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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팔년도'. 누군가에겐 옛날 방식이고 그래도 내가 경험했던 시대의 일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의 일이다. 90년대생들에게 쌍팔년도가 그러하다. 쌍팔년도는 영화에서만 보던 세상이다. 90년대생 여성 노동자들에게 나의 노동 현실은 쌍팔년도다. "상사는 점심을 먹고 회사 앞 스타벅스를 지나쳐 사무실로 와서 90년대생 여성 노동자에게 커피 한 잔 먹자고 전화를 한다. 그러면 스타벅스에서 픽업을 해서 갖다 드려야 했다." "원장의 백화점 쇼핑과 이사에 동원"되어야만 했다. "주말에는 된장하고 고추장 담그는 것을 도우라는 지시를 받은 적도 있다."

이 구시대적 노동 환경에는 우선 기본적인 노동권이 보장되지 않는 근로조건이 있다. 무급 야근을 당연하게 여기고, 연차나 주말 휴일이 보장되지 않는다. 구성원의 자유와 사생활은 묵살되고 구태의연한 조직 관행이 강요된다. 성차별적인 직장 관행이 유지 계승되어 청년 여성 노동자들의 취업을 제한하고 장기적 직업 전망과 노동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다. '구르라면 굴러야 하는' 군대식의 복종을 요구하는 직장 상사의 태도와 이를 두고 보는 직장이 있다. 업무가 아닌 일, 잔심부름, 개인적인 일을 시키는, '아무렇게나 부릴 수 있는 사람' 취급하는 경우도 여전하다.

한국여성노동자회가 전국의 지역지부들과 함께 90년대생 여성 노동자 실태조사를 진행 발표한 보고서의 일부분이다. 우리가 90년대생에 주목한 이유는 치솟는 20대 여성의 자살률 때문이었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0년 사망 원인 통계'의 시계열을 보면 2015년 이후로 20대 여성 자살자는 378명에서 622명으로 64.5%나 급증했다. 모든 연령대의 남녀를 통틀어 20대 여성의 자살 증가율이 가장 높다. 통계청의 2020년 사회통계에 따르면 청년기 여성의 자살 충동 이유는 경제적 어려움(21.5%)이 가장 많았고, 실업·미취업 등 직장문제(18.5%), 가정불화(15.6%), 외로움·고독(14.1%), 신체적·정신적 질환·장애(12.1%) 등의 순이었다. 이 통계대로라면 40.5%가 제대로 취업을 하지 못하고 결국 경제적 자립을 이루기 어려워 자살을 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코로나 이후 특히 90년대생 여성들은 주로 취업해 있던 대면접촉 서비스업에서 해고되었고, 준비했던 취업 자리조차 막혀 버렸다.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단절된 나락이다. 우리는 이 이야기가 너무도 아팠고, 90년대생 여성 노동자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무엇이 필요한지 살펴보고자 했다.

심리상담사를 대동하고 인터뷰 조사를 진행했다. 인터뷰이들은 부모님한테도, 친구한테도 '아무한테도 한 적 없는' 이야기들을 털어놓았다. 주휴수당 지급을 회피하기 위해 주당 근무시간이 15시간 이하인 모집공고 속에서 L은 평일에는 닭꼬치 가게 아르바이트, 주말에는 파리바게트 아르바이트로 주7일 일할 수밖에 없었다. 27세가 되기 전에 취업하지 않으면 영원히 취업할 수 없을 것 같은 압박감. 조금이라도 나은 직장을 갖기 위해 이직을 감행할 수 있는 마지노선은 서른 이전이다. 서른이 되어 면접장에 가면 면접관들은 이들에게 당장 '나이가 많다'라며 서류를 덮었다. 심리적 초조함과 압박감은 삶을 압도하고 경제적 어려움은 생활을 덮치고 있었다. 그런 속에서도 일은 단순한 생계수단으로만 존재하지 않았다. 90년대생 여성 노동자들은 일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수단의 하나로 생각한다. 나아가 자신이 존재함, 살아있음을 입증하는 근거라고 보고 있다. 일을 존재론적 증명의 수단이자 가치로 보는 태도는 반대의 경우 일이 없는 상태가 심리적 위기, 존재적 위험을 초래할 수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4774명이 응답한 설문조사는 고단한 현실을 드러냈다. 10.8%가 두 개 이상의 일을 하고 있었고, 43.9%가 하향 취업을 고려하였고, 실제 하향 취업을 하였다. 67.8%가 한 번 이상의 이직을 경험하였고, 다섯 번의 이직을 거치면 고용형태가 고정되었다. 25.7%는 비정규직으로 진입한 이후 계속 비정규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이직한 적이 있는 응답자 두 명 중 한 명 꼴(45%)로 계약 기간 만료·해고·수습 및 인턴 기간 만료 후 채용되지 않는 경험을 했고, 권고사직은 다섯 명 중 한 명이 경험했다. 청년 여성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옮겨가며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노동 환경은 이들을 소진시키는 방식으로 구조화되어 있었다. 이런 환경은 정신적 신체적 번아웃 상태로 이들을 몰아넣는다. 취업 상태에서의 가혹한 노동과 버티기로 인해 일정 기간 노동을 하고 나면 번아웃이 되어 퇴사 혹은 계약 만료와 함께 어쩔 수 없는 실업 상태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90년대생들은 노동을 하고 있어도 구직 활동을 중단할 수 없다고 응답했다.

향후 5~10년 사이 누구와 함께 살기를 희망하는가에 대한 응답은 반려동물과 나 혼자라는 응답이 51.9%, 법적 배우자와 자녀라는 응답은 30.1%에 불과했다. 반려동물과 나 혼자라는 응답은 수입이 낮을수록 높아졌고, 법적 배우자와 자녀라는 응답은 수입이 높을수록 높아졌다. 이런 상황에서 대선 후보들이 너도나도 내미는 육아 휴직 기간 확대는 안드로메다 이야기다. 삶의 기본적 조건을 갖출 수 있는 성 평등하고 안전한 노동 현장과 사회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이대남으로 호명되는 이들, 남초 커뮤니티에 대한 구애로 정신이 팔려 있는 대선 후보들의 행보는 90년대생 여성 노동자들 입장에서는 절망을 추가하는 요소일 뿐이다. 언제까지 쌍팔년도와의 동행을 강요할 것인가. 지금은 쌍팔년도가 아니라 2022년이다. 성 평등 노동 실현은 청년 여성 노동자에게 삶을 유지할 수 있는 기본적 조건이자 희망이다. 90년대생 여성 노동자들의 절박한 목소리를 들어라. 그것이 정의이고, 공정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배진경 한국여성노동자회 대표가 쓴 글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에서 발행하는 격월간 <비정규노동> 1,2월호 '女性여성女聲' 꼭지에도 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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