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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박동완
 민족대표 박동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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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완은 2년형을 선고받고 서울 마포구 공덕동 경성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독방에 갇혀 시멘트 바닥에서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고 만해 한용운이 제시한 대로 사식(私食)을 먹지 않는다는 원칙을 받아 감옥에서 주는 콩과 보리로 뭉친 오등식(五等式) 한 덩어리로 허기를 매꾸었다.

가족이 사식을 들일 여력도 없었다. 그의 부인 현미리암은 남편이 구속될 당시 심히 병약한 상태여서 큰 딸 박한엽이 어머니 병수발과 아버지 수발을 직접하게 되었다. 딸은 1919년 3월 1일 당일 아버지가 집을 나설 때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아버지는 성격이 워낙 깔끔한 분이라 외출할 때면 항상 손수건을 지니고 다니셨지. 그날 아침에도 여느 날과 다름없이 손수건을 챙겨드렸어. 그런데 밖으로 나가셨던 아버지가 잠시 후 다시 들어오셔서 손수건을 달라고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그랬지. "아버지, 방금 나가실 때 드렸는데요. 안주머니 한 번 살펴보세요"하고… 그랬는데 안주머니는 살펴보지도 않고 한 장 더 달라고 그러시는 거야.

그래 무심히 오늘은 손수건이 한 장 더 필요하신가 보다 생각하고 마침 세탁해 놓은 게 있어서 한 장 더 드렸거든. 그랬더니만 내 얼굴과 누워계신 어머니 얼굴을 한동안 묵묵히 바라보시다가 아무런 말씀도 없이 그냥 나가버리시는 거야.

2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집에 돌아오신 아버지께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후에 내가 "그때, 왜 나가셨다가 다시 집에 들어오셨나요?"하고 물어봤지. 그랬더니 그제서야 말씀하시는 거야. "네 얼굴 보는 게 마지막이 될지도 몰라 한 번 더 보고 싶어서 그랬다"하고… 아버지가 워낙 말씀이 없으신 줄은 알았지만 그때 더 절실히 깨달았지. (주석 1)
3.1혁명 당시 시위대들이 덕수궁 근처 미대사관 담벼락을 지나고 있다.
▲ 적십자사 소책자에 실린 3.1혁명 당시 시위 사진 3.1혁명 당시 시위대들이 덕수궁 근처 미대사관 담벼락을 지나고 있다.
ⓒ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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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이 독립운동에 나서면 그 가정은 파산지경이 되었다. 경찰의 감시가 따르고 곳곳에 박아둔 밀정이 가족의 수상쩍은 거동을 낱낱이 보고했다. 야박한 것이 세상의 인심이라 이웃들도 후환이 두려워서 자연히 거리를 두게된다. 박동완의 가정도 별로 다르지 않았다.

박동완은 거사를 앞두고 집을 나섰다가 손수건을 핑계로 다시 돌아와 딸과 아내의 얼굴을 한번 더 바라보았다. 자신과 가족의 불행을 예감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평정심을 잃지 않고 태연하게 행동했던 그의 모습 속에서 과묵한 그의 성격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3ㆍ1운동 거사 후 죽음을 각오한 그의 비장한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주석 2)

민족대표들이 재판을 받고 감옥에서 혹독한 시련을 겪고 있을 때 상하이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출범하고(1919년 4월), 같은 해 11월에는 만주 길림성에서 조선의열단과 서로군정서가 각각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1920년 6월 봉오동전투와 10월 청산리전투 등 한민족의 대일항쟁이 전개되었다. 

3ㆍ1혁명에 불을 지핀 민족지사들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계승하고자 하는 투쟁은 1921년 1월 서울청년회조직, 양근환 의사가 도쿄에서 친일파 민원식 사살, 신채호 등이 베이징에서 군사통일주비회조직 등으로 꾸준히 이어졌다. 
 
