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캐나다에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별일'들, 한국에 의미있는 캐나다 소식을 전합니다. [편집자말]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이주연·이정환 저) 표지 이미지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이주연·이정환 저) 표지 이미지
ⓒ 오마이북

관련사진보기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라는 책 제목을 봤을 때 무엇에 관한 책인지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오마이뉴스> 이주연·이정환 기자가 2016년부터 2018년까지의 '교제살인' 판결문 108건을 분석한 뒤 보도한 특별기획 기사들을 책으로 엮어낸 것이었다. '나는 죽어서야 헤어졌다'는 마지막 장의 제목은 처절했고 섬뜩했고 무엇보다 슬펐다.

3년 사이에 108건이면 열흘에 한 명 꼴로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뜻이다. 싸우다 격분해서, 헤어지자고 해서, 내 말을 안 들어서 등 살해 이유는 하나같이 이유같지 않았고 수법은 잔인했다. 그리하여 두 기자는 "그 참혹한 죽음에서 데이트라는 서정적 단어를 지우고" '교제살인'이라 명명하기로 했다.

출구 없는 상황까지 '똑 닮은' 캐나다

2021년의 마지막 달, 캐나다 CBC뉴스도 '가까운 파트너의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 IPV)'에 대한 기사 여러 편을 연달아 게재했다. 2015년 1월부터 2020년 6월 사이에 가까운 파트너(애인 혹은 배우자) 관계에서 발생한 392건의 살인사건을 분석한 기사들이었다. 분석은 피해자와 피의자의 성별 및 민족, 살해 당시 피해자가 법원명령에 의한 보호를 받고 있었는지 여부, 피의자의 전과 등 50가지에 달하는 측정값을 바탕으로 이뤄졌다.

캐나다에서 가장 큰 정신적 외상을 초래하는 끔찍한 범죄 중 하나인 '가까운 파트너의 폭력(IPV)'은 대개 피해자의 집에서 발생했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가족과 공동체에 상흔을 남기고 있었다. 분석에 따르면, 피해자의 4분의 3 이상이 여성이었고 피의자의 대부분인 78%가 남성이었다. 5년 반 동안 가정폭력으로 부모를 잃은 사람들의 수는 400명이 넘었다.

넷 중에 한 건은 시골 외딴 지역에서 발생한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웨스턴 대학의 사회학자 피터 재프는 "주택과 재정지원 부족은 특히 시골 외딴 지역에서 큰 장벽"이라고 진단한다. 폭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도 머물 곳이 없다거나 재정적으로 파트너에게 매여 있는 경우가 그렇다.

고립(지원을 요청할 경찰이나 다른 사람들과의 동떨어진 거리), 교통수단의 부족, 가난, 와이파이의 부재 혹은 불규칙함, 총기에 대한 접근성 역시 시골 지역에서 벌어지는 '가까운 파트너의 폭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이다. 땅덩어리 넓은 캐나다의 시골마을에는 집들 사이의 간격이 꽤나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런 지역에서는 대중 교통이나 와이파이 이용도 쉽지 않음을 생각해보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일이다.

또한 주목할 것은, 적어도 36명의 희생자들이 죽임을 당할 당시 '법원 명령에 의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에서 '데이트폭력 피해 생존자' 이아리 작가는 "지금의 접근금지 가처분 신청은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했을 때 과태료가 나올 뿐이지 실질적으로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를 막지는 못한다. 가해자가 접근을 생각하지도 못할 만큼 강력한 제재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고해도 달라지는 게 없는, 아니 오히려 가해자의 보복을 두려워해야 하는 상황, 법원의 보호가 별 의미를 지니지 못하는 출구 없는 상황 역시 한국이나 캐나다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더욱 안타까운 점은 이 범죄들을 사전에 막을 수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관계가 치명적으로 변할 수 있음을 알리는 '경고의 징후'들이 있었던 것이다. 전문가들은 파트너에 의한 살인은 이러한 징후들로 예측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가장 예방이 가능한 유형의 살인이라고 말한다.

