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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부사>(1935)에 실린 ‘군산부영시장’ 모습
 <군산부사>(1935)에 실린 ‘군산부영시장’ 모습
ⓒ 군산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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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군산부 신영정(신영동)에 자리한 공설시장(구시장) 모습이다. <군산부사>(1935)는 '군산부영시장(群山府營市場)'이라 설명하고 있는데, '군산부에서 관리·운영하는 시장'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군산시장, 공설시장, 부영시장 등으로 불렸으며 1936년 일제가 산상정(현 선양동)에 제2시장(신시장)을 개설한 후 '구시장'이란 호칭이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금강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으로 진즉 사라진 가등정미소와 빽빽하게 들어선 일본식 목조건물들이 시간여행을 떠나게 한다. 멀리 아슴푸레하게 보이는 산줄기는 금강 건너 충청도 서천 땅이고 우측의 굴뚝과 창고 건물들은 호남에서 가장 규모가 컸다는 가등정미소이다. 검은 연기를 내품는 연통도 보인다. 그 주변이 소설 <탁류>에 등장하는 째보선창이다.

왼편 골목 뒤쪽엔 째보선창으로 유입되는 샛강(복개된 새느강)이 흘렀다. 그 물줄기 주변에 옹기전이 조성되어 있는데 확인할 수 없어 아쉽다. 옛 노인들 전언에 따르면 장작이나 옹기그릇을 가득 실은 돛단배들이 공설시장(돼지국밥집 골목) 코앞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광복 후에도 봄이면 뱅어 떼가 시장 근처까지 올라왔고, 버려진 돛단배가 발견됐다.

공설시장과 가등정미소 사이에는 승용차 두 대가 비켜갈 정도의 간선도로가 지나갔다. 일제가 '장래 군산 발전'이란 명분을 내세워 샛강에 교량을 가설했던 것. 당시 신문들은 3만 부민의 빈약한 주머니를 털어 공사에 착수했다고 전한다. 간선도로는 시장 정문-공설운동장-서래장터-구암동-성산-임피-강경-논산을 거쳐 서울로 이어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내항선(군산역~내항) 철도와 1932년에 조성된 공설운동장 담벼락도 보인다. 일제강점기 내내 쌀을 실어 나르기 바빴던 내항선은 진즉 폐선되어 녹슨 철도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스탠드를 갖춘 현대식 운동장으로 전국 규모 축구대회, 자전거 대회, 시민체육대회 등이 열렸고, 1950년대 군부대가 주둔했던 공설운동장은 주택 단지로 변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한다.

'조선인 시장' 이전 후 고율의 자릿세 거둬
 
군산 조선인시장 이전 알리는 1931년 3월 17일 치 ‘동아일보’ 기사
 군산 조선인시장 이전 알리는 1931년 3월 17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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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중에 있든 군산 조선인 시장(市場)은 2,580원의 예산으로 드디어 금년 7월 중에 이전하기로 되었다. 새로 결정한 곳은 신영정(新榮町)에서 경장리(京場里·경포)로 통하는 광장이라 하며 동지는 철도국(鐵道局) 용지로서 대부받은 것인데 시장으로 사용할 면적은 약 2600평이라 한다. (현대어로 수정)" - (1931년 3월 17일 치 '동아일보')
 
신문은 그해 7월 중 조선인 시장(장재시장)을 신영정 철도 용지로 이전하게 될 것이라며 이전 비용과 시장 면적까지 상세히 전한다. 조선 상인들의 기대 속에 막상 7월이 다가오자 시장 이전은 9월로 미뤄졌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그 약속도 지켜지지 않는다. 9월 1일 신문에는 조선인 시장 이전 인가를 도(道)에 제출했다는 기사만 뜬다.

