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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학기째 한국어 수업을 쭉 이어서 하다 보니 학생들의 수준도 점차 향상되어 초급한국어(Coréen debutant)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수업이 이제 중급한국어(Coréen moyen)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사실 이름만 중급일 뿐 여전히 초급이지만, 그럭저럭 학생들과 조선시대 소설을 읽고 토론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여성영웅소설인 박씨전, 홍계월전, 방한림전을 내가 쉽게 고쳐쓴 축약본을 읽고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여 말해보게 하였다. 학생들은 스위스, 프랑스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읽는 조선시대 소설은 문화 간의 만남이라는 점에서 흥미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랬다!)

외모지상주의와 능력주의의 충돌 <박씨전>
 
박씨전-1
....박씨 부인이 못생기고 나쁜 냄새가 나서 시백은 부인을 싫어했어요. 하지만 박씨 부인은 아주 똑똑했고 초능력이 있었어요. 초능력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간 시백을 1등으로 만들었어요.....박씨 부인의 저주가 풀려서 껍데기가 벗겨지자 원래의 아름다운 모습이 나왔어요. 시백은 박씨 부인에게 그동안 무시한 것에 대해 사과했어요.
 
학생들은 <박씨전>의 다음 이야기를 '박씨 부인은 조금 슬퍼요. 왜냐하면 박씨 부인은 똑똑하고 남편을 도와줬는데, 예쁘지 않아서 이시백이 사랑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용서하기에는 너무 늦었을지도 몰라요', '박씨 부인은 남편을 버리고 떠나요. 초능력으로 사람들을 구하고 세상에 좋은 일을 해요' 등 다양하게 상상했다.
 
박씨전-2
청나라가 조선을 쳐들어왔어요. 시백은 전쟁에 나갔어요. 청나라 왕이 시백을 죽이려고 했지만 박씨 부인은 초능력으로 미리 알고 막았어요. 그리고 청나라의 군대를 초능력으로 물리쳤어요....
 
'이시백의 사과를 박씨부인이 받아줄 것인가?'로 학생들의 의견이 나뉘었다. <박씨전>의 결말까지 읽은 학생들의 의견은 '여자들은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박씨 부인은 이름이 없어요', '하지만 세상을 구해요' 등이었다. 이제 <박씨전>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홍계월전>으로 넘어가보자.

뮬란과 비슷한 구조의 <홍계월전>
 
홍계월전-1
홍계월은 .... 다섯 살 때 부모님과 헤어졌어요. 그리고 해적들이 계월을 물에 던졌어요. 다행히 여씨 집안에서 아기 계월을 구조했어요. 계월은 여씨 집의 아들 보국과 함께 자라면서 공부했어요. 계월은 보국을 형이라고 불렀어요.....계월은 과거 시험에서 1등, 보국은 2등을 했어요.
 
학생들이 상상한 다음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계월과 보국 사이가 좋은 친구였어요. 여씨 집은 계월을 너무 좋아했어요. 계월이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보국의 부모님이 그 둘을 결혼시키고 싶었어요. 그런데 계월과 보국 둘 다 결혼 싫었어요. 형이라고 계속 불렀어요. 대신에 같이 일했어요."

"계월은 큰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보국은 소박한 삶을 살기를 원했어요. 그들은 친구로 지냈어요. 그들은 집에서 같이 살지만 친구로 지냈어요."

"계월은 아주 자랑스러웠어요. 그리고 슬펐어요. 여자는 높은 공무원이 될 수 없어요. 계월은 보국을 사랑했어요. 결혼했어요."

학생들마다 계월과 보국과의 관계성을 다르게 상상한 점이 흥미로웠다.
 
홍계월전-2
외국의 적들이 나라에 쳐들어왔어요. 계월은 사령관이 되고 보국은 부사령관이 되어서 전쟁에 나갔어요. 보국은 계월의 명령을 듣지 않고 싸우다가 적에게 속아서 위험에 빠졌어요. 계월은 보국을 구한 뒤, 보국을 크게 혼냈어요. 그리고 계월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어요.....

