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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으로 보는 군산 100년>에 실린 군산장날 모습(1905)
 <사진으로 보는 군산 100년>에 실린 군산장날 모습(1905)
ⓒ 군산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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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의 시장(市場) 역사는 서래장터(경포)에서 출발한다. 조선 시대 경포는 서울을 비롯해 충청·전라도 각지로 물화가 오갈 정도로 큰 포구였다. 군산 개항(1899) 이후에도 번성했으나 전군도로(1908)와 군산선(1912) 개통으로 활기를 잃는다. 이후 일제가 장재시장을 개설하고 죽성포(째보선창)를 근대식 어항으로 조성하면서 경포는 장시와 포구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관련 기사: 무역 루트였던 군산 경포천은 어쩌다 쇠락했을까).

1910년 8월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는 민족자본 유통을 차단하고 조선인들의 기업 설립을 억제하기 위해 <조선회사령>(1910년 12월)을 공포한다. 이어 전통 재래시장의 상거래 장악을 목적으로 <시장규칙>(1914)을 제정한다. 군산 지역도 예외가 아니었다. 1915년경 시행한 서래장터 현황(역사와 거래 규모, 상품 수급 지역 등) 조사 결과가 그것이다.

<시장규칙>을 제정한 일제는 본래 전통시장을 제1호 시장(상설 또는 정기 재래시장), 제2호 시장(지정된 건물 내에서 곡물 및 식료품을 파는 식료품시장), 제3호 시장(위탁이나 경매로 거래하는 농수산물 경매시장) 등으로 분류하고 관청의 허가를 받도록 조치한다. 제2호와 제3호 시장을 합해 '신식시장'이라고 했는데, 이 모두 조선인 시장을 효율적으로 지배하기 위함이었다.

일제가 서래장터 현황을 조사한 1915년 기준으로 400년 전은 조선 초기(1515), 즉 군산창이 설치되는 시기에 해당된다. 기록에 따르면 해상방어 업무를 담당했던 군산진은 1426년(세종 8) 이미 설치돼 있었고, 전라도 지역(전주·태인·금구·임실·진안·장수·옥구) 세곡을 모아 서울로 올려보내는 군산창은 1512년(중종 7) 지금의 서초등학교(수덕산) 일대에 들어선다.

1454년(단종 2)에 제작된 <세종실록지리지> '관방수어조'는 금강은 충청·전라 지방 조세와 공물 운반으로 충북 청주와 옥천까지 배가 운항한다고 소개한다. 이는 서래장터가 출현하는 500년 전에도 군산 지역(옥구·임피)은 물류 유통 중심지였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강경젓갈시장에서 소비되는 소금 대부분을 옥구 염전에서 공급했고, 군산 개항(1899) 전 충남 부여의 객주가 돛단배를 이용 군산에서 생필품을 구입했다는 기록에도 잘 나타난다.

흑백사진에 담긴 100년 전 장재시장 모습
 
군산 장재동 시장(1920년대로 추정)
 군산 장재동 시장(1920년대로 추정)
ⓒ 군산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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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홍보용으로 만든 엽서 사진이다. '군산명소(群山名所) 선인시장(鮮人市場)'이라 소개하고 있는데, 1915년 2월 장재동시장(장재시장)을 개설, 부(府)에서 경영하다가 1918년 '군산시장'이라 개칭하고 개시일(1일, 5일)을 변경했다는 기록으로 미뤄 대명동 일대에 있었던 '장재시장'으로 보인다. 1923년 제작된 '군산시가도'에도 시장 위치가 표기되어 있다.

소화통(중앙로 2가) 개설 전 모습으로 사진 찍은 위치는 지금의 대명동(양키시장 입구)으로 추정된다. 낮은 구릉이 좌우로 뻗어 있는데, 왼쪽 상단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보이는 건물이 군산공립보통학교(현 중앙초등학교)이다. 중앙초등학교는 길게 뻗어 내려온 월명산 줄기를 깎아내고 그 자리에 교사를 신축하고 운동장과 정원을 조성한 것으로 알려진다.

우리나라 시장은 일정한 기간을 두고 열리는 '정기시장(3일장, 5일장 등)'과 도시의 일정 지역을 점유하여 연중 상행위가 이뤄지는 '상설시장'으로 나뉜다. 장재시장은 상설 시장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군산부사>와 중추원(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자문기관) 자료에는 조선인용 농산물, 직물, 일용잡화 등이 거래되는 '정기시장'으로 나온다.

