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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봄, 지인의 공간에 방문했다가 창가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흰 튤립 화분을 보았다. 대화를 나누는 사이, 나도 모르게 눈길이 자꾸 갔다. 내 시선이 머문 곳을 흘끗 본 지인이 웃으며 겨우내 튤립 알뿌리를 직접 심어 핀 꽃이라고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튤립이 어른거려 검색해 보았지만 시기상 구근 판매는 끝난 것 같았다. 아쉽지만 내년을 기약하기로 했다.

드디어 해가 바뀌고 튤립 구근 몇 뿌리를 주문해 아이와 함께 심었다. 아이는 매일 아침 베란다로 나가 꽃이 피기를 기다렸다. 마침내 흙을 뚫고 싹이 쏙 올라왔다. 기뻤던 건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잎은 점점 노랗게 시들어 가더니 비실거리며 옆으로 누워버렸다. 1년을 기디려 튤립을 심었던 나도 꽃을 기대했던 아이도 크게 실망했다.

부랴부랴 이유를 찾아보니 알뿌리에 곰팡이가 생기면 제대로 클 수 없단다. 껍질을 까야 했는데 그대로 심은 것도 문제였다. 흙을 파보니 구근 주위에 파란 곰팡이들이 생겨나 있었고 작은 벌레들도 달라붙어 있었다. 심고 햇빛을 쐬어주고 물만 주면 되는 줄 알았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내년에는 꼭 꽃을 피워보자고 다짐하며 아이와 아쉬움을 달랬다.
 
알뿌리 식물인 튤립.
 알뿌리 식물인 튤립.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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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만에 꽃을 본 튤립

작년 봄, 다시 튤립 구근을 주문했다. 업체의 배송 착오로 몇 십 개의 알뿌리가 도착해서 어쩌다보니 구근 부자가 되었다. 이번에는 꼭 꽃을 보겠다는 마음으로 튤립 심는 법을 공부해 두었다. 알뿌리의 껍질을 제거하고 서늘한 곳에서 잘 말렸다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심었다. 물 빠짐이 좋도록 흙도 두 가지 종류를 섞어서 2층으로 나눠 덮어주었다.

비어 있는 화분을 총동원해 보았지만 베란다에 심기에는 뿌리가 많아서 아파트 화단에도 나눠 심었다. 매일 아침 아이는 베란다에, 나는 출근길 화단에 눈도장을 찍으며 첫 싹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이번에는 부디 꽃을 볼 수 있기를...' 우리의 바람이 통했던 걸까? 드디어 기다리던 싹이 하나 둘 얼굴을 내밀었다. 물도 햇빛도 신경 쓰며 하루하루 싹을 살폈다.

마침 육아휴직을 앞두고 있는 시점이었다. 업무를 정리하느라 연일 야근으로 바빴지만 앞으로 직접 꾸려갈 새로운 생활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했다. 초록의 싹이 싱그럽게 커가는 모습을 보며 아이의 첫 학교생활과 나의 휴직 기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고대했다. 

다행히 심은 알뿌리는 모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웠다. 업체의 배송 착오로 원했던 하얀색 튤립은 아니었지만 다홍과 노랑, 색색의 튤립이 초봄의 베란다와 화단을 화사하게 바꿔놓았다. 아이와 나는 아침마다 베란다로 나가 꽃에게 인사를 건네고 하루를 시작했다. 하지만 튤립이 피어있는 시간은 짧았다. 꽃잎들은 어느새 하나씩 떨어지고 시들어갔다.

튤립 꽃을 피우려고 구근 심는 법을 검색할 때, 꽃이 진 후의 구근 보관법도 함께 보았다. 튤립은 여러 해 살이 식물이기 때문에 알뿌리만 잘 보관하면 이듬해에도 얼마든지 꽃을 볼 수 있다고 했다. 꽃대를 정리한 후 구근을 버리지 말고 파내어 잘 말린 후 냉장고와 같이 서늘한 곳에 보관해 두었다가 가을에 다시 심으면 다음 해에 꽃이 핀다고 한다.

분명 튤립을 심을 때는 꽃이 지더라도 구근을 잘 챙겨놓고 내년에도 꽃을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든 꽃잎과 줄기가 노랗게 변한 후에도 나는 화분을 오래도록 방치해 두었다. 알뿌리를 잘 챙기려던 처음 마음과 다르게 이런저런 바쁜 일들이 계속 생겼다. 결국 정리를 차일피일 미루다 구근을 화분에 심어둔 채로 여름을 보내고 말았다.

