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은 한국 배구사에 그 어느 때보다 파란만장했던 한 해로 기억될 것이다. 빛나는 영광의 순간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 않은 논란과 오점도 동시에 남겼다.

도쿄올림픽에서 여자배구대표팀의 4강신화와 '슈퍼스타' 김연경 신드롬이 전국민을 감동시켰다면, 이다영-이재영 쌍둥이 자매로부터 비롯된 학폭 미투 열풍, IBK 기업은행 사태, 정지석의 데이트 폭력 논란 등 스포츠보다는 사회 뉴스면이 더 어울릴 법한 막장드라마도 속출했다. 겨울스포츠를 대표하는 인기 종목으로 부상하며 받은 사랑과 관심에 비하여, 그에 미치지 못하는 한국 배구계의 구조적 모순과 한계 또한 동시에 보여준 시간이었다.
 
'쌍둥이 자매 학폭논란'의 여파
 
 겨울철 인기 실내 스포츠 입지를 굳혀가던 한국 프로배구 V리그가 '학교 폭력(학폭) 논란'으로 휘청이고 있다.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 의혹이 불거진 흥국생명의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의혹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둘은 현재 팀 숙소를 떠난 상태다.

사진은 지난 2020년 10월 경기에 출전한 이재영과 이다영(왼쪽).

중학교 시절 학교 폭력 의혹이 불거진 쌍둥이 자매 이재영과 이다영. 사진은 지난 2020년 10월 경기에 출전한 이재영과 이다영(왼쪽). ⓒ 연합뉴스

 
올해 상반기 한국 배구의 최대 화두는 단연 학교 폭력 논란이었다. 이재영-이다영 쌍둥이 자매는 한때 여자배구의 간판스타로 통했지만, 지난 2월 팀내 불화설에 이어 학창 시절 폭력 논란이 터지며 한국 배구의 금기어로 추락했다. 쌍둥이 자매가 수시로 언어·신체적 폭력·금품 갈취 등을 저질렀고 심지어 흉기로 동료를 위협하기까지 했다는 구체적인 경험담까지 올라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결국 쌍둥이 자매는 지난 2월 소속팀 흥국생명으로부터 무기한 출장 정지 징계에 이어 방출 수순을 밟았고 국가대표 자격까지 박탈당하며 올림픽에서도 나서지 못했다. 여기에 10월에는 이다영의 비밀결혼과 가정폭력 의혹까지 터져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자매는 거듭된 논란에도 끝까지 진심어린 사과와 자숙보다는 오히려 피해자들을 고소하는가하면 언론플레이를 통하여 '칼은 들었지만 휘두르지는 않았다'는 망언과 남탓으로 일관하며 변명에만 급급했다.
 
한국 무대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갈 길이 막힌 쌍둥이는 해외 무대로 눈길을 돌렸고 대한배구협회의 국제이적동의서 발급 거부에도 불구하고 쌍둥이 자매는 국제배구연맹(FIVB)를 통해 그리스 리그 진출을 강행했다. 사실상 한국 배구계와 팬들과는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는 평가다.
 
또한 쌍둥이 자매를 둘러싼 논란은 소속팀 흥국생명은 물론 배구계 전반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왔다. 흥국생명은 2020-2021시즌 V리그를 앞두고 FA로 이다영-이재영을 모두 영입한 데 이어 '배구 여제' 김연경까지 복귀하면서 '흥벤져스'라 불리우는 역대급 라인업을 구축했다. 어우흥(어차피 우승은 흥국생명)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하지만 이다영이 선배 김연경을 저격하는 듯한 메시지를 SNS에 올리면서 불화설이 나오기 시작했고,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분노한 학폭 피해자들의 폭로까지 이어졌다. 흥국생명은 쌍둥이 자매의 공백을 메우지 못하고 정규리그-챔프전-컵대회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쳤다. 쌍둥이 효과가 사실상 배구계의 판도까지 뒤흔든 셈이다.
 
여기에 쌍둥이 자매를 시작으로 배구계를 비롯하여 사회 전반까지 한동안 '학폭 미투' 현상이 들불처럼 번져나갔다. 이상열 전 KB손해보험 감독은 2009년 국가대표팀 코치 시절 박철우(한국전력)를 폭행한 사실이 재조명되며 불명예 사퇴했고, 송명근-심경섭(OK금융그룹), 박상하(현대캐피탈)도 학폭 전력이 폭로되어 곤욕을 치렀다. 일각에서는 미투 현상을 틈타 과장되거나 왜곡된 폭로가 등장하기도 했고, 학폭 논란이 사실상 배구계의 모든 이슈를 블랙홀처럼 빨아들이는 부작용도 발생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스포츠계에 여전히 만연한 구타와 폭언같은 악습, 성적지상주의와 스타 선수에 대한 특별대우 등의 관행이 수면 위로 떠오르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다.
 
