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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강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추운 것인지 그동안 강추위가 없었던 터라 더 춥게 느껴지는 것인지 몹시도 추웠다. 부여 규암면 신리 백마강 근처 마을에서 '마을이 박물관'이라는 행사가 있어서 주민들이 만들어 놓은 설치 조형물들을 관람하는 중이었다.

목도리를 차에 놓고 온 것이 내내 아쉬운 참이었다. 마을에서 내놓은 어묵 국물 한 사발을 들이키자 강바람에 얼었던 몸이 풀어지는 것 같았다. 이런 추위 속에 '겨울에 먹으면 더 시원한 음식'을 써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그 말조차 얼어붙을 것 같았다. 찬 음식에 대한 고찰은 사양하고 싶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울에 먹는 별미인 메밀국수를 먹기 위해 전문점을 찾았다.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둬야 쓸 말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소문과는 달리, 여름에만 하는 계절 메뉴라고 해서 메밀전에 돌솥밭만 먹고 왔다. 사실 찬 메밀 국수가 있었다고 해도 먹을 자신이 없었다.

겨울철 음식에 팥이 많은 이유
 
팥죽을 쑤려고 팥을 삶다가 팥시루떡까지 쪄버렸다.
▲ 팥시루떡 팥죽을 쑤려고 팥을 삶다가 팥시루떡까지 쪄버렸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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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속이 냉한 체질인가 보았다. 차가운 음식을 좋아하지 않는다. 한겨울에도 얼음 가득한 아메리카노만 마신다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지만 나는 한여름에도 얼.죽.아.는 사양인 사람이다. 겨울에는 냉면 같은 찬 음식을 아예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찾아보니 겨울에 찬 음식을 찾게 되는 까닭은, 외부의 온도가 낮을수록 신진대사가 활발하게 일어나고 체내에서 열이 발생해서 답답함을 느끼기 때문이라고 했다. 일시적으로 찬 음식을 먹어서 시원한 느낌을 주려는 의미라는 것이다. 동치미, 메밀묵, 팥죽 등을 겨울에 주로 먹는 이유가 그런 것이었다.

팥은 체내의 열을 식히는 찬 성분을 가진 대표적인 식재료이다. 그래서 겨울에 먹는 음식에 팥이 들어간 것이 많다. 겨울의 한복판인 요즘 팥죽, 붕어빵 등이 입맛에 당긴다면 몸이 때가 왔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고보니 얼마 전 팥죽을 맛있게 먹었던 일이 떠올랐다. 이상하게도 팥죽이 먹고 싶었다. 동지 무렵이면 팥죽 전문점과 팥 음식에 대한 방송을 내보낸다. 어느 방송인지 모르겠지만 먹음직스러운 팥죽을 촬영한 것을 보았고 순간적으로 각인이 된 것 같기도 했다.

마침 동짓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절에 다녀와야 할 것 같았다. 마을에 있는 절에 신도 명단을 올려놓고 초파일에만 절에 가는 나는 심정적인 불교 신자이다. 절에서는 신도 관리를 너무 느슨하게 하기도 하고 스님은 일체유심라며 모든 것은 마음에 있다고 설법을 하니 공식적으로 절에 가는 날도 잊어먹는 것은 예사이다.

초파일 이후 처음으로 절에 간 것 같았다. 이번에는 정말 염불보다 잿밥에 마음이 있어서 절에 갔다. 법당에 올라가면서 힐끗 요사채 앞 가마솥에 팥죽이 흘러넘친 자국을 보니 더 군침이 돌았다. 살다보니 그런 날도 있으니 '염불보다 잿밥'이라는 말이 생겼으리라 웃음을 삼키며 예불을 드렸다.

동치미와 차갑게 식은 팥죽
 
염불보다 팥죽 한 그릇과 구수한 정담이 그리워 절에 다녀왔다.
▲ 팥죽 한 그릇 염불보다 팥죽 한 그릇과 구수한 정담이 그리워 절에 다녀왔다.
ⓒ 오창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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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부터 노보살들이 미리 끓여 놓은 팥죽은 예불이 끝날 무렵에는 미지근하게 식어 있었다. 팥죽에 동치미와 나물 반찬으로 차려진 소박한 절밥 한 상이 놓여졌다.

"팥죽은 차게 혀서 먹어야 참맛이 나는 거유. 그려서 뎁히지 않았슈. 그런 중 알고 자셔유덜.(그런 줄 알고 드세요)"

가을에 수확한 햇팥을 가져와서 전날부터 팥죽을 준비한 노보살이었다. 노보살은 함축된 충청도식 언어로 끊어서 말했다. 팥죽은 한겨울에도 몸의 저항력을 잃지 않게 한 생활의 지혜가 발휘된 음식이니 차가워도 잘 먹어달란 속뜻을 다 생략해서 말한 것이었다.

"옛날에는 동짓날이 돌아오면 가마솥에 팥죽을 한 솥단지를 쑨단 말여. 식으라고 장독대에 퍼다 놓고 한 사발씩 퍼다 먹으면 참 맛났었지."

팥죽 한 그릇에 추억 한 다발이 오갔다.

"밤중에 굴품할 때(야식이 먹고 싶을 때) 동치미 한 사발 퍼오고 팥죽은 솥단지째 가져다가 숟가락으로 바닥까지 닥닥 긁어 먹을 때가 좋았지."

"아버지가 동지섣달에는 아궁이에 나무를 많이 며줘서(넣어줘서) 방구들이 뜨끈뜨끈하게 해주거든. 옛날 추위는 지금하고는 댈 게 아녔잖유. 장꽝(장독대) 놔둔 팥죽은 살얼음이 얼어 있단 말여유. 그것을 갖다가(가져다가) 아랫목에 앉아서 숟가락으로 깨가면서 누나하고 형들하고 서로 먹겠다고 싸워가면서 먹었쥬."

어릴 적에 팥죽을 제대로 먹어본 기억도 없고 팥에 대한 기호도 별로였는데 절에서 여러 사람들(그래봤자 20여 명. 방역 수칙 지켰음) 속에서 추억담을 나누며 먹다 보니 어딘지 모르게 푸근해졌다.

방바닥은 따뜻했고 방문을 다 열어 놓았어도 정남향의 햇볕이 요사채 깊숙이 들어와서 등허리를 간질간질하게 했다. 먹고 싶었던 음식까지 먹으니 영혼의 허기까지 가시는 것 같았다. 팥죽이 먹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리웠고 정담을 나누고 싶었던 것 같다.

때로 사람의 몸은 섭취하는 음식뿐만 아니라 함께 딸려오는 이야기와 정까지 영양소로 필요로 하는 게 아닐까. 생애 유래가 없던 전염병의 시기가 닥쳐와 바깥 활동을 자제하며 살다 보니 몸도 영혼도 허기와 갈증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지난 동짓날에 먹었던 찬 팥죽은 내 영혼의 보양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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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의 시골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조근조근하게 낮은 목소리로 재미있는 시골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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