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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소매 붉은 끝동>에는 꽃의 대화가 자주 나온다. 처음으로 꽃의 은유를 눈치챈 건 덕임이 이산의 지밀나인(조선시대 왕의 침실에서 임금을 모시던 궁녀)으로 곁에 있을 때다. 이산은 주구장창 책을 읽어대고 마침 비가 내리자 덕임은 살포시 창을 열어 비 구경을 한다.

이산은 고개를 들어 그녀의 모습을 애틋하게 바라보는데 그때 매화가지에 꽃이 피었다. 시선을 느낀 덕임이 고개를 돌리자 이산은 열심히 책 보는 척 연기 돌입. 두 사람 사이에 묘한 기류가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으로 꽃이 핀' 배롱나무
 
산이 덕임이에게 별당의 배롱나무 꽃을 보여준다.
 산이 덕임이에게 별당의 배롱나무 꽃을 보여준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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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궁의 별당은 꽃의 대화가 무르익는 공간이다. 찬란한 햇살이 드리운 채 나무와 꽃이 살아 숨쉬는 곳. 이산이 가장 좋아하는 공간이자, 내밀한 속내를 비치는 곳이다. 별당 바깥은 왕의 무거운 책무와 자신을 노리는 자들이 늘어서 있지만 별당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딴세상인 양 모든 것이 평화롭고 따스하다.

누구도 함부로 부르지 못하는 그 이름, 한때는 다정했던 아비인 사도세자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꺼내며 개 집 앞에 쪼그리고 앉은 이산과 덕임은 친구 같고, 연인 같고, 가족 같다. 왕과 궁녀의 위치는 조금씩 허물어진다. 이산은 덕임의 손을 이끌어 꽃나무를 보여준다.

"얼마 전에 처음으로 꽃이 피었다. 아바마마께서 돌아가신 이후 처음이야. 뭔가 의미가 있는 걸까?"

의미가 있지.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순간, 그 어떤 것으로든 스며든다. 꽃나무는 이산과 덕임의 이야기를 대신 전해준다. 너희들 마음이 나를 피워냈다고. 이때만 해도 이산은 몰랐겠지. 그저 설레는 마음으로 바라보던 그 꽃이 평생에 걸쳐 가슴에 박히는 사랑으로 피고질 것을.  

이산이 보여준 꽃나무는 배롱나무다. 백일 동안 꽃이 피어 있다고 해서 목백일홍라고도 부르는데 사실 백일을 훌쩍 넘겨 일 년의 반쯤은 몽글몽글한 꽃망치를 매달고 있다. 어떻게 백일 동안이나 꽃이 피어 있는 걸까. 배롱나무는 가지 끝에 작은 꽃들이 모여 원뿌리 꼴의 한 송이 꽃을 피운다. 우리가 바라볼 때는 늘 꽃이 피어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이 작은 꽃이 피고지기를 반복하며 아름다움을 채워나간다.

나는 배롱나무를 보면 서운한 마음이 든다. 벚꽃은 짧은 찰나의 절정을 보여주면서 봄날의 시선을 다 가져가는데 이토록 아름다운 배롱나무는 개화를 시작하는 여름철이 지나면 조금씩 잊는다. 오랫동안 꽃을 피우는 나무의 비애랄까. 벚꽃이 빨리 지는 것은 모두 아쉬워하지만 배롱나무 꽃이 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이는 많지 않다.

배롱나무는 여름이 되면 나무껍질이 벗겨지며 반투명하고 매끈한 결을 드러낸다. 수피가 겉과 속이 같은 표리일치를 보여준다고 해 '절개'를 상징하고, '충'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꽃말은 '부귀'인데 붉은 꽃을 피운다고 해서 '일편단심'의 의미도 지닌다.

임금이든, 조상이든, 님이든 소중한 사람에게 마음을 다하고 싶을 때 배롱나무를 심었다. 그래서 궁궐이나 서원, 사찰, 제를 지내는 곳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사찰에 심은 것은 수행자들이 배롱나무의 매끈한 수피처럼 세속의 욕망을 떨쳐버리라는 의미에서다. 배롱나무는 다양한 해석과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랑을 선택하고 잃어야 했던 것들
 
배롱나무의 꽃줄기는 왠지 하늘로 자꾸만 솟아오르듯 자란다. 작은 꽃이 피고지면서 한 송이 꽃을 이룬다.
 배롱나무의 꽃줄기는 왠지 하늘로 자꾸만 솟아오르듯 자란다. 작은 꽃이 피고지면서 한 송이 꽃을 이룬다.
ⓒ 김이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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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당이 별천지라면 서고(책을 보관하는 집이나 방)는 지극히 현실의 공간이다. 꽃이 피어날 자리는 없다. 이산 입장에서는 동궁의 서고이므로 당연히 자기가 주인이고 거기에 배속된 궁녀 역시 자신의 것이다. 반면 덕임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서고를 관리하는 실무자인 것이다. 일하는 일터이자, 내가 지켜야 할 내 영역이다. 그래서 이 둘은 소유권과 관할권을 가지고 '빡세게' 싸운다. 이산은 너의 것을 내려놓고, 나한테 오라고 애원하고 위협한다. 덕임은 내 삶을 흔들지 말고 물러가라고 밀어낸다. 

