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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어야 하는가, 자야 하는가, 싸야 하는가처럼 여겨지는 써야하는가, 라는 질문에 답하려 백색의 한글 파일을 연다. 본능과 같아 이유가 불필요한 이 일에 가담되려니, 조금 막막하여 ㄷ[디귿] 누르고 지우기를 반복한다. 안 써질 때면 나오는 습관이다. 나의 집이란 존재는 낮고 좁아 먼 산은 보이지 않는다. 코앞에 보이는 엄한 벽 한 번 쳐다보고, 다시 ㄷ[디귿]누르기를 반복한다.

마음 같아선 "먹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를 삶의 화두에 올리시나요?" 하고 되물으며, 깨달음 주는 것으로 한 꼭지 무마하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책이 되지 않을 것이고, 그 말은 되묻기를 통해 깨달음조차 전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비저블한 마음의 언어를 비저블한 소통의 언어로서 전달해야 하는 사명감이 있다. 그러나 책을 쓸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나는 뭐더러(무엇하러) 목차를 줄 세워가며 질문을 만들고 여러분에게 답해야 할 의무를 느끼는 건지.
 
흠.
 흠.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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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의식이 쓰도록 하는 동안 자그마치 20분이 흘러가 있다. 시간을 때우는 일은 꼭 잡담에만 해당되는 건 아니라, 쓰는 내게도 도움이 된다. 반 페이지 정도는 잡글로 채웠다. 나머지 두 페이지만 쓰면 된다. 그러니까 나머지 두 페이지에 걸쳐 나는 써야하는가에 대한 나만의 사유를 풀어볼 셈이다.

이토록 흰 바탕에 검정 글자 채우기를 먹먹해 하며, 나는 오늘도 쓴다. 물론 써야하는 당신과 다르지 않은 이유로. 바람으로. 다만 광의의 다수의 이가 읽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에 당신보다 잦게, 더 많이, 학구열을 가지고 쓴다는 것은 조금 달랐지만 어쨌거나, 쓴다.

얼마 전 투자쪽 종사자인 지인에게 이런 말을 들었다.

"글은 모든 것의 시작이에요. 컨텐츠도 결국 시작은 글인 거죠."

그날 저녁, 비건 커리와 맥주 모두 그에게 얻어먹었는데 건네받은 응원에 밥값은 내가 내야 했다고 후회했다. 말 한 마디에 죽을 때까지 써내려 갈 동력을 얻은 듯했기 때문이다. 웅장해 보이는 성도 결국 글 없이는 이룰 수 없다는, 글이 토대라는 사실을 콕 집어 주어 그랬고, 그것은 메시지로 느껴졌다.

한 투자전문가로부터 들은 이 소식을 글로 남겨 '너얼리'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가 말한 '컨텐츠'를 쏙 빼어도 문장엔 오류가 없으니 그걸로 충분했다. 결국 시작은 글이라는 것 말이다. 왜 써야 하는지에 대한 마땅한 이유를 듣는다.

"선생님, 글 쓰면 자기치유가 된다면서요?"
"저는 제가 궁금해요. 저를 알기 위한 글을 써보고 싶어요. 어떻게 하면 되죠?"
"쓰면 생각이 정리된다고 해서요."
"쓰면 삶이 바뀐다면서요? 책 내면 대박난다던데."
"OO이가 블로그에 꾸준히 포스팅하며 수익화 하고 있더라고요. 글 쓰면 돈이 된다고."


애초에 내가 쓰기 시작했던 요소완 전혀 다른 방점으로 써야 하는 '이유'를 달고 온다. 어디서 들은 게 분명하다. 누군가 설파했을 거라는 짐작을 한다. 그러니 쓰세요, 혹은 쓰시죠, 라고. 요목조목 정리된 하나부터 열 가지 이유로 그들 손놀림을 자아낼 마중을 한다.

납득 된 그들은 쓸 준비를 한다. 혹 하는 마음에, 가장 마음에 드는 이유 하나를 골라 쓸까를 고민한다. 그렇담 나도 한 번, 이라는 욕구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나 쓰기에 가담시키기 위한 설득의 수단으로써 '왜'를 만든 것뿐이라는 의심은 어디에도 없다. 누구도 쓰며 사는 일을 당연함으로 여기지 않는 눈치다.