왕은 계월과 보국의 사이를 이어주어 결혼을 하게 했어요. 계월은 결혼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갑옷을 입고 보국에게 호령했어요. 보국은 약이 올랐어요. 결혼 후에 쿠데타가 일어나서 왕이 계월을 다시 사령관에 임명했어요. 계월은 전쟁 중에 왕과 보국을 구했어요. 보국은 계월이 자신보다 더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을 인정하고 둘은 사이좋게 지냈어요.

<홍계월전>을 결말까지 읽은 학생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박씨전과 홍계월전 둘 다 남편이 부인이 능력 있어서 싫어해요. 그런데 부인이 예뻐서 좋아해요."

"그들은 다른 방식으로 싸웠습니다. 박씨부인은 과거시험을 안 봐요. 남편을 도와주었어요. 그런데 계월은 과거시험을 봐요. 그리고 남편보다 잘 했어요. 다른 능력이 있지만 나라를 구하고 강한 여자들이고 남자보다 강하다는 점이 중요해요."

복잡한 한국어 문장을 구사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쓴 문장은 오히려 간결하게 핵심을 찌르고 있었다. '남편이 부인이 능력 있어서 싫어해요. 그런데 예뻐서 좋아해요' 같은 내용은 현재의 한국사회에서도 자주 관찰되는 인지부조화를 정확하게 묘사한다. 이제 혁신적인 다음 소설, <방한림전>으로 넘어가 보자.

상상력의 힘으로 만들어낸 여자들의 사회 <방한림전>
 
방한림전-1
.....관주는 똑똑하여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고, 열 가지를 들으면 천 가지를 알았어요. 방씨 부부가 여자아이 옷을 입히려 하니까 관주는 싫어했어요. 그래서 방씨 부부는 관주에게 남자아이 옷을 입혔어요. 그리고 수 놓기, 옷 만들기 같은 여자의 일을 가르치려 하니까, 관주가 싫어했어요. 그래서 방씨 부부는 책 읽기와 글 쓰기를 가르쳤어요.

......관주는 여자라는 것을 숨기고 과거 시험을 보았어요. 관주가 가장 훌륭한 답을 써서 1등으로 뽑혀 '한림'이라는 높은 공무원이 되었어요.
 
학생들이 상상한 다음 이야기는 아래와 같다.

"관주는 다년간 '한림'으로 일했어요. 관주는 매우 중요한 사람이 되었어요. 어느날 다른 공무원들이 관주가 여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그들이 관주를 너무 좋아해서 모든 여자에게 과거 시험을 인가했어요."

"관주는 똑똑하고 예쁘고 강한 여자입니다. 관주는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관주는 여행을 원하고 자신의 모험을 쓰고 싶어요. 높은 공무원으로 한림은 아무데나 여행을 계획했어요. 그래서 한림이 여행을 가요."

"관주가 한림이라는 이름으로 불렸어요. 그런데 방씨 부모의 친구가 관주를 알아보았어요. 왕은 관주를 용서하지 않았어요. 왕이 관주를 감옥에 가두었어요."

학생들의 이야기를 듣다가 동료와 상사에게 성별재지정 수술과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지지받은 고 변희수 하사가 떠올라 문득 울컥했다. 과연 조선시대의 관주는 어떻게 '정상인' '정상가족'이란 사회적 압박을 피해갈 수 있을까?
 
방한림전-2
국방부 장관 영씨에게는 '혜빙'이라는 똑똑하고 아름다운 딸이 있었어요. 혜빙은 열세 살이었어요. 혜빙은 결혼을 싫어했어요. 결혼하면 자유로울 수 없고 남편에게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에요.

관주는 높은 공무원이고 멋지고 똑똑해서 인기가 많았어요. 여자와 결혼하라는 청혼을 많이 받았어요. 하지만 관주는 여자와 결혼할 수 없었어요. 영 장관은 관주가 여자인 것을 모르고 혜빙과 만나보라고 했어요.

관주는 혜빙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어요. 하지만 혜빙과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혜빙은 관주가 자신처럼 남자와 결혼하기 싫어하는 여자라는 것을 느꼈어요. 그래서 관주와 결혼하고 싶었어요. 혜빙은 아버지에게 관주와 결혼하겠다고 말했어요.

관주와 혜빙이 결혼한 날, 관주는 자신이 여자라는 것을 혜빙에게 말했어요. 혜빙은 이미 알고 있다고 말했어요..... 
 