북로군정서의 청산리전투 소식을 전하면서 3.1절(3.1혁명)의 산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 독립신문 1921년 3월 1일 기사 북로군정서의 청산리전투 소식을 전하면서 3.1절(3.1혁명)의 산물이라고 밝히고 있다.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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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투옥 중일 때 어느날 <기독신보> 기자가 박동완의 집을 찾았다. 방문기의 일부다. 

기자는 어느 친구의 인도를 의뢰하야 체부동 121번지를 찾아가서 여섯 간 초가 움막살이 북향 대문 앞에 다다르니 박동완(朴東完)이라 2호 글자로 넓이는 한치 남짓, 길이는 세치 남짓한 얇은 송판쪽에 다가 섰거랐다. 

동행한 친구는 문간에 썩 들어서며 "이리 오너라" 한마디 불렀다. 안에서 힘없는 가는 목소리로 누구 오셨나 보다 나가 보아라 하더니 일곱 살쯤 되는 남자 아이가 나오는데 그 아이는 박동완의 2남이다.

그 아이는 나와서 우리를 보더니 반기는 얼굴로 빙그레 웃었다. 기자는 그 아이를 대하여 너의 어머님께 기독신보사에서 누가 오셨다고 여쭈어라 하니, 그 말이 그치자마자 한숨섞인 목소리로 들어오십소서 여쭈어라 하였다. 들어서서 안마당 끝 건너방 뜰아래에 들어서니 안마루 끝에 근심섞인 파리한 얼굴로 젖먹이 자는 어린 아기를 가로안고서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하는 목소리로 이렇게 오셨으니 고맙습니다, 하면서 우리를 영접하시는 여자는 박동완의 부인이다. 기자는 모자를 벗어 들면서 이사하시기에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아이들은 다 충실하오이까, 부인 "우리야 무슨 괴로움이 있으리까 여러분의 근념으로" 하면서 한숨이 묻어 나오더라. 

집안을 둘러보니 요사이에 집에 쫓기어서 엉터리없는 것을 천신만고하여 그 집을 주선하야 이사한 지가 몇 날이 되지 못한지라, 많지 아니한 세간 부평등속일 망정 아직 제자리에 놓지 못한 터이라, 여기저기 어수선한 것은 둘째이고 부엌을 들여다보니 나무 한 줄가리 없는 것을 본즉 솥에 들어갈 것도 없을 것이다… (주석 3)

박동완 가족의 궁핍상이 그대로 드러나 보인다.

가장이 투옥되고 얼마 후 부인은 이제껏 살았던 경성부 누하동 214번지에서 종로구 체부동 121번지로 이사를 하였다. 생활비를 줄이고자 더 작은 집으로 옮긴 것이다. 기사에 나오는 7살 쯤 되는 남자 아이는 박동완의 차남 박창희였다. 실제 나이는 10살이었는데 영양실조로 왜소하게 보였던 것이다.

박창희의 증언이다.

아버지가 감옥에 계시는 동안 우리 식구는 밥 굶기를 밥먹듯이 하였지. 며칠을 굶었는지 몰라. 막내가 영 기력이 없는거야. 그걸 보던 어머니가 끼니를 구하러 나가셨어. 그래 온 가족이 대문 밖에서 어머니가 돌아오시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지. 해가 뉘엿뉘엿 질 때쯤 외출했다 돌아온 어머니 손에는 어디선가 구해 오신 좁살 한 되가 들려있었어. 

어머니께서는 그걸로 우리에게 좁쌀죽을 끓여주셨지. 덕분에 그 날 저녁은 온 가족이 모처럼 끼니를 거르지 않았어. 그때 먹었던 좁쌀죽이 정말 맛있었지… 그러니까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만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된다. (주석 4) 


주석
1> <동아일보>, 1920년 9월 24일.
2> 박재상ㆍ임미선, 앞의 책, 55~56쪽.
3> <기독신보>, 1920년 9월 25일.
4> 국사편찬위원회 편, 앞의 책, 186~18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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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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