뼛속까지 왕인 이와 비록 궁녀이고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삶이라 하나 그것을 주체적으로 꾸려가는 것이 꿈인 이의 싸움. 문제는 두 사람 다 자기들의 자리에 지독하게 충실한 사람이라는 거다. 밀리면 그 사람의 세상으로 온전히 나를 맡겨야 한다.

그 힘의 원리를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쪽은 당연히 덕임이다. 궁이 무엇인가. 왕의 집이다. 집주인이 알겠는가, 그 집에서 일하는 자가 알지. 결국 덕임이는 알면서도 왕의 세상에 발을 디뎠다. 못내 그 사랑을 내치지 못하고 곤룡포 한 자락을 잡아버리고 말았다.
 
의빈의 방에 놓인 흰국화와 능소화.
 의빈의 방에 놓인 흰국화와 능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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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궁이 된 덕임이의 방에는 흰국화와 능소화가 꽂혀 있다. 꽃이 다시 말을 한다. 나는 아프다고, 죽어가고 있다고. 능소화는 조선시대에 양반 가문을 상징하는 꽃으로 평민이 능소화를 심으면 곤장을 맞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한편으로는 소화라는 궁녀에 얽힌 전설이 유명하다. 소화는 용모도 예쁘고 심성이 고와 임금의 눈에 띄어 빈이 되었다. 그러나 임금의 사랑이 식어 찾지 않게 되자 왕을 기다리다 죽고 말았다. 담벼락 아래 소화의 주검에서 피어난 꽃이 능소화라고 한다.
  
임금을 기다리는 꽃이라. 정조가 의빈의 무릎을 베고 농땡이를 치던 어느 날, 정조는 의빈에게 너는 무얼 하였느냐고 묻는다. 의빈은 하루 종일 전하를 기다렸다고 대답한다. 가장 행복한 순간의 대화지만 그것으로 이들의 관계가 어떻게 변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기 넘치던 덕임이가 후궁이 되고 나서 유일하게 빛을 발하는 순간이 기다렸던 전하를 만나는 지금뿐이라니. 사랑을 선택하고 잃어야 했던 것들.

덕임이 후궁을 끝까지 거절한다고 그녀가 말하는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었을까. 동무들 역시 각자 다른 선택과 길을 떠나면서 생각시 시절의 풋풋한 연대는 조금씩 결을 달리 한다. 왕의 사랑을 받든, 받지 않든 궁이라는 공간은 그들의 삶을 억누른다. 왕조차도 함박웃음을 터뜨리기 위해 아무도 없는 곳으로 혼자 달려가야 한다.

이준호와 이세영은 못 당하지

덕임이 죽은 뒤, 정조는 왕으로서만 살아간다. 정조의 곁에 있는 나무들은 죄 메말라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겠다. 정조의 눈빛도 마른 나무, 텅 빈 공허다. 그럼에도 임금인 그 자리가 지켜줄 거란 덕임이 말처럼 천명을 다하기 위해 스스로를 갈아 넣었다. 덕임을 잊겠다고 다짐한 언덕에 올랐다가 아흔의 노인을 만나 태평성대라는 말을 듣고, 자신의 정적이었던 신하에게 성군이라는 존경을 받는다.

정조는 생과 사의 경계를 헤매던 순간에 마음의 안식처였던 별당, 덕임의 무릎으로 회귀한다. 말라 있던 매화가지에서 꽃망울이 피어난다. 그리고 이제 다 알겠다. 덕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고, 배롱나무 꽃은 눈부시다.

"죽음이어도 상관없어. 오직 너와 함께 하는 이 순간을 택할 것이다. 이 순간이 변하지 않기를. 이 순간이 영원하기를." 참으로 오랜 세월 끈덕지게 고백하고 수없이 까인 정조다. 그래서 이번에는 덕임이를 채근한다. "나를 사랑해라, 제발."

나를 사랑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너의 것이 된 나를, 사랑하라는 간청으로 들렸다. 그렇게 해석하기로 정했다. 이제 나는 자유로우니 너도 마음껏 사랑해라. 고백도 하고. 그래도 괜찮다.
   
다시 또 별당의 배롱나무 아래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 준 그 순간.
 다시 또 별당의 배롱나무 아래다. 순간을 영원으로 만들어 준 그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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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훗날, 내가 할머니가 되었을 때 정조와 의빈의 이야기가 다시 새롭게 그려질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드라마틱한 이야기니까. 어여쁜 젊은 배우들이 나올 테지. 나는 그때 씨익 웃으며 얘기할 거다. 안 되지 안 돼. 이준호와 이세영은 못 당해. 굉장했다고. 이산과 덕임이는 배롱나무 아래에서 순간을 영원으로 만든 전설의 인물이라고. 정조와 의빈 자리는 누구에게도 내어줄 수 없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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