여자배구 '최후의 승자' GS칼텍스
     
GS칼텍스 승리 15일 장충체육관 프로배구 여자부 GS칼텍스-IBK기업은행. 3-0으로 승리한 GS칼텍스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 GS칼텍스 승리 15일 장충체육관 프로배구 여자부 GS칼텍스-IBK기업은행. 3-0으로 승리한 GS칼텍스 선수들이 기뻐하고 있다. ⓒ 연합뉴스

 
어지러운 난세에도 빛나는 영웅들은 등장하기 마련이다. 여자배구 GS칼텍스는 그동안 쌍둥이 자매와 김연경을 보유한 흥국생명에 여론의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며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지만, 2020-21시즌 당당히 사상 최초의 단일시즌 3관왕을 달성하며 '최후의 승자'로 등극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올 시즌 배구계가 남녀를 막론하고 각종 사건사고로 얼룩진 데 비하여 GS칼텍스는 논란청정지역으로 불릴 만큼 성적과 팀워크 모두 시즌 내내 모범적인 모습을 유지하며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는 찬사를 받았다.
 
남자배구는 인천 대한항공 점보스가 통합 챔피언의 주인공이 됐다. 남자배구 역사상 최초의 외국인 사령탑인 로베르토 산틸리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대한항공은 역대 2번째 우승이자 구단 사상 최초의 통합 우승, 프로배구 최초로 우승을 달성한 외국인 감독 등 각종 진기록을 추가했다. 하지만 산틸리 감독은 다혈질적인 언행과 경기 매너 문제로 도마에 오르며 우승에도 불구하고 아쉬움을 남겼고, 1년 계약을 마치고 유럽으로 복귀했다.
 
스테파노 라바리니 감독이 이끌었던 여자배구대표팀의 '도쿄올림픽 4강 신화'는 한국 배구 중흥의 희망을 살렸다. 남자배구가 20년 연속 본선진출에 실패한 가운데, 여자대표팀은 한국 배구의 자존심을 걸고 올림픽에 나섰지만 쌍둥이 자매의 공백으로 약화된 전력과 팀 분위기 속에 전망은 비관적이었다.
 
하지만 김연경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대표팀은 도쿄올림픽에서 누구도 기대하지 못한 아름다운 반전을 이뤄냈다. 대표팀은 도미니카공화국-일본과의 예선전, 터키와의 8강전에서 모두 풀세트까지 가는 접전 끝에 드라마틱한 승리를 거뒀다. 김연경은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고별무대였던 도쿄올림픽에서 엄청난 개인 활약상은 물론이고 선수들을 독려하는 강한 '언니 리더십'으로 존재감을 발휘했다. 국제배구연맹(FIVB)은 김연경에 대하여 "10억 명 중에 1명 나올까 말까 한 선수"라는 찬사를 보냈다.
 
물론 8강까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 탓인지 브라질과의 4강전, 세르비아와의 동메달 결정전은 모두 한 세트도 따내지 못하며 결국 목표했던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하지만 애초에 조별리그 통과도 힘들다던 한국이 강팀들에게 선전하며 여기까지 올라온 것만해도 박수받기 충분한 기적이었다. 국민적 인기를 누리던 야구-축구-농구 등이 줄줄이 부진을 면치못한 가운데 여자배구의 유일한 올림픽 4강 진출은 한국 구기종목의 자존심을 세운 최고 성적이기도 했다.
 
'불세출의 스타' 김연경은 올림픽을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공식 선언하며 16년간 지켜왔던 태극마크를 명예롭게 내려놓았다. 김연경에게는 2021년 내내 국내 복귀와 소속팀 흥국생명과의 FA 자격을 둘러싼 논란, 이다영-이재영 쌍둥이 자매와의 불화설과 팀 수습, 국가대표팀 에이스로서의 책임감 등 본의 아니게 어려운 짐을 혼자 도맡아야 했던 상황이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김연경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과 도전을 결코 피하지 않았고, 필요한 경우에는 앞장서서 소신을 드러내며 동료들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줬다. 또한 김연경같은 슈퍼스타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내준 덕분에 배구계의 잘못된 관행들을 타파하고 여자배구가 더 많은 대중의 관심을 얻는 계기가 마련되었다는 평가다.
 
