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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사림들의 일상은 어떤 것이었을까? 완고한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아 가는 이 시기, 이들의 일상적 삶을 들여다보는 것은 당시 사림들이 추구한 삶이 어떤 것이었나를 살펴볼 수 있다.

유희춘의 <미암일기>는 16세기 사림들의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타임머신이기도 하다. 유희춘은 유배에서 풀려난 후부터 <미암일기>를 기록하였는데 1567년 선조의 즉위와 함께 사림들의 세상이 된 당 시대와 생활사를 들여다 볼 수 있어 흥미롭다.

유희춘, 19년 만의 귀향

유희춘은 오랜 유배생활을 끝내고 1567년 10월 14일 경연관으로 관직에 복귀한다. 거의 19년 만에 다시 일상으로 복귀한 것이다. 그리고 한 달여 만인 11월 16일 고향에 내려가 부묘의 묘를 참배하기 위해 임금께 휴가를 요청한다. 유희춘은 고향에 다녀올 새도 없이 곧바로 조정에 들어간 터라 담양에 있는 부인 송덕봉과 고향 해남에 있는 형제와 일가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미암일기>에는 유희춘이 관직에 복귀한 뒤 담양과 해남에 내려가는 여정과 일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여정을 살펴보면 서울에서 전라도로 가는 교통로와 당시 사대부들의 여행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를 알 수 있다. 조선시대의 교통로는 주로 역과 원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유희춘이 거쳐 간 곳을 보면 이러한 교통로가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멀리 금강산 중턱에 미암의 호를 불리게 한 미암바위가 있다.
▲ 미암이 태어난 해남의 미암생가터 인근 멀리 금강산 중턱에 미암의 호를 불리게 한 미암바위가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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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은 1567년 11월 17일 행장을 꾸려 한양을 출발한다. 그리고 19일에는 방축원, 21일에는 경천역을 거쳐 11월 22일에는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에 해당하는 삼례역에 이르러 점심을 먹었다. 11월 24일에는 적성원에 도착하는데 유희춘이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는지 사위 윤관중과 아들 경염이 순창의 관문까지 나와 유희춘을 맞이한다. 아직 고향까지는 꽤 먼 거리가 남아 있었지만 이곳까지 마중 나온 것을 보면 그의 귀향을 얼마나 기다렸는가를 알 수 있다.

유희춘이 담양에 도착한 것은 11월 25일 오시(午時) 무렵이었다. 이곳에서 맨 처음 고을 군수와 만나 식사를 하였는데 해남의 군수 이유수도 이곳까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희춘은 25일 담양에 내려왔지만 그가 처가를 방문한 것은 11월 27일로 장인의 묘를 찾아가 참배하였다.

유희춘이 경연관으로 화려하게 복귀하여 귀향한 탓인지 유희춘이 도착하자 고을의 군수와 유지들이 너도나도 찾아와서 반기고 만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바쁜 일정 때문인지 11월 29일 일기를 보면 피로에 지쳐 손바닥에 열이 났다고 말하고 있다.

1567년 11월 29일
피로에 지쳐 손바닥에 열이 났다. 해남에서 두 달 정도 머물러 조리를 하고 정월 보름 이후에나 사마로 순천에 가서 할머니의 묘소에 제를 지내고 담양으로 돌아와 상경할까 하지만 공연히 경연관이란 이름을 띄고 있는 것이 미안하므로 초 4일에나 해남에 이르면 5, 6일 뒤에 나를 따라온 사람들을 서울로 보내고 상소를 써서 감사에게 바쳐 전달하도록 해야겠다.


유희춘은 12월 초 1일까지 담양 집에 머문 뒤 다음날인 2일 해남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선다. 해남에는 부모 대부터 내려온 토지가 있었고, 시집 가서 혼자 된 누나, 그리고 유배생활을 함께 했던 첩이 살고 있었다. 다시 고향에 돌아온 미암은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그것도 중앙의 높은 관직에 올라 금의환향을 하게 되니 해남의 성주가 찾아오고 집안의 일가들이 모두 나와 그를 맞이한다.
 
미암의 생가터 인근에 있으며 유희춘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고 있다.
▲ 미암 유희춘 유허비 미암의 생가터 인근에 있으며 유희춘이 태어난 곳임을 알리고 있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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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이 해남에 도착한 것은 12월 초 4일이었다. 유희춘은 날이 저물 무렵 해남 고을로 넘어가는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우슬재를 넘는다. 그가 도착하자 노복들이 늘어서 맞이하고 그의 일가뿐만 아니라 성주를 비롯하여 지역의 유지들이 모두 와서 반긴다.

