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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의 섬 구석구석을 돌며 섬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가까이서 듣고 싶었다. 지난 4월 완도에 왔을때 동백꽃 송이송이 떨어져 내린 숲마다 심장이 멎는 듯한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통째로 바닥에 떨어지던 그 붉은 동백은 어느새 다시 피기 시작한다. 숱한 시간 지나가고 12월의 끄트머리에서 지난 발자취를 돌아보았다. 

깊이 생각할 일이 생기면 자주 가는 곳이 있다. 벌써 10여 년째. 한 달에도 몇 번을 신지도 동고리 해변의 바람을 만나러 간다. 폭풍우 치는 날이면 더욱 좋다. 

자연이 들려주는 솔바람 소리, 갯바위에 부서지는 파도 소리. 나오는 길에 반드시 들러보는 한겨울 명사 해변은 더없이 좋은 곳이다. 아무도 없는 명사십리 해변을 거닐어 본 적 있는가. 겨울바람 모래 날리는 해변은 머릿속에 담긴 시끌시끌한 생각을 모두 잠재운다. 

그런데, 이제는 좋은 곳이 하나 더 생겼다. 그곳은 원교 이광사 문화의 거리이다. 그토록 찾아 헤매던 원교 이광사 적거지를 이제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설렘과 함께 마치 유배자의 신분이 된 것처럼 모든 욕심과 근심을 차분히 내려놓는 법을 배우기에 더없이 좋은 곳으로 여겨졌다. 

원교 이광사 이야기는 인문학의 단골 메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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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후손으로 전성기를 누렸던 원교의 집안은 영조가 즉위하면서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영조가 즉위하자 그동안 소론 중심이었던 정권이 노론 중심으로 바뀌었고 소론에 속했던 그의 백부와 부친은 유배의 길을 떠나게 된다. 

원교가 23세(1727년) 되던 해 유배지에서 돌아온 부친이 병사하고 백부마저도 이인좌의 난에 연루돼 옥사하자 그는 모든 관직을 포기하고 서화에만 전념한다. 그러나 그의 나이 51세(1755년) 되던 해 나주벽서사건에 연루돼 그도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를 떠난다. 이때 그가 참형됐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부인 유씨는 목을 매 자결한다.

유배 8년째 원교 이광사는 진도를 거쳐 완도 신지도로 이송되었다. 절해고도. 보이는 것이라곤 망망대해인 바다뿐, 외롭고 힘들 때마다 그는 붓을 들었다. 그는 붓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면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서법의 모든 틀을 깨고 자신만의 글씨 동국진체의 완성을 보게 된다. 우리 고유의 멋과 감성이 담긴 동국진체를 통해 그는 조선 서예사의 한 획을 그은 것이다. 

18세기는 조선 사회 전반에 걸쳐 우리 것에 대한 자주적인 운동이 일어난 때다. 서예에서는 동국진체가, 그림에서는 진경산수화라는 새로운 장르의 예술이 꽃을 피웠다. 그 자주적인 운동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었던 조선사회의 자성에서 비롯했다. 성리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중화사상에 빠진 사상과 학문, 예술 등에 대한 반성이 선진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활발히 전개된 것이다.

이후 금석학의 권위자 추사 김정희는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 놓은 글씨라며 원교의 글씨를 비판한다. 추사는 제주도 유배 길에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에게 원교가 쓴 대웅보전의 현판 글씨를 떼어내라고 요구했고, 그 자리에서 직접 쓴 자신의 글씨를 걸 것을 주문했다.

9년의 제주도 유배가 풀리고 한양으로 가던 중 추사는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에게 원교의 현판 글씨를 다시 걸어 달라며 정중히 부탁한다. 9년의 유배 생활에서 틀을 깬 개성의 가치를 그 시대가 만들어낸 창조적인 가치를 추사는 터득한 것일까. 이후, 추사는 죽기 3일 전에 온 힘을 다해서 원교의 서체를 따라 쓴 '판교'라는 글씨를 남긴다.

