집 거실) 피아노의 경우 건반을 약하게 누르면 그 미세한 힘에 제대로 반응하지 못해 아예 소리가 나지 않기도 한다. 하지만 스타인웨이는 극도로 여린 음에서부터 천둥이 치는 것과 같은 강력한 포르티시모까지, 표현할 수 있는 소리의 범위가 태평양처럼 넓다. 음색의 영롱함과 다채로움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을 것이고. 시각에 비유하자면 내내 1970년대 흑백 브라운관 TV만 보다가 갑자기 초고해상도 모니터로 고화질 동영상을 접하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드디어 개인레슨까지 받으며 갈고닦은 인생곡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를 스타인웨이 풀사이즈로 연주했다. 곡의 도입부터 종지부까지 내내 황홀한 저세상 음색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함에도 기존 피아노와 가장 큰 차이를 느낀 부분을 한 곳만 고르라면, 다음 악보에 나오는 연속적으로 화음을 연주하는 부분을 꼽겠다.

집에 있는 피아노나 개인레슨을 받던 학원의 피아노로는 그 어떤 방식으로 연주해도 만들어낼 수 없는 음향이 너무나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오는 것 아닌가. 보시다시피 악상 기호는 피아니시모(pp)인데다가, 우나 코르다(una corda) 표기에서 알 수 있듯이 약음 페달을 밟고 연주한다.
 
스타인웨이로 연속된 화음을 연주하는데,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같은 아련하고 아득한 피아니시모가 울려 나오는 것 아닌가.
▲ 브람스 인터메조 Op.118 No.2 악보 스타인웨이로 연속된 화음을 연주하는데,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같은 아련하고 아득한 피아니시모가 울려 나오는 것 아닌가.
ⓒ 임승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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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함부르크에서 물 건너온 스타인웨이로 연속된 화음을 연주하는데, 저 멀리서 들려오는 교회 종소리 같은 아련하고 아득한 피아니시모가 울려 나오는 것 아닌가. 듣고 있던 아내도 피아노 소리가 무슨 종소리 같다면서 결국 이 모든 게 장비빨이냐고 한숨을 내쉰다.

아마도 덕후 기질이 다분한 내가 스타인웨이 구입을 진지하게 고민할까봐 내쉰 우려의 한숨인 듯싶다. 예술의전당 연주회에 가면 어김없이 놓여있는 피아노이고 대부분의 전문 연주자가 이 모델로 연주하지만, 타인의 연주를 듣는 것과 내 손가락을 직접 움직여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은 먹방 시청과 직접 섭취만큼이나 달랐다.

일분일초가 죄다 돈이다 보니 마치 노래방에 온 것처럼 끊임없이 시간을 체크했다. 아내가 자기도 연주해보자며 조지 윈스턴의 캐논 변주곡을 뚱땅거리는데, 소리는 귀에 안 들어오고 속절없이 흘러가는 초침만 신경 쓰인다. 스타인웨이를 연주하는 남편 모습을 영상으로 찍느라 팔에 근육 생길 정도로 고생한 아내인데, 지금 생각해도 내가 참 못났구나 싶다.

어느덧 예약한 시간이 다 되었지만, 노래방에도 서비스 시간이 있는데 오후 3시 30분 됐다고 바로 쫓아내겠냐 싶어 멈추지 않았다. 공연장 관계자도 그런 나의 절실한 마음을 감지했는지 밖에서 대기만 하고 있었다. 이번이 생애 마지막 대관이라면 강제퇴거 직전까지 안면몰수하고 연주했겠지만, 왠지 1~2년에 한 번씩은 연습대관을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어 적절한 타이밍에 연주를 멈추고 공연장 관계자에게 사전 포석의 의미가 깔린 공손한 인사를 전했다.

갖고 싶은 마음, 상상으로 달래본다

그렇게 스타인웨이 소리에 만취한 상태로 휘청휘청 모차르트홀을 나섰는데, 기념사진 촬영하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음을 집에 도착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도대체 이 무슨 정신머리인지. 다행히 모차르트홀 측의 배려로 며칠 후인 12월 26일 오후 2시에 재방문해 스타인웨이를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할 수 있었다.

두 시간, 짧다면 짧다. 하지만 여행의 본령이 감각기관을 통해 새로운 자극을 수용하고 경험하는 것이라면, 모차르트홀의 스타인웨이 체험은 명승지의 절경 정도는 훌쩍 뛰어넘는 감흥을 남긴 여행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뭘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나 혼자만 이러는 거라면 수긍하겠다만, 그날 동석해 스타인웨이를 직접 연주했던 지인은 그 후 학원에서 피아노를 칠 때마다 소리가 비교되어 의욕이 떨어지고 슬럼프가 왔단다. 스마트폰의 조악한 녹음 기능 탓에 그 황홀한 음향의 1%도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지만, 궁금한 분들을 위해 아내가 고생하며 촬영한 영상을 공유한다.

☞ 동영상 보러가기 https://youtu.be/x1X3xuHDl50
 

프로 피아니스트와 비교하면 실수투성이에 보잘것없는 연주지만, 최고의 환경을 마련해 열심히 연주한 만큼 미련도 후회도 없다. 마냥 흐뭇한 마음으로 수십 번 반복 청취를 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사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인적이 드문 시골로 내려가면 '스타인웨이 D-274+땅값+건축비' 충당이 가능하지 않을까?

274센티미터에 달하는 스타인웨이를 놓아야 하니 거실은 크고 여타 생활공간은 미니멀하게 설계해 건축비를 최소화하자. 아이들은 대자연을 벗 삼고 스타인웨이 소리를 들으며 크는 거지. 정서 함양에 그만이네. 아내에게 슬쩍 운을 떼 봤더니 이혼하고 혼자 가란다.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겠다.

보자. 스타인웨이를 꼭 우리 집 거실에 둬야만 할까? 설사 로또에 당첨되어 구입하더라도 현재 거주하는 30평대 아파트에는 274센티미터짜리 대물을 들여놓을 공간이 없다. 그렇다면 내 소유의 스타인웨이가 있지만 공간 문제로 모차르트홀에 맡겨놨다고 생각(착각)하면 어떨까?

연습대관 비용을 창고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꽤 그럴싸하지 않은가. 아직도 12월 21일의 취기가 가시지 않은 것 같다고? 냅두쇼, 그냥 이러고 살게. 그 누구도 내 상상력에 비용을 청구할 수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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