1567년 12월 초4일
날이 저물 무렵 우슬재를 넘었는데 노복들이 마중 나와 삼대처럼 섰다. 해남 누이댁에 도착하여 돌아가신 부모님의 신주를 뵈었다. 누님이 이미 제물을 준비했기에 나는 곧 제사를 지냈다.


16세기 유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이념은 조상의 제사를 받들어 모시고 찾아오는 손님을 대접하는 '봉제사 접빈객'이었다. 이중 봉제사는 더욱 중히 여겨지고 있었다. 유희춘이 해남에 내려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부모님의 묘를 참배하는 일이었는데 그는 부모의 묘소를 찾아 감격스러운 듯 곡을 한다.

1567년 12월 초5일
식후에 성묘를 하기 위하여 모목동으로 갔다. 먼저 어머니 묘소 앞에서 땅에 엎드려 곡을 하였다. 다시 아버지(유계린)의 묘소 앞으로 가서 땅에 엎드려 곡을 하였다. 성주 김응인이 제물을 갖추어 보내면서 심히 신중하게 하였다. 제사를 끝마치고 지리를 아는 승려 정안을 불러 묘 앞에 연못을 팔 곳을 보게 했더니 이곳이 탐랑형(貪狼形)이니 마땅히 두 군데를 파야 한다고 했다.


유희춘은 부모님의 묘소가 좋은 형국이 되기 위해 풍수지리를 잘 아는 승려를 불러 조언을 받아 묘 앞에 연못을 조성하기 시작한다. 연못 조성은 곧바로 이틀 후인 12월 7일 많은 인부들을 동원하여 시작하였다. 이날 연못 조성에 참여한 인원을 보면 군인이 121명, 사돈댁인 녹우당 해남윤씨를 비롯해 일가의 종들 61명이 참여하는 큰 공사였다.

이같은 묘역 공사는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데 12월 12일에도 군인 220여 명이 동원되어 공사가 진행된다. 이로인해 인부들에게 먹일 쌀 74말을 지출하였다. 16일에는 묘역에 쓰일 석물인 망주석 두 개와 상석 빗돌을 옮겨와 묘소 앞까지 끌어 올린다.
 
유희춘은 해배후 관직에 복귀한 뒤 해남을 찾아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역에 참배하고 묘역을 정비한다. 유계린의 묘는 해남 모목동에 있었으나 1972년 담양 대덕면 비차마을 유희춘 묘역인근으로 이장하였다.
▲ 유희춘의 아버지 유계린의 묘 유희춘은 해배후 관직에 복귀한 뒤 해남을 찾아 돌아가신 부모님의 묘역에 참배하고 묘역을 정비한다. 유계린의 묘는 해남 모목동에 있었으나 1972년 담양 대덕면 비차마을 유희춘 묘역인근으로 이장하였다.
ⓒ 정윤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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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희춘 부모의 묘역 공사는 18일까지 거의 끝낸 듯하다. 19일 선산에 제사 지내기 위해 모목동으로 가 보았더니 연못이 저수를 할 만큼 되어 기뻐하였다. 유희춘은 20일 부모님 묘소에 제사를 드리고 먼저 죽은 형 유성춘까지 제사를 지낸다. 그리고 21일 해남을 떠나온다. 그가 떠나는 날 향중의 선비들이 모두 모여 유희춘을 전송하였다.

유희춘이 해남의 부모 묘역을 조성하는 것을 보면 이 시기 조상숭배 사상이 얼마나 뿌리깊게 내려지고 있나를 살펴볼 수 있다. 이러한 봉제사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으니 당시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알 수 있다.

미암의 아버지 유계린의 묘는 해남의 진산인 금강산 아래 마산면 모목동(牟木洞)에 있었으나 지난 1972년 이장하여 담양군 대덕면 비차마을 유희춘의 묘가 있는 곳에 묻혀 있다. 유희춘의 형 유성춘의 묘도 지난 1952년 이장하여 현재 장성군 장성읍 령천리(鈴泉里)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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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저서로 '해남윤씨가의 간척과 도서경영' <민속원> 2012년, '녹우당'<열화당> 2015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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