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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6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을 마치며 박수를 치고 있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6일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발언을 마치며 박수를 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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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힘이 6일 저녁 전격적으로 내분을 봉합했다. 윤석열 대선후보가 당무 우선권을 무기로 사무총장 및 전략기획부총장 임명을 강행하고 의원총회에서 이준석 사퇴 촉구까지 언급됐었다. 그랬던 국민의힘에서 봉합 장면이 연출된 것.

코너에 몰린 이준석 대표는 6일 저녁 의총에서 "우리 후보가 유일한 야권 후보"라며 "대선 승리를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고, 의총 막바지에 입장한 윤석열 후보는 "함께 힘을 합치자"고 외쳤다. 둘은 포옹했다(관련 기사: 윤석열 "다 잊어버리자"... 갈등 급봉합, 대표 사퇴 결의안 유야무야 http://omn.kr/1wrcw ).

외형상으로는 대표와 후보의 화해다. 하지만, 내용상으로는 윤석열의 승리에 가깝다고 평가된다. 6일 저녁 이준석이 받아낸 것은 '사퇴촉구 결의 철회'인 반면, 윤석열이 받아낸 것은 '당대표의 협력'이었다. 이준석은 자리를 지키는 데 그쳤지만, 윤석열은 협조 약속을 받아낸 모양새다. 윤석열이 당무 우선권까지 행사하며 대표를 압박하는 상황이 대표에 의해 수용된 셈이다.

윤석열 후보 자신도 당원 투표로 선출됐지만, 이준석 대표 역시 당원 투표로 선출됐다. 윤석열이 당원들로부터 부여받은 것은 당권이 아닌 대권 하나다. 그래서 당권을 가진 이준석과의 관계가 파탄 나면 국민의힘뿐 아니라 윤석열 자신도 지키기 힘들게 될 수 있다. 안 그래도 지지율이 크게 떨어지는 상황이라 이준석과의 화합은 불가피했다고 볼 수도 있다.

2021년 4월 19일자 TV조선 인터뷰 및 4월 20일자 <경향신문> '박주연의 색다른 인터뷰' 등을 통해 '윤석열이 한국의 마크롱이 됐으면 좋겠다'고 했던 김종인에 대해서는, 윤석열은 끝내 손을 내밀지 않았다. 이준석은 선출직 지도자이고 김종인은 임명직 지도자였다. 이준석의 권한은 당원들로부터 나왔지만, 김종인의 권한은 윤석열에게서 나왔다. 이 점도 두 사람을 대하는 윤석열의 태도에 영향을 줬다고 볼 수 있다.

사태 봉합 뒤 윤석열에 남은 것 
 
극한 대치 끝에 전격 화해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와 이준석 대표가 6일 저녁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포옹하고 있다.
 극한 대치 끝에 전격 화해한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와 이준석 대표가 6일 저녁 국회에서 열린 의원총회에서 포옹하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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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열의 당내 영향력이 보다 더 제고되는 방향으로 사태가 봉합된 것은 윤석열이 이준석보다 훨씬 많은 세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무 우선권이라는 당헌상의 제도적 장치 역시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윤석열이 대표의 의사를 무시하고 권영세 사무총장 및 이철규 전략기획부총장 임명 건을 자기 의견대로 통과시킨 데서도 알 수 있듯이, 후보의 당무 우선권은 윤석열이 기세뿐 아니라 제도적 장치로써도 당 대표에게 맞설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국민의힘 당헌 제74조는 "대통령후보자는 선출된 날로부터 대통령선거일까지 선거 업무의 효율적 추진을 위하여 필요한 범위 내에서 당무 전반에 관한 모든 권한을 우선하여 가진다"고 규정해놨다.

당대표가 엄연히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후보가 '선거 업무에 필요한 범위'에서 우선권을 가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선거 업무에 필요한 범위'로 한정됐지만, 바로 다음 구절에서 '당무 전반에 관한 모든 권한'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당헌 해석권을 누가 쥐느냐에 따라, 대표와 후보의 역학관계가 어떻게 형성되느냐에 따라 당무 우선권이 고무줄처럼 늘었다가 줄었다가 할 수 있는 여지가 존재하는 셈이다.

당무 우선권의 기원

한국 보수정당에 당무 우선권이라는 제도가 공식 논의되는 초기 상황을 다룬 보도가 있다. 2002년 4월 1일자 <한국경제>의 '대선후보 대표위원 겸직 금지... 한나라당'이라는 제목의 기사다. 한 사람이 대표와 후보를 겸하지 못하게 하는 권력분립 조치가 당무 우선권을 파생시킨 정황이 담겼다.

이 기사는 "한나라당은 지난달 30일 당무회의를 열고 대선 후보의 대표최고위원 겸직을 금지하고 최고위원 정수를 9명으로 하는 것을 골자로 한 집단지도체제 당헌·당규 개정안을 처리했다"고 한 뒤 "새 당헌은 다만 대선 후보에게 후보 확정 후 대선일까지 당무 전반에 관한 우선권을 부여하고, 후보 확정 후 60일 이내에 구성할 선거대책 기구의 구성과 운영, 재정에 관한 권한도 갖도록 했다"고 보도했다.