지루하게 미뤄오던 공설시장 건물(점포 총 120칸)은 11월에야 완공된다. 부(府) 당국은 입점 상인을 모집하였고, 공지 한 달도 안 되어 신청자가 200명에 달하였다. 그들은 가난한 하층민들로 적게는 6~7원, 많으면 30~40원의 자본금을 가지고 모여들었다. 당시 군산 부두 노동자 한 달 임금이 15~20원이었으니 상인들 재정 여건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군산 조선인 시장은 공사비 1만1000원(매립비 포함), 면적 2954평(건평 526평)으로 그해 12월 27일 신영정(현 공설시장 자리)으로 이전한다(옛날 신문 참고). 제반 시설을 완비한 일제는 종래의 정기 개시를 상설 개시로 바꾸고, 시장 질서와 단속을 명분으로 청원경찰을 배치한다. 또한 점포들을 1~5등급으로 나눠 등급에 따라 매월 자릿세(3원~8원)를 부과하였다.

과중한 시장 사용료는 조선인 차별

상인들의 하루 매상은 10~30전, 많아야 1~2원에 그쳤다. 수입액이 생활비는커녕 자릿세(시장 사용료)도 낼 수 없게 되자 대책을 강구해달라고 부(府) 당국에 주문하였다. 그러나 누차 교섭해도 '소귀에 경 읽기'였다. 참다못한 상인 60여 명은 연명으로 진정서를 작성, 부윤에게 제출하는가 하면 점포를 노상으로 옮기는 상인도 50여 명에 달하였다.

사태가 급박하게 돌아가자 일제 당국은 시장 사용료를 등급에 따라 50전~1원씩 감하겠다고 통지한다. 그러나 상인들의 원성은 하늘에 가득했다. 그럼에도 일제 당국은 눈도 꿈쩍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장을 감독하는 관리가 난폭한 행동을 버릇처럼 잠행(潛行), 많은 상인들이 공포심을 느끼게 되고, 급기야 사회문제가 되기도 하였다.

전의용 부의원은 1934년 3월 25일 열린 회의에서 '군산의 시장(공설시장) 시설은 군·면 소재지 촌락 시장과 별다른 차이가 없음에도 빈약한 상인들에게 매년 과중한 사용료(6300원)를 부과하는 것은 등한시할 수 없는 중대한 문제'라며 인하를 촉구하는 등 부윤의 인식 부족을 지적하였다. 일제 당국의 과중한 시장사용료 역시 조선인 차별정책의 하나였던 것.

고율의 시장 사용료 문제는 해마다 군산부회의 화두가 됐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군산 제2시장(산상정 시장) 개설을 앞두고 열린 1935년 12월 3일 회의에서도 빈궁한 조선인 상인의 시장 사용료 면제 안건을 놓고 일본인 부의원과 조선인 부의원이 충돌하였다. 1936년 3월 28일에도 '조선인 시장 사용료 감하 문제로 맹렬한 논란이 있었다'고 신문들은 전한다.

고율의 시장 사용료 문제 해결은?

1930년대 군산에는 부청에서 관리, 운영하는 공설시장이 두 곳 있었다. 신영정(신영동)의 조선인 시장과 행정(幸町: 장미동)의 일본인 시장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상인들의 시장 사용료 문제가 조선인 시장에서만 대두됐다는 점이다. 이는 일제 당국이 조선인 시장과 일본인 시장을 차별화해 운영했음을 반증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합동군사훈련을 위해 군산역에 도착한 일본군 숙영부대(1934년 10월)
 합동군사훈련을 위해 군산역에 도착한 일본군 숙영부대(1934년 10월)
ⓒ 군산 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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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제는 이듬해 괴뢰만주국을 세우고 전시체제로 전환한다. 중국대륙과 최단 거리에 위치한 군산 역시 전쟁 물자를 공급하는 병참기지로 개발된다. 중일전쟁(1937) 앞두고는 집회 및 사상, 언론통제가 더욱 강화된다. 그래서일까. 1936년 3월 이후에는 조선인 시장 사용료 관련 기사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물적 자원 통제와 기근으로 절대빈곤이 지속됐던 1930년대 군산, 일제의 탄압과 수탈은 전운이 짙어질수록 더하였다. 심지어 놋그릇 하나까지 전쟁물자 공출로 수거해갔다. 이러저러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조선 상인들의 공설시장 사용료 문제는 1945년 광복이 되는 그날까지 해결은커녕 공출까지 겹쳐 더욱 시달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디지털군산문화대전(군산공설시장). <群山府史(군산부사)>(1935), 동아일보. 조선일보(1920~193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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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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