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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북구 무돌길 시작지점에서 본 무등산의 아침 풍경
 광주 북구 무돌길 시작지점에서 본 무등산의 아침 풍경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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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에서 나고 자란 사람 중에 무등산에 올라보지 않은 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또, 서너 다리 건너면 모두 5.18 민주화운동과 관련되어 있다는 광주시민 중에 국립 5.18 민주 묘지를 가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무등산과 5.18은 명실공히 광주의 상징 아닌가. 

그러나 요즘 광주의 아이들에겐 '당연한' 일은 아닌 듯하다. 가본 사람 손들어보라고 하면 주위를 둘러보며 거짓말로라도 손들 법도 하건만, 놀랍게도 가봤다고 답한 아이가 한 반에 몇 안 된다. 그나마 5.18 묘역은 나은 편, 무등산에 올라봤다는 아이가 고작 열에 두셋 뿐이다. 

더 놀라운 건, 코앞인 무등산은 안 가봤어도 바다 넘어 제주도는 여러 번 다녀왔다는 아이들이 태반이라는 점이다. 해외여행 경험도 얼추 절반이다. 심지어 가족과 함께 설악산의 공룡능선을 두 번이나 종주했다는 아이조차 무등산엔 올라본 적이 없다며 겸연쩍게 대답했다. 

남의 떡이 더 커 보여서일까. 아니면 가까이 있는 것의 소중함을 잊어버린 탓일까. 광주를 비롯한 인근 지역 초중고 대부분의 학교 교가에는 무등산이 공식처럼 포함돼있다. 교가 속 무등산은 학교마다 높은 기상과 정기를 내려받아야 할 성스러운 대상으로 묘사되어 있다. 

광주의 동서남북 어디서나 보이는 무등산을 학창 시절 내내 노래하지만, 정작 찾아가지는 않는 '가깝고도 먼 곳'이 돼버렸다. 한 아이는 무등산을 두고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이라며 눙치듯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산은 요즘 아이들이 가장 싫어하는 소풍 장소다. 

교장 선생님의 제안, 솔직히 뜨끔했다

그러던 차에 학교장이 형해화한 교가의 노랫말에 담긴 의미를 되살리자는 제안을 했다. 아이들에게 무등산의 높은 기상과 정기를 입이 아닌 머리와 가슴으로 느낄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참고로, 우리 학교의 교가는 '아늑한 보금자리 무등산을 등지고'로 시작된다. 

"광주의 아이들이 무등산에 한 번 들지 못한 채 학창 시절을 마친다는 게 안타깝습니다. 1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무등산의 기운을 느낄 수 있도록 걷는 기회가 마련된다면 좋겠습니다. 세계지질공원이자 국립공원이라는 사실조차 모르는 아이들이 많다는 건 우리의 책임입니다."

학교장의 제안에 솔직히 뜨끔했다. 고백하건대, 지난 23년 동안 교가의 내용에 아무런 관심이 없었을뿐더러, 하다못해 소풍 장소를 정할 때조차 아이들의 요구를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 민주적이며 교육적이라고 여겨왔다. '광주의 어머니'라는 무등산은 그렇게 교육에서 멀어졌다. 

그는 고1, 고2 때 무등산의 둘레길을 걷고, 고3 때 무등산을 종주하는 코스를 추천했다. 직접 걸으면서 무등산의 넓이와 높이를 체감하게 하자는 것이다. 대학 입시를 앞둔 고3 수험생 때 산 정상에 오르는 건 각자에게 남다른 의미가 있을 거라 말했다. '화룡점정'이라는 의미다. 