후보가 대표직을 겸직하지 못하게 하는 대신, 선거에 필요한 범위에서만 당권을 갖도록 하고자 당무 우선권을 신설했다. 당권-대권 분리로 인한 대선 후보의 약화 가능성을 보완하고자 당무 우선권이 생겼던 것이다.

제13대 대선을 앞둔 노태우 후보는 1987년 6월 10일 민주정의당(민정당) 후보가 되고 8월 5일 총재가 됐다. 14대를 앞둔 김영삼은 1992년 5월 19일 민주자유당(민자당) 후보가 되고 8월 28일 총재가 됐다. 15대를 목전에 둔 이회창은 1997년 7월 21일 신한국당 후보가 되고 9월 30일 총재가 됐다. 1987년 헌법 체제 하에서 보수정당 후보들은 2~3개월 내에 당권을 추가로 확보한 상태에서 대선을 치렀다.

87년 체제 이전의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대권에 이어 당권을 획득하는 이런 도식을 따를 필요가 없었다. 이들의 시대에는 보수정당 후보가 이미 상당한 권력을 확보한 상태에서 대선에 임했다.
 
1987년 6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는 모습.
 1987년 6월 전두환 당시 대통령이 힐튼호텔에서 열린 축하연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노태우 후보를 축하해 주는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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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체제 이전과 이후에 양상이 달라지기는 했지만, 보수정당 후보들은 당권과 대권을 다 가진 상태에서 대선을 치렀다. 그런 익숙함이 2002년 제16대 대선을 앞두고 당권-대권 분리에 의해 깨지게 됐던 것이다. 오랜 익숙함이 사라짐으로 인한 불안감을 감소시키려는 대책이 바로 당무 우선권 신설이었다.

하필이면 2002년에 당권·대권 분권과 당무 우선권 신설이 이뤄진 것은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기인한다. 이 시기에는 국민의힘의 전신인 한나라당뿐 아니라 더불어민주당의 전신인 새천년민주당에서도 비슷한 움직임이 일고 있었다.

집권당인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대통령과 총리의 권한을 조정하는 분권형 대통령제가 추진됐다. 결국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이는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자민련)의 호응을 받았다. 자민련에서는 내각제 개헌을 꿈꾸는 김종필 전 총리가 동상이몽 식으로 호응했다. 월드컵 4강 신화를 계기로 유력 후보로 떠오른 정몽준이 분권형 대통령제를 공약하고 그와의 단일화를 추진했던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이에 호응한 것도 당시 분위기의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

이 시기에 '분권'이 화두가 된 데는 여러 요인이 작용했다. 6.15 남북공동선언, 북·일 수교교섭, 중국·타이완 교류·협력 확대 같은 동북아 해빙 분위기가 강력한 한국 정치 권력의 등장을 견제하는 측면이 있었다. 대외적 위협 요인이 감소함에 따라, 내부적으로 강력한 권력 출현의 필요성이 그만큼 줄어들었던 것이다.
 
2006년 6월 14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전남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6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에서 어린이환영단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하고 있다.
 2006년 6월 14일 장대비가 쏟아지는 가운데 전남 광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6·15 남북공동선언 6돌 기념 민족통일대축전 개막식에서 어린이환영단이 한반도기를 흔들며 입장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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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김영삼 대통령 퇴임에 이어 2003년 김대중 대통령 퇴임이 임박한 시점이었기 때문에, 이 시기는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 시대의 종결이라고 볼 수 있다. 강력한 카리스마로 당원들을 이끌었던 3김들의 시대가 막을 내려감에 따라, 정치 세력들은 새로운 상황을 적극 모색했다. 이런 분위기가 정당 지도자의 권한을 축소시키려는 움직임으로 연결된 측면도 컸다.

나아가 인터넷 언론의 등장으로 한국 민주주의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든 점, 1997년 IMF 위기로 국가권력 내지 정치권력에 대한 대중의 신뢰가 한층 떨어진 점, 전두환·노태우·김영삼에 이어 김대중 대통령의 집권 말기에도 권력형 비리가 터져 '강력한 권력'에 대한 대중적 환멸이 조성된 점 등도 여기에 영향을 줬다. 권력 분산과 정당 분권을 촉진하는 이런 상황들이 당무 우선권이라는 보완적 조치의 파생으로 연결됐다.

2000년 전후의 정치 상황을 배경으로 2002년에 생겨난 보수정당의 당무 우선권이, 20년 뒤 윤석열 후보가 이준석 대표를 압박해 '화해 조치'를 이끌어내는 수단 중 하나로 작용했다. 윤석열은 한나라당을 계승하는 역대 대선 후보들 중에서 상당히 인상적인 방법으로 이 권한을 활용한 후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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