진정한 슈퍼스타의 모범을 보여준 김연경이 국가대표팀과 한국 무대를 다시 떠나게 되면서 앞으로 그 빈 자리를 어떻게 메우느냐는 '포스트 김연경' 시대를 맞이한 배구계의 최대 과제다. 남녀 대표팀 모두 2024년 파리올림픽에서는 본선진출조차 쉽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특히 여자대표팀은 도쿄올림픽 이후 김연경에 이어 양효진, 김수지 등 주축들이 대거 은퇴를 선언했고 라바리니 감독조차 지휘봉을 내려놓으며 새 판짜기가 불가피해졌다. '김연경 신드롬'이 배구계에 남긴 거대한 존재감과 영향력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그리워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데이트폭행 논란부터 기업은행 사태까지
 
손 마주치는 정지석과 임동혁 19일 의정부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도드람 2021-2022 V리그 남자부 KB손해보험과 대한항공 경기. 대한항공 정지석(오른쪽)과 임동혁이 손을 마주치고 있다.

▲ 손 마주치는 정지석과 임동혁 19일 의정부체육관에서 열린 프로배구 도드람 2021-2022 V리그 남자부 KB손해보험과 대한항공 경기. 대한항공 정지석(오른쪽)과 임동혁이 손을 마주치고 있다. ⓒ 연합뉴스

 
한편 여자배구의 선전으로 모처럼 재도약의 계기를 맞이하는 듯했던 배구의 인기는 2021-22시즌 개막 이후 얼마되지 않아 또다른 악재들에 직면했다. 9월에는 남자배구 대한항공의 주전 레프트로 활약하는 정지석이 데이트폭행과 불법촬영 혐의로 경찰조사를 받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정지석은 지난 10월 말 겨우 합의를 이끌어내며 형사처벌은 면했고, 배구연맹으로부터 제재금 500만 원과 구단의 2라운드 출장 정지 징계를 마치고 복귀했지만, 솜방망이 처벌과 도덕불감증에 대한 분노의 여론을 부채질했다.

여기에 여자배구에서는 IBK기업은행 사태가 발생했다. 국가대표급 전력을 보유하여 기대를 모았던 IBK는 시즌 초반부터 7연패를 당하는 의문의 부진에 휩싸었고, 11월 중순에는 주장이자 주전 세터인 조송화와 코치 김사니가 연이어 팀을 이탈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며 물의를 빚었다. 하지만 정작 구단은 11월 21일 성적 부진을 이유로 서남원 감독과 윤재섭 단장을 경질했다. 그리고 팀을 이탈했다가 복귀한 김사니 코치를 감독대행직에 앉히며 논란은 더욱 악화됐다.
 
김사니는 감독대행에 앉은 직후 팀 불화의 책임을 서남원 감독에게 돌리며 폭언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구단 일부 고참선수들은 전임 감독이 있을 때와 달라진 경기력으로 태업 의혹에 휩싸이기도 했다. 비정상적인 구단과 관련자들의 행태에 동업자인 배구계 인사들도 등을 돌렸고, 상대팀 감독들은 집단으로 김사니 코치와의 악수 거부를 동참하는 데 결의했다.
 
결국 김사니는 대행 취임 약 열흘 만인 지난 12월 2일, 사령탑 자리에서 사퇴했고 김호철 감독이 지휘봉을 잡았다. 조송화는 선수생활 복귀를 강력하게 희망했지만 기업은행은 지난 12월 13일 조송화를 자유계약선수(FA)로 방출하며 결별을 택했다. 다른 구단들도 조송화의 영입을 원하는 팀이 없어서 사실상 퇴출 기로에 몰렸다. 다만 조송화가 무단이탈을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잔여 연봉 문제 등은 구단과 법적 공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남녀배구가 멋진 경기력와 치열한 순위 경쟁을 펼치고 있음에도, 최근 한동안 모든 이슈가 기업은행 사태 때문에 묻혀버린 분위기라는 것은 배구계에 뼈아픈 일이다.
 
상반기의 학폭 미투 파문과 맞물려, 정지석 사태와 기업은행 구단을 둘러싼 논란 등은 배구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준 대표적인 흑역사다. 화려한 인기와 스포트라이트에 가려진 배구계 구성원들의 인성 문제와 폐쇄적인 집단 문화, 공정하고 투명한 조직 관리 시스템의 부재 등을 되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다. 또한 연이은 사건사고를 계기로 트럭 시위와 온라인 광고 등 팬들이 직접 여론을 주도하여 반성과 변화를 촉구하는 '집단적 목소리'를 내는 참여 현상이 활발해졌다는 것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올 한 해만큼 한국 배구가 연달아 국민적인 주목을 받는 경우는 없었다. 한국 배구는 지금 그들만의 리그로 전락하느냐, 다시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겨울스포츠로 부흥하느냐의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에는 그에 걸맞는 책임감이 따른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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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결산 김연경 도쿄올림픽 학폭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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