<방한림전>의 중간 이야기를 읽은 학생들은 '이 이야기에 너무 놀랐어요. OOO 하고 남자친구에게 이야기했어요. 그런데 너무 좋았어요. 페미니스트 이야기예요', '관주가 혜빙과 함께 살아요. 그런데 아기가 없어요. 사람들은 그것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관주하고 혜빙은 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해요' 등의 반응을 보였다.

한 학생이 아기 문제가 등장할 것을 간파하고 이에 대한 해결책도 제시했다. 이 학생은 소설 작법에 아주 익숙한 듯하다. 또다른 학생은 13세에 결혼했다는 설정에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모든 학생이 여성끼리의 결혼을 예상치 못해서 파격적이라고 느꼈다.
 
방한림전-3
.....어느 날 집 앞에 버려진 아기를 발견했어요. 혜빙과 관주는 그 아기를 아들로 입양하였어요. 외국의 적들이 쳐들어와서 관주는 장군이 되어 전쟁에 나갔어요. 적들을 무찌르고 전쟁에서 이겼어요.....관주는 죽기 전에 왕에게 자신이 여자라고 말했어요. 왕은 사실을 숨긴 것을 용서했어요. 관주와 혜빙의 아들은 훌륭하게 자라서 국방부 장관이 되었어요.....
 
박씨전, 홍계월전, 방한림전을 비교 평가한 학생들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그 셋은 여자에 관한 이야기예요. 셋 다 너무 똑똑해요. 그리고 셋 다 결혼하기, 과거 시험보기가 있어요."

"여자들이 자유로울 수 없어요. 그 여자 초능력으로 여자라는 것을 숨기고 살아요."

"남자와 여자는 사회에서 다른 공간에서 다른 일을 하도록 정해져 있었어요. 이 이야기에서는 여자가 자신이 주부와 다른 일을 할 수 있음을 보여 줘요."

"박씨부인과 계월과 관주는 뛰어난 능력이 있어요. 똑똑해요. 나라를 구했어요."

"계월과 관주는 여자라는 것을 숨겨요. 그리고 전쟁에 나갔어요. 왕에게 여자라고 말했어요. 왕이 용서해요."

"다른 점은 시백은 박씨 사랑하지 않아요. 계월은 보국 좋아해요. 그런데 갈등이 있어요."

"세 이야기 달라요. 왜냐하면 박씨전 부인 이름 없어요. 그 여자 남편 도와줘요. 그런데 그 여자는 자기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요. 홍계월은 박씨부인보다 좋아요. 왜냐하면 홍계월은 시험을 보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방한림전에요. 왜냐하면 가장 행복한 결말이기 때문이에요."

"이 세 개의 이야기는 비슷해요. 여자가 가장 중요해요. 박씨부인하고 계월하고 관주가 똑똑하고 유능하고 그들의 사람들을 지켰어요. 왕은 그들의 능력을 좋아해요. 그리고 여자의 도움을 요청해요."

"저는 관주를 제일 좋아했어요. 그것은 현대적이고 동시대적이에요."

조선 여성영웅담의 동시대성, 시대와 장소를 뛰어넘는 상상력의 힘

한국어 교재의 따분한 문장들만 보다가, 드디어 한국어 실력이 향상된 학생들과 조선시대의 여성영웅소설을 같이 읽는 작업이 즐거웠다. <박씨전>은 17세기, <홍계월전>은 19세기, <방한림전>은 19세기 후기의 작자 미상 소설이다.

박씨부인은 이름도 없고 초능력이 있어도 남편을 돕는 데 그치지만, 홍계월은 자기 이름을 갖고 있고 보국보다 능력이 출중하며, 방관주는 아예 남성이 서사에 필요없도록 여성과 혼인한다. 학생들은 이런 차이를 정확하게 짚어냈다.

4세기~2세기 전의 조선의 여성영웅소설이 지금 불어권의 사람들에게도 '동시대적, 현대적'으로 다가온다는 점이 인상 깊었다. 이렇게나 공감할 수 있는 점이 많을 줄 몰랐다. 학생들은 시스젠더 이성애자 여성들이었지만 다들 방한림전을 가장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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