그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다. 동료 교사들과 아이들의 공감을 끌어내는 일이 남았다. 그러자면 의미를 염두에 두고 두 발로 직접 걸으며 코스와 소요 시간부터 확인해야만 했다. 과연 200여 명이 동시에 걸을 수 있는지, 도중에 위험 요소는 없는지 등을 점검하려는 것이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지난 주말(8일) 학교장과 함께 둘레길을 걸어봤다. 둘 다 무등산 정상은 숱하게 올랐지만, 둘레길은 조성돼있다는 것만 들었을 뿐 걸어본 적은 없었다. 하여 무등산을 마치 손금 보듯 하는 전문가 한 분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은퇴한 선배 교사이자, 히말라야까지 섭렵한 자타공인 전문 산악인이다. 
 
무돌길 초입의 약수터. 유일하다시피 한 '자연 휴게시설'로, 도중 카페나 간이매점은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다.
 무돌길 초입의 약수터. 유일하다시피 한 "자연 휴게시설"로, 도중 카페나 간이매점은 단 한 곳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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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둘레길은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과 제주 올레길이 인기를 끌며 걷기 열풍이 불던 즈음인 2010년에 만들어졌다. 이후 2012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이야기가 있는 문화생태탐방로'로 지정되었다. 무등산 산허리를 감아 도는 코스로 '무돌길'로 공식 명명돼있다. 

'무돌'은 무등산의 순수한 우리말로, 그 유래에 대해선 견해가 분분하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크고 우람한 돌산이라는 뜻으로, 정상에 우뚝 솟은 서석대와 입석대를 일컫는 표현이다. 상서로움이 느껴지는 깎아지른 듯한 주상절리로 상징되는데,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된 이유다. 

공교로운 건 둘레길의 전체 길이가 51.8km라는 점이다. 무등산을 에워싼 옛길들을 연결하고 보니, 5.18을 떠올리게 하는 거리가 된 셈이다. 사실 무등산은 5.18 당시의 참혹한 현장을 내려다본 역사의 산증인으로, 5.18을 소재로 한 문학작품마다 어김없이 호명된다.

둘레길은 광주 동구와 북구, 전남 담양군과 화순군 등 네 지역에 걸친 총 15개 길로 나뉘어 있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를 관통하거나 노변을 따라 걷는 곳이 일부 있긴 하지만 그다지 위험하진 않다. 경사가 급한 곳도 거의 없어 해찰하며 걸어도 2~3일이면 완주할 수 있다. 

광주의 도심 구간인 10km 정도를 제외하면, 걷는 데 익숙지 않은 아이들이라고 해도 이틀이면 충분하다. 전체 구간을 둘로 나눠, 고1 때 20km 남짓 걷고 나머지는 고2 때 이어서 걷도록 계획을 세웠다. 마침 그 중간에 초등학교가 있어 출발과 도착 지점으로 삼기 제격이었다. 

'역사 탐방'에 손색 없는 길이지만 

오전 8시 20분, 산에 들었다. 산책로 같은 등산로가 내내 이어졌다. 땀이 날 정도는 아니고, 그저 영하의 추운 날씨를 잊게 할 만큼만 몸을 덥히는 경사였다. 바스락거리는 겨울 낙엽이 을씨년스러웠지만, 아이들과 함께할 봄철엔 울긋불긋한 꽃들에 시선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올라가면 무등산의 주 능선을 만나고, 그 길로 내려가면 정겨운 마을들이 어김없이 나왔다. 언뜻 부러 조성한 것처럼 오해하기 쉽지만, 둘레길은 애초 산속 마을 사람들끼리 소식을 주고받던 길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지나가는 마을마다 강아지들이 꼬리를 치며 우리를 반겼다. 

차가 없으면 갈 수 없을 거라 여겼던 충장공 김덕령의 묘소와 분청사기 가마터, 가사 문학을 꽃피운 담양의 정자들까지도 걸어서 만날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이 길을 오가며 풍류를 읊었을 옛 선현들을 떠올리니 기분이 참 묘했다. 둘레길은 역사와 문학의 길로 손색이 없었다.

곳곳을 지나며, 이곳에선 아이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들려줄까 미리 떠올려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역사 교사로서, 교실 밖에서 지역의 역사를 함께 공부할 수 있는 이 만한 기회는 따로 없을 성싶었다. 어떻게 나누느냐의 문제일 뿐, 무등산이 품은 이야기는 차고도 넘쳤다. 