조선색(朝鮮色)이 강한 동국진체는 옥동 이서(1662~1723년)로부터 시작되었다. 성호 이익의 형 옥동 이서는 공재 윤두서의 친구였고, 옥동 이서는 자주적 운동으로 동국진체를 창조한다. 이서로부터 시작된 동국진체는 공재 윤두서로 이어지고 원교 이광사에 이르러 완성을 보았다. 원교는 중국의 왕희지체를 본받으면서도 우리 민족 고유의 생명력을 글씨에 담아낸 것이다.

원교는 완도 신지도에서 16년의 유배 생활 중에 사망한다. 그야말로 망망한 바다 한가운데서 외로이 글씨만을 위해 살다 간 그의 삶이었다. 불운한 그의 삶이 위대한 예술품을 탄생시켰다. 

완도 신지도에서 완성한 원교의 예술혼은 이제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이야기가 됐다. 오래전부터 인문학 강의에 단골 메뉴로 등장한 원교 이야기는 이제 세상을 바꿔 놓을만한 새로운 사상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바로 신지도 금곡마을에서 그 사상이 눈뜨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를 느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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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신지문화센터에서 열린 서맥전을 관람했다. 전국의 서예인 75인이 참여한 이번 전시회는 세 번째 열린 것이다. (사)원교 이광사 기념사업회가 주관한 서맥전은 원교 이광사의 정신을 이어받고자 지역의 서예인들이 준비했다. 

그런데 전시작품에 비해 전시실이 너무 비좁다. 전국을 대표할 만한 75인의 서예인이 각 지역을 대표해 작품을 보내온 것인데, 다닥다닥 붙어 있는 작품을 보니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 정도 전시회라면 전국대회를 넘어 국제적 행사를 열어도 충분한 자원인데, 좁은 공간에서 치르다니 무척 아쉬웠다.

복잡한 심경을 뒤로하고 차분히 원교 이광사 문화의 거리를 걸었다. 신지중학교 담벼락에 새겨진 원교의 글씨들이 하나씩 들어왔다. 서예인이 아니라서 서도에 문외한인 나의 눈에 익숙한 서체가 들어와 박히는 것은 신기할 일이 아니었다. 

원교 이광사는 완도 사람들보다는 외부인이 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답사문화가 주를 이룰 때 인문학 강의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했기 때문이다. 인근 지역 해남에 사는 사람들만 보아도 원교 이광사를 여완도에 사는 사람보다 더 잘 알고 있다. 그것은 대흥사에 걸려있는 원교의 글씨와 관련한 이야기 때문이다. 

18세기 조선의 선비들이 꿈꾸던 사상에 관련한 스토리텔링은 너무도 잘 되어 있다. 그 이야기 속에는 초의선사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소치 허련 등 조선시대 '내로다'하는 인물들이 시대를 넘나들고 우리의 상상력을 뛰어넘고 있다. 그 중심에 조선의 글씨 동국진체가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문화의 거리를 걷다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원교 이광사 거리를 걷다 말고 담벼락에 있는 몇 개의 작품이 신선하게 다가왔다. 순간 입가에  미소가 살며시 번졌다. '아, 이곳에도 원교를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간의 걱정은 한낱 기우(杞憂)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난초 그림과 병아리 그림 등 원교의 서체와 동떨어진 것 같은 작품 몇 점이지만, 그것을 본 순간 우려했던 마음은 조금씩 누그러졌다. 

예술의 경지를 일러 누군가는 미학이라고 했던가. 미학의 부분을 지향하지 않고서 글씨를 쓰던, 글을 짓던, 그림을 그리던, 사진을 찍던, 그것은 기교뿐이라는 것. 

기술은 보이기 위한 겉치레의 기능이 우선한다. 인문학적 사고 없이 예술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기존의 틀을 깨뜨리지 않고서는 원교 이광사 문화의 거리는 생명을 피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난초 그림과 가슴 절절한 유리왕의 시조와 같은 작품을 과감히 선보인 원교의 후예들이 이곳에 살고 있음에 그 손길이, 그 마음이 더욱 감사할 뿐이다.  

(계속)  

 정지승/다큐사진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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