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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더블린 사람들>은 20세기 초 아일랜드의 수도 더블린을 배경으로 한다. 제임스 조이스는 그곳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 싶었다면서 창작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나의 의도는 우리나라 도덕사의 한 장(章)을 쓰는 것입니다. 나는 더블린이 마비의 중심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이 도시를 이야기의 장면으로 택했습니다. 나는 무관심한 대중에게 마비된 더블린을 제시하고 싶었습니다."
 
다시 말해 조이스는 당시 더블린을 영국의 오랜 식민지배의 그늘에 속박된 채 부패와 타락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회로 보고, 이러한 시대의 암울한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삶에 안주한 채 쾌락만을 좇는 "무관심한" 더블린 사람들에게 어떤 경종을 울리고 싶었던 것이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이러한 정신적 '마비' 상태가 조국의 발전을 가로막는다고 생각했다.
 
소설 <더블린 사람들>
 소설 <더블린 사람들>
ⓒ 문예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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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급했듯이, 15편의 단편으로 묶여 있는 <더블린 사람들>을 관통하는 하나의 일관된 키워드는 바로 '마비'(paralysis)라고 할 수 있다. 첫 작품 <자매>에서부터 마지막 작품 <죽은 이들>까지 모든 단편에는 무엇인가에 '마비'되고도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먼저 첫 작품 <자매>는 당시 더블린 사회의 종교적 '마비' 상황을 보여준다. 소설은 플린 신부가 성직을 팔아버리고 담배에 중독되어 정신 질환을 앓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소년의 순수한 시선으로 묘사한다. 플린 신부는 성직을 매매할 만큼 부패한 성직자였지만 소년에게는 라틴어를 가르쳐 주고, 종교적 감화를 안겨 등 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신부였다.

신부가 죽자 사람들은 그의 타락상을 감추기 위해 소년 앞에서는 극도로 말을 조심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저 "신부님에게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라는 정도의 대화만을 나눌 뿐이다. 소년은 끝내 신부의 타락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신부의 잘못을 숨기려는 사람들의 행동이 오히려 신부의 잘못을 드러내는 결과로 나타난다. 이렇게 조이스는 신부의 타락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드러내는 방법'으로 당시 종교 사회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보여준다.

종교적 '마비'는 사람들의 정신적 붕괴를 가져온다. <경기가 끝난 뒤>는 술과 도박이 주는 정신적 쾌락에 도취된 사람들이 등장한다. 벼락부자 출신인 지미라는 청년은 자동차 경주가 끝난 후 친구들과 어울려 술판을 벌이고 거나하게 취해서는 카드놀이를 시작한다. 그런데 재미로 시작한 카드놀이가 거액의 판돈이 오가는 도박판이 되어버리고 술에 취하고 기분에 취한 젊은이들은 환각의 분위기에 빠져든다. 지미는 생각한다.
 
"날이 밝으면 후회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휴식을 취하는 것이 기뻤고, 자신의 우매한 소행을 덮어주는 그 몽롱한 혼수상태가 기뻤다."
 
흥청망청하는 자신의 모습이 어리석고 부끄럽다고 생각했지만, 지미는 그것에서 빠져나오려고 하지 않는다. 단지 그런 "우매한 기쁨"에 젖어 있고 싶을 뿐이다. 지미의 이성은 순간의 쾌락을 제압하지 못한다. 이는 더블린 사람들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피폐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라 할 수 있다.

<작은 구름>은 욕망과 질투에 휩싸인 한 인간의 고뇌를 다룬다. 시인이 되고 싶었던 챈들러는 평소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친구가 어느 날 성공한 모습으로 나타나자 착잡한 마음을 감출 길이 없다. 초라하고 궁상스러운 모습으로만 알아 왔던 친구 갤러허가 런던 언론계의 총아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성공한 친구의 모습에 기가 죽은 챈들러는 볼품없는 자신의 모습이 한심하게 느껴진다.

결국 챈들러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기에 이르고 곧 미묘한 내적 변화를 경험하는데, 그것은 "성격의 균형"이 깨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친구를 만난 이후, 챈들러의 눈에는 지금까지 보아오던 예쁜 가구들이 갑자기 싸구려로 보이고, 사랑스럽던 아내의 모습도 역겹게 보인다. 성공한 친구에 대한 시기와 질투가 챈들러의 시선을 바꾸어버린 것이다.

챈들러는 바이런의 시를 읽으며 내부에서 꿈틀거리는 이런 "막연한 분노"를 달래보려 애쓴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챈들러는 분노 앞에서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이 "무기 징역수"와 같다고 느끼고,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 결코 성공할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체념한다.

이렇게 제임스 조이스가 보여주는 더블린의 사람들은 어리석고 나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들이다. 그들은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쾌락에 빠져들며, 타인을 욕망하고 질투하는 존재들이면서 동시에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정신적 '마비' 상태에 빠져 있다.

그러나 조이스의 의도가 더블린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데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조이스는 아일랜드 사람들이 반들반들한 거울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볼 기회를 주기 위해 이 소설을 썼노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조이스의 진짜 의도는 소설이 아니라, 소설을 읽는 사람들의 변화에 가닿는다. 조이스는 더블린 사람들의 욕망과 실패, 좌절을 보면서 사람들이 자신의 불안과 고통을 대면해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것은 문학이라는 거울을 통해 각자의 영혼을 비춰보는 힘을 갖는 일이다.

거울을 통해 내면을 비춰본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태도는 자기 발견의 자각과 깨달음일 테다. 내 안에 있으나 미처 알지 못했던 것에 대한 자각이요, 그것에서 벗어나 세상과 조화를 이루려는 깨달음이다. 이 모두는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는 자기 발견의 경험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마지막 작품 <죽은 이들>에서 보여주는 눈이 내리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눈은 아일랜드 전역에 내리고 있었다. 눈은 기우뚱한 십자가와 묘석 위에도, 작은 출입문 위의 뾰족한 쇠창(槍) 위에도, 그리고 앙상한 가시나무 위에도 눈은 바람에 나부끼며 수북이 쌓이고 있었다."
 
눈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과 죽은 사람들 위로 쌓여간다. 아일랜드 전역에 내리는 눈은 마치 세상의 온갖 허물을 덮어주고 새로 태어남을 축복하는 모습을 연출한다. 그 장면은 고요하고 적막하면서도 아름답다. 제임스 조이스는 인간들의 어리석음과 추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그것을 이불처럼 덮어주는 모습으로 문학적 아름다움을 표현한다.

조이스는 '마비' 상태에서 깨어나는 자기 발견의 순간을 '에피퍼니'라는 말로 설명했는데, 바로 이 눈이 내리는 장면이 '에피퍼니'가 실현되는 상징적 장면이라 할 수 있다. 이 소설이 독자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울림을 주는 부분이 있다면 바로 이 눈이 내리는 적요한 장면일 것이다. 소설의 마지막을 덮으면서 생각해본다. 그렇다면 우리의 '에피퍼니'는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작가의 브런치와 블로그에도 올라갑니다.


더블린 사람들

제임스 조이스 (지은이), 김병철 (옮긴이), 문예출판사(1999)


태그:#제임스 조이스, #더블린 사람들, #마비, #인간 군상, #에피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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