베란다에 갈 때마다 죄책감이 들었지만 '이것만 끝내면 꼭 정리해야지' 미루다가 두 계절이 훌쩍 지나버린 뒤에야 화분을 정리했다. 지난겨울, 매일 아침을 행복하게 해 주었던 기다림을 떠올리며 식물 키울 자격이 없는 것 같아 더 이상 구근은 다시 사지 않기로 했다.

내버려진 화분이 보여준 기적 

얼마 전 베란다에서 빨래를 널다가 화분 하나에서 조그맣게 싹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믿기지 않았지만 튤립이었다. 깜빡하고 미처 정리하지 못한 화분에서 싹이 올라오는 중이었다. 무려 여름과 가을, 겨울을 거치며 살아남은 튤립 알뿌리가 피워 올린 싹, 주변에는 몇 개의 싹이 이어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빨래를 널다말고 한참 동안 그 싹을 들여다보았다.

처음 찾아온 감정은 놀라움이었다. 그토록 무더웠던 여름과 오래 더위가 이어졌던 가을, 한파가 닥친 겨울을 모두 견딘 구근이 다시 싹을 피워 올리는 모습에 감탄했다. 동시에 부끄러웠다. 꽃이라는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때만 튤립에 관심을 기울이며 열광하던 내 모습 때문이었다. 나의 관심이란 늘 그런 식으로 작동해 오지 않았을까? 문득 든 반성이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싹의 출현에 다시 검색창을 열고 튤립에 대해 찾아보았다. 고향은 어디인지, 어떤 점을 주의해서 키워야 하는지, 천천히 보았다. 오랜 역사를 가진 튤립의 원산지는 터키로 건조할수록 더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라난다고 한다. 한때 소 천 마리가 튤립 40송이와 맞먹을 정도로 귀해서 투기 심리까지 일으킨 욕망의 상징이었던 건 유명한 이야기다.

또 튤립은 가을에 심어 겨울을 지나고 피는 꽃이다. 날씨가 추울수록 더 강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운다고 한다. 바깥에서 크는 알뿌리들은 냉해 방지용 흙을 충분히 덮어주어야 하지만, 실내에서는 너무 온도가 올라가지 않도록 세심한 신경을 써 주어야 한다. 덜컥 꽃을 보겠다고 구근만 심고 관리에 소홀했던 나같은 무관심한 가드너가 다루기는 쉽지 않은 꽃이다.
 
세 계절을 견디고 다시 싹을 틔운 튤립구근
▲ 다시 싹을 틔운 튤립 세 계절을 견디고 다시 싹을 틔운 튤립구근
ⓒ 박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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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튤립과 함께 하는 두 번째 봄을 기대하는 지금에서야 튤립을 키우는 일을 진지하게 생각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튤립을 볼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열흘 남짓이다. 한 해의 대부분을 튤립은 알뿌리 상태로 보낸다. 빛과 습기, 사람의 관심과 멀어진 조용하고 어두운 곳에서 튤립의 알뿌리는 묵묵히 다음 싹을 밀어 올릴 때를 기다리며 준비하는 것이다.

내 삶에도 반짝 관심과 열정을 기울였다가 예상과 달랐던 결과에 시들해 잊어버린 화분들이 있다. 한때는 기다림과 설렘의 행복감을 가득 주었지만 재빨리 결과를 욕망하고 쉽게 포기하는데 더 익숙했다. 나는 쉽게 꽃을 보여주지 않는 그 화분들을 두고 '역시 식물 키우는 일은 적성에 안 맞아' 섣불리 판단하며 더 이상의 노력도 관심도 기울이지 않고 쉽게 내 관심사 바깥으로 밀어냈다.

새롭게 돋아난 싹이 꽃을 피울지 아직은 모른다. 도중에 시들어 버릴 수도 있다. 분명한 건 두 번째 튤립을 돌보며 싹을 맞이하고 꽃을 기다리는 기쁨을 다시 누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번에는 꽃에 일희일비하지 않을 것이다. 제 소임을 다한 알뿌리를 잘 보관했다가 돌아오는 가을에 다시 심을 것이다. 기다리는 마음을 가득 담아.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저의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게재될 예정입니다.
https://m.blog.naver.com/uj0102
https://brunch.co.kr/@mynameisr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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