네 시간쯤 걸었을까. 점심을 해결할 장소를 찾아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 올 것을 고려해 너른 터가 있는지 걷는 내내 눈여겨봤다. 안타깝게도 마땅한 자리는 찾을 수 없었다. 정자나 벤치가 놓인 쉼터 등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잠시 기대어 앉을 수 있는 곳조차 드물었다. 

안내판마다 '힐링을 위한 길'이라고 홍보하고 있지만, 정작 걷는 이들을 위한 편의 시설은 아예 없었다. 찾는 이가 적어서일까, 20km 남짓을 종일 걷는 동안 그 흔한 카페는커녕 간이매점 하나 만날 수 없었다. 곧, 도시락과 물, 간식을 챙겨오지 않으면 걷기 힘든 곳이다.

길이 지나는 마을 어귀마다 물이나 주전부리를 파는 무인 판매대라도 설치되어 있다면 좋겠다 싶다. 도난과 파손이 걱정이라면, CCTV를 설치하면 된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개인이 운영하긴 힘들 테지만, 지방정부가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그리 어려운 일 같진 않다. 
 
안내 팻말은 곳곳에 세워져 있으나 곳곳이 갈래 길이라 길을 잃을 우려가 크다.
 안내 팻말은 곳곳에 세워져 있으나 곳곳이 갈래 길이라 길을 잃을 우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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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쉬운 점은 또 있다. 안내 팻말은 곳곳에 세워져 있지만, 마을을 관통하는 갈래 길과 농로처럼 비좁은 샛길이 많아 동행자와 대화하며 걷다 보면 자칫 길을 잃고 헤맬 위험이 있다. 길잡이가 돼준 선배 교사는 만약 초행길이라면 십중팔구 낭패를 보게 될 거라고 귀띔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이나 제주 올레길처럼 길바닥에 눈에 띄도록 표식을 해둔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러나 지방정부끼리 협의가 안 된 탓인지 아직 미비한 상태다. 일부 구간에 몇몇 노란색 화살표가 보이지만, 언뜻 어느 개인 여행자가 답답한 마음에 그려놓은 성싶다. 

목적지인 이서초등학교 분교장에 닿으니 오후 3시 반이 갓 넘은 시간이었다. 대충 어림해보니 간단하게 점심을 해결한 시간까지 포함해 1시간에 3km 남짓 속도로 걸은 셈이다. 만약 이 길을 아이들 200여 명과 줄지어 걷는다면 족히 한 시간은 더 소요될 것이다. 
 
하루 걷기의 종점으로 삼은 이서초등학교 분교장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코스 정비가 필요하다는 걸, 아래 이름을 새긴 지방정부는 과연 알고 있을까.
 하루 걷기의 종점으로 삼은 이서초등학교 분교장 입구에 세워진 안내판. 코스 정비가 필요하다는 걸, 아래 이름을 새긴 지방정부는 과연 알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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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차 안에서 스마트폰 속 사진을 통해 걸었던 코스를 되짚어봤다. 방금 지나온 길인데도 가물가물하다. 석 달쯤 뒤 아이들을 인솔해서 다시 올 것을 생각하니 덜컥 겁부터 났다. 고2 때 걷게 될 나머지 절반은 고사하고, 오늘 코스를 조만간 한 번 더 걸어봐야 할 것 같다.

그때는 아이들은 물론 다른 여행자들이 길을 헤매지 않도록 갈림길마다 헤지지 않는 리본을 만들어 매달아 놓을 작정이다. 리본에 새길 글귀는 걸으면서 생각해뒀다. '무돌길' 완주가 졸업 자격이 되는 셈이니, 우선 학교 이름을 쓰고 그 옆에 이렇게 적어놓을 것이다. 

'두 발로 무등산을 품고, 가슴에 광주의 혼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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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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