흰옷 차림 일색의 장꾼들과 옹기종기 모여 있는 초가집이 장터분위기를 돋운다. 그곳에는 장꾼들이 숙식을 해결하는 주막과 일용잡화를 파는 붙박이 가게, 대장간 등이 있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햇볕을 차단하기 위해 쳐놓은 차양과 장에 내다 팔 물건을 지고 왔을 지게도 여러 개 놓여있다. 방립을 쓴 촌로가 무쇠솥단지를 놓고 흥정을 벌이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장터는 민족의 애환이 담긴 공간으로 삶의 터전이었다. 장날은 필요한 물품 거래와 함께 이웃 마을 주민들과 만남이 이뤄지는 날이기도 하였다. 오랜만에 만난 지인들과 막걸리 한 사발 기울이며 어수선한 시국 이야기에 곁들여 집안 소식을 주고받았던 것. 또한 장터는 지방 고유의 특산물은 물론 떡장수, 엿장수, 각설이 등이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뤘다.

일제는 장재시장 개설 이후 서래장터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그러나 군산영명학교 학생들이 1919년 3·1만세운동을 서래장터 장날에 맞춰 계획하였고, 1930년대 소설 <탁류>에서 '정주사가 안스래(경포)에 있는 생선장에 가서 흥정도 해준다'는 대목 등으로 미뤄 많은 조선 사람이 여전히 서래장터를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장 주변 동네, 해마다 물난리 겪어

군산은 1920년대 들어 도시가 확장되고 인구도 대폭 증가한다. '쌀의 군산' 소리가 회자될 정도로 미곡 생산량도 급증한다. 정미소들도 호황을 누린다. 그러나 개복동, 구복동, 대정동, 장재동 등 조선인 동네 주민들 불편은 더욱 커졌다. 도로와 하수구, 오예물(汚穢物) 처리 등이 당면 문제로 떠올랐던 것. 그러나 일제 당국은 '눈감고 아웅' 식으로 대처하였다.
 
조선인촌 침수 피해 알리는 1927년 8월 6일 치 ‘동아일보’ 기사
 조선인촌 침수 피해 알리는 1927년 8월 6일 치 ‘동아일보’ 기사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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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오전 11시경부터 쏟아지는 폭우... (줄임) 조선인 부락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매년 여름 우기를 당할 때마다 다수의 침수 피해로 안도(安堵)를 얻지 못하여 부(府) 당국에 조선인 촌락에도 시급히 하수구 시설을 진정하였으나 우금 시설치 아니함으로 더욱 원성이 높다 하며 이번 침수의 피해를 입은 부민이 340여 명에 달한다더라.(현대어로 수정)" - (1927년 8월 6일 치 '동아일보')

당시 군산의 조선인 동네(장재시장 포함)는 대부분 저지대로 상습 침수 지역이었다. 따라서 해마다 여름이면 물난리를 겪었다. 폭우가 한두 시간만 쏟아져도 가옥 수백 채가 물에 잠기는가 하면 도로가 유실되거나 집이 무너지고 이재민이 발생하였다. 그처럼 해마다 적잖은 피해를 입고 있음에도 일제 당국의 외면으로 주민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신설도로 완공 전 세금부터 거둬

일제강점기 소화통은 명치정과 함께 군산의 동맥이었다. 광복 후에도 수십 년 동안 도시의 관문 역할을 했다. 도로(2차선)는 1928년 공사를 시작, 1930년대 초 완공된다. 구간은 구 경찰서 로터리-구복동-대정동(큰샘거리)-장재시장 일대를 관통하며 기차역까지 이어졌다. 옛날 신문에 따르면 야산을 깎아내고 구릉지를 절개하는 등 난공사였다.

일제는 신설도로(소화통) 완공으로 상승 효과를 가져올 토지와 건물주들에게 수익세(收益稅)를 부과한다. 완공도 되기 전 세금부터 거둬들였던 것. 과세 구역은 군산경찰서를 비롯해 희소관(국도극장 전신), 영정파출소(옥구금융조합 앞), 옥구 군청, 장재시장 등과 연결되는 도로 주변 대지와 건물로 대상자는 대부분 조선인이었다.

일제는 납세 의무에 대한 지식을 철저히 보급하고, 부민(府民)의 편의를 도모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각 구역에 납세 관련 업무를 취급하는 부(府) 금고 임시출장소까지 설치한다.

그즈음 장재시장을 이전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 시작한다. 후보지는 팔마재(팔마산) 부근과 신영정 철도부지 두 곳, 사람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였다. 부청에서 장소를 놓고 연구 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동부정우회연합회(東部町友會聯合會) 측은 팔마재 부근으로 시장 이전을 적극 반대하였다. 동부지역 발전에 저해된다는 게 반대 이유였다.

그 후에도 장재시장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다가 1931년 연말쯤 신영정(新榮町: 지금의 공설시장 자리)으로 이전한다.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디지털군산문화대전(군산공설시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市場), <群山府史(군산부사)>(1935), <금강, 그 물길따라 100년>(2018), 동아일보(1920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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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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