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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열사 사당 고려말 명장 정지 장군을 배향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4대 사우중 한 곳이다
 경열사 사당 고려말 명장 정지 장군을 배향하고 있다. 광주광역시 4대 사우중 한 곳이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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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1383년. 고려 말 우왕 9년 여름, 한동안 뜸하던 일본 해적 떼 왜구(倭寇)들이 120여 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경상도 남해안으로 쳐들어 왔다. 이 지역을 수비하고 있던 합포원수(合浦元帥) 유만수(柳曼殊)는 물밀 듯 밀려오는 왜구들을 맞서기에 중과부적임을 알아차리고 목포에 주둔하고 있던 해도원수(海都元帥) 정지(鄭地) 장군에게 긴급 지원을 요청했다. 해도원수는 지금의 해군참모총장 격이다.

급보를 전해 들은 정지 장군은 즉각 47척의 함대를 이끌고 밤새 노를 저어 섬진강 어귀에 도착했다. 왜구들의 대함선 역시 남해 관음포에 진을 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무심하게 비가 내리고 있다. 최무선 장군이 발명한 화포로 무장한 정지 장군의 함대는 당혹스러웠다. 비가 내리면 화포를 사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관음포 해전의 전투 장면
 관음포 해전의 전투 장면
ⓒ 임영열. 유물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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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마저 아군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불고 있었다. 최신 무기를 장착하고 출전한 탓에 사기충천했던 군사들마저 동요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함을 직감한 장군은 지리산 신령께 고려의 염원을 담아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나라의 존망이 이 한 번의 전투에 달려 있사오니 바라옵건대 저를 도와 신(神)의 부끄러움이 없게 하소서." 장군은 땅에 머리가 닿도록 큰 절을 올렸다. 순간 하늘도 감동하였는지 비가 그치고 바람은 아군에게 유리하게 불었다.

이때를 놓칠세라 장군은 전군에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적진으로 돌진한 함선은 불을 뿜어내며 화포를 발사해 선봉에 선 왜적선 17척을 단번에 박살 냈다. 이 모습을 보고 놀라 도망가는 본진을 각종 화포로 공격하여 전멸시켰다. 바다에는 포연(砲煙)이 자욱했고 왜적의 시체는 헤아릴 수 없었다.
  
경열사 외삼문, 충의문
 경열사 외삼문, 충의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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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장군의 홍산대첩, 나세 장군의 진포대첩, 이성계의 황산대첩과 함께 고려말 왜구를 무찌른 4 대첩으로 불리는 정지 장군의 '관음포 대첩'이다. 고려의 해전 사상 최대의 전과를 올린 관음포 대첩 이후 왜구는 고려를 침공할 생각을 할 수 없었다.

현재 남해군 고현면 탑동마을에는 당시 관음포 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아 만들었다는 '정지석탑'이 경상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돼 전해지고 있다. 대한민국 해군에서도 정지 장군을 기리기 위해 최신예 잠수함으로 무장한 '정지함 부대'를 창설했다.

왜구들의 본거지, 대마도를 정벌하라

정지(鄭地 1347~1391) 장군은 전라도 나주에서 태어나 광주 평방현(지금의 동명동)에서 자랐다. 19살 때 사마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고려 말기 남해안 지역을 제 집 드나들 듯 침범하며 노략질을 일삼던 왜구들은 당시 고려 조정의 큰 화근이었다.
  
경열사 내삼문, 경앙문
 경열사 내삼문, 경앙문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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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정지는 27살이 되던 1374년(공민왕 23년)에 왜구를 소탕하기 위한 계책을 만들어 공민왕에게 올린다. 이른바 '왜구 토벌책과 토적 책 10조'라 불리는 이 계획의 핵심은 "바다를 건너온 적들은 바다에서 막아야 한다. 섬에서 나고 자라 바다에 익숙한 사람들을 훈련시켜 왜구들을 소탕해야 한다."라는 일종의 '고려 수군 창설 계획서'였다.

이를 인정받은 장군은 그해 전라도 안무사(按撫使)로 발탁되어 고려 수군 창설에 전념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최초로 전함을 건조해 왜구를 토벌했으며 수군의 창설이 '정지'로부터 시작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377년(우왕 3) 예의판서 겸 순천도병마사가 되어 순천·낙안, 옥과, 담양, 영광, 등 전라도 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였다. 1382년 드디어 고려 수군 총사령관인 '해도원수(海都元帥)'로 승진한다. 그 이듬해 우리 해전사에 길이 남을 '관음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다,
  
사당에 봉안된 정지 장군 영정(1347~1391)
 사당에 봉안된 정지 장군 영정(1347~1391)
ⓒ 임영열 유물관에서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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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1387년 문화평리(門下評理)로 임명된 장군은 근본적인 대책으로 왜구들의 소굴인 대마도(쓰시마)와 일기도(이키시마) 두 섬을 정벌할 것을 건의한다. 2년 뒤 우왕의 뒤를 이은 창왕은 정지 장군의 건의를 받아들여 해도원수 박위(朴葳)를 대마도에 보내 왜선 3백여 척과 관사를 다 불태웠다. 역사상 최초의 대마도 정벌이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에 동참했지만

고려말, 격동의 시기였다. 중화 대륙에서는 원나라를 몰아낸 명나라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며 철령 이북의 땅을 내놓으라며 고려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에 고려 조정에서는 요동 정벌에 나서게 된다.