기억해야 할 징후들
 
캐나다에서도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과 살인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기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
 캐나다에서도 가까운 파트너에 의한 폭력과 살인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기사와 직접적 관련이 없는 자료사진.
ⓒ pixabay

관련사진보기

 
CBC뉴스는 살인을 예고한 요인들은 무엇이었는지, 각 사례마다 그 요인들이 어느 정도 수준으로 나타났었는지를 추적했다. 이른바 '살인의 예보자' 역할을 한 요인들은 다음과 같았다.
 
- 피해자가 피의자에 의한 폭력이나 괴롭힘을 경찰에 신고한 적이 있는지
- (피의자에 의한) 목졸림의 경험
- (피의자의) 강압적이거나 통제적인 행동 패턴
- (피의자의) 살해 협박
- (피의자의) 무기를 이용한 협박
- 최근의 결별 혹은 결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
- (피해자가) 법원의 명령에 따른 보호를 받고 있었는지

위와 같은 것들이 훗날 살인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음을 예고하는 전조증상이었다. 분석에 따르면, 36%의 사례에서 최소 한 가지 이상의 '경고 신호'가 발견됐다.

그중 가장 흔한 것은 '최근의 결별 혹은 결별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5건 중 1건). 가장 위험한 때가 바로 희생자가 관계를 끝내기로 결심하는 때였던 것이다. 서스캐처원의 경우, 여성 희생자 중 절반 이상이 최근 파트너와 결별했거나 떠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쳤었다고 한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교제살인의 경우에도 살해 이유로서 '헤어지자고 해서'가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을 보면 캐나다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피해자가 피의자를) 경찰에 신고한 이력'과 '(피의자의) 강압적이거나 통제적인 행동패턴'도 각각 약 15%로 자주 나타나는 '경고 신호'였다. 이주연·이정환 기자의 판결문 분석에서도 대부분의 경우 '살인 전조'가 있었음이 파악됐는데, 이유 없이 때리거나 자기 목숨을 무기로 협박하는 것 등이었다.

캐나다 기마경찰(연방경찰) 홈페이지에는 '가까운 파트너의 폭력과 학대'에 대한 의심 정황이 다음과 같이 정리돼 있다. 주변인들이 알아차리고 선제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기 위함이다.
 
- 이유를 알 수 없는 멍이 있거나 상처에 대해 의심스러운 설명을 함
- 파트너가 주위에 있을 때 다르게 행동함 (예를 들어, 거리낌없이 말하지 못함)
- 파트너의 행동에 대한 질문을 받으면 주제를 바꾸려고 함
- 파트너에 의해 통제받는 듯하고 스스로 결정 내리기를 꺼려하는 듯 보임

- 친구나 가족들과 거리를 둠
- 파트너에 의해 온라인 활동을 감시 당함
- 위험부담이 있는 행동에 있어 평소답지 않은 변화를 보임(예를 들어, 약물 복용이나 음주 등)
- 학업이나 업무 성취도가 떨어짐
- 다른 사람들 앞에서 파트너에 의해 창피나 비난을 당함
- 자주 파트너에게서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묻는 연락이 옴

살인사건들 중 가장 예방 가능성이 높다는 '교제살인'의 피해자를 줄이기 위해, 아니 없애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경고 신호들을 숙지하고 주변인들을 면밀하게 살필 일이다.

20대의 나 역시 남들처럼 몇 번인가 연애를 했고 이별을 했다. 내겐 무척이나 설렜고 대단히도 쓰렸던 연애일지 몰라도 남들 눈엔 그저 고만고만한 누구나 했을 법한 평범한 연애였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에서 이아리 작가는 "누구나 피해자가 될 수 있고, 누구나 가해자가 될 수 있다"고 했다.

그렇다면 몇 번의 연애 끝에도 아무런 폭력을 겪지 않고 멀쩡히 살아남은 나는 퍽이나 운이 좋았던 건지도 모르겠다. 자연스러워야 할 일이 다행이었나 보다 하고 가슴을 쓸어내릴 일이 된 거꾸로 세상에 살고 있으니 말이다.

다음 기사에서는 파트너에 의한 살인의 경고 신호 중 하나인 '강압적인 지배'(coercive control)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 주변 개개인을 넘어 법과 시스템이 해야 할 일에 대해서도 여러 견해를 나눠보고 싶다. 더이상 죽어서야 헤어지는 이들이 없길 바라며.

태그:#캐나다, #교제살인, #가까운 파트너의 폭력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