그리고 이유가 사라지면 쓸 원동을 잃는다. 해보니 별다른 소득이 없어도 그렇게 된다. 치유가 되지 않고, 여전히 나는 나를 모르고, 복잡한 생각은 정리 될 기미가 없고, 책 내고(글 쓰고) 경제적 자유는 무슨. 그렇게 쓰기를 잊는다. 마땅한 이유가 나를 찾아 올 때까지. 영영.

영영이 될 수도 있는 건 그러다(쓰지 않다가) 큰 코 다친다는 말은 듣도 못해서다. 쓰지 않으면 큰일 날 일은 사실 생각만큼 없다. 굶어 죽지 않고, 감옥에 끌려가지 않는다. 쓰지 않고도 100억 자산가가 될 수 있고(쓰는 인류였다면 1,000억 자산가로 불리웠을지 모르지만), 질병으로 고통 받을 일도 없다. 안 써도 되는 이유가 쓰면 좋은 이유보다 많을지 모른다.

허나 이 씨름(쓰면 좋데 vs 안 써도 잘만 살아)은 써야 한다는 대명제 앞에 무쓸모가 되어버린다. 글은 모든 것의 토대이므로 종국엔 '써야한다'만 남는다. 뿌리로 돌아가 우리는 쓰기라는 삶의 수단이자 무기를 장착하고 있음부터 알아야 한다. 소통과 기록의 수단이자 나를 (건강히) 살게 하는 무기라는 것 말이다. 그러라고 쓰기가 있는 거고, 그래서 써야하는 것이다. 애초에 소통의 쓰기는 익숙한 우리였다.

만 하루에도 주고받은 메신저는 수백 개에 달하고, '업무에 수고 많으십니다'로 시작해 '감사합니다'로 마무리 짓는 업무용 이메일은 수십에 이른다. 이것은 기록이 되기도 한다. 말이었다면 곧장 발화했을 것을 글로 잡아 단단히 붙들어 놓는다. 필요하면 꺼내 보고, 먼 시간이 흘러 내가 없어도 내가 남아 이야기 할 수 있도록 한다. 시공간을 넘어 소통하게 하는 것도 결국 기록이다. 쓰기다.

한편 살게 하는 글쓰기란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쓰는 건 어쩌면, <시지프 신화>에 나오는 시지프의 형벌처럼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한없이 위로 굴러 올려야 하는 것과 같은 우리 인생을 버티게 하는 내적 힘 아닐까 하고. 그 힘으로써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아닐까 하고. 쓰는 능력을 갖춘 우리에게 말이다. 적절한 배출은 우리를 고이지 않게 하고 흐르도록 한다.

고이도록 놔두어 썩는 줄도 모르는 우리 가슴을, 씀으로써, 배출함으로써 새 물줄기가 내게 흐르도록 하는 일이다. 짧지만 밀도 있게 쓰며 그렇게 믿어왔다. 이따금 이런 생각마저 들었다. 신이 있다면, 신은 인간에게 버틸거리 하나쯤 숨겨 두었다고. 죽도록 놔두지만은 않았다고. 그건 글쓰기라고 말이다.​

일어났으니 자야하고, 잤으니 일어나는 것.
먹었으니 싸고, 쌌으니 (다시)먹는 것.
경험과 생각과 지식이 쌓였으니, 푸는 것. 쓰는 것.
살아 숨 쉬며 하는 몸의 행위, 감각 모두 시시때때로 쌓이고 있으니 풀어야 하는 것.

자꾸 고민하는 '쓰면 좋대'와 '안 써도 잘만 살아'의 경계는, 쓰기의 어려움에서 유발 된 것일 테다. 두려움 때문일 테다. 허나 써야 한다는 당위 앞에 두려움은 작아지기 마련. 실은 해보지 않은 일이라 익숙하지 않다는 그뿐이라는 것마저 알게 된다면 더욱. 쓰다 보니 꼬박 세 페이지나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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