1388년 이성계 휘하에 예속되어 요동 정벌군 서열 제5위, 안주도 도원수 자격으로 출정했다가 이성계 장군의 회군에 합류했다. 하지만 장군은 고려를 멸하고 새로운 왕조를 세우는 역성혁명에는 반대했다.
  
경열사 유물관
 경열사 유물관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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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경열사가 있었던 광주 동명동에서 옮겨온 정지장군유허비
 최초의 경열사가 있었던 광주 동명동에서 옮겨온 정지장군유허비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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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군에서 돌아온 장군은 양광도·전라도·경상도 체찰사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다시 창궐한 왜구들을 격파하며 묵묵히 군인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던 중 무신 김저(金佇)가 이성계를 암살하고 폐위된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모의 사건에 연루되어 경주로 유배되었으나 위화도 회군에 동참한 공으로 곧 풀려났다.

하지만 정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또다시 옥에 갇히는 사건이 발생한다. '윤이·이초의 옥사 사건'이다. 무신 윤이(尹彛)와 이초(李初)가 이성계를 축출할 목적으로 명나라 황제 주원장에게 "이성계가 명나라를 침략하려 한다"라고 무고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장군은 청주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때마침 대홍수가 발생하여 청주의 감옥과 민가가 침수되었다. 이에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은 "정지장군과 이색 등은 죄가 없음을 하늘이 증명한 것이다"라며 석방했다. 최근 방영되고 있는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에서는 이 장면을 리얼하게 묘사했다.
 
남해군 고현면 탑동마을에 있는 ‘정지 석탑’ 당시 관음포 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아 만들었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됐다.
 남해군 고현면 탑동마을에 있는 ‘정지 석탑’ 당시 관음포 대첩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아 만들었다.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로 지정됐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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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신 제거를 위한 희생양이 되었던 정지 장군은 광주로 낙향하여 무등산 장원봉 아래에 은거한다. 1391년 9월, 정지 장군은 다시 판개성부사에 임명되어 조정의 부름을 받았지만 병이 깊어 부임하지 못하고 10월 15일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9개월 후 장군과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이성계는 새로운 나라 '조선(朝鮮)'을 건국했다. 그 뒤 이성계의 아들 태종은 장군의 공적을 협찬하여 '경열(景烈)'이라는 시호를 내리고 땅과 제전(祭典)을 하사했다. 인조 22년에 장군이 살았던 지금의 광주광역시 동명동에 경열사(景烈祠)를 짓고 봄과 가을에 제향 하도록 했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이 터에 경열사 유허비를 세워 장군의 뜻을 기렸다. 1978년 '정지장군유적보존회'의 노력으로 장군의 '예장석묘'가 있는 북구 망월동 현재의 위치에 복원을 시작하여 1981년 완공했다.
  
경열사 사당 뒤쪽에 조성된 정지장군 예장석묘. 고려 후기의 묘제 양식으로 봉분이 없고 직 사각형 형태의 가장자리를 석축으로 쌓았다.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경열사 사당 뒤쪽에 조성된 정지장군 예장석묘. 고려 후기의 묘제 양식으로 봉분이 없고 직 사각형 형태의 가장자리를 석축으로 쌓았다.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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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에는 사당과 내·외삼문, 유물관이 있다. 유물관 앞에는 동명동에서 옮겨온 '경열사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사당 뒤쪽에는 장군의 '예장석묘'가 있다. 장군의 묘는 둥그렇지도 않고 봉분도 없다. 네모 반듯한 직사각형 모양을 하고 있으며 앞면과 양옆 가장자리를 돌로 쌓았다. 고려 후기의 장묘 형태로 우리 고장에서 좀처럼 보기 드문 사례다. 광주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됐다.

광주 북구 매곡동에 있는 역사민속박물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장군의 갑옷이 전시되고 있다. 광주광역시 농성동에서 광주역 교차로까지의 도로를 '경열로'라 명명하며 참군인의 길을 걸은 장군의 충의를 기리고 있다.
  
광주광역시 역사민속박물관에 전시 중인 정지 장군 갑옷. 몸통 부분은 철판을 사용했고 어깨 부분은 철 고리만을 연결하여 보호성과 활동성을 동시에 갖췄다. 보물로 지정됐다
 광주광역시 역사민속박물관에 전시 중인 정지 장군 갑옷. 몸통 부분은 철판을 사용했고 어깨 부분은 철 고리만을 연결하여 보호성과 활동성을 동시에 갖췄다. 보물로 지정됐다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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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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