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용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 감독(오른쪽)

신태용 인도네시아 축구대표팀 감독(오른쪽) ⓒ AP/연합뉴스

 
'동남아의 월드컵' 스즈키컵을 누비고 있는 한국인 지도자들의 명암이 엇갈렸다. 신태용 감독이 이끄는 인도네시아는 25일 싱가포르와의 2020 아세안축구연맹(AFF) 챔피언십 준결승 2차전서 연장 혈투 끝에 4-2로 승리하며 결승 진출에 성공했다. 지난 1차전서 1-1로 비겼던 인도네시아는 1, 2차전 합계 점수에서 5-3으로 싱가포르를 제쳤다.
 
인도네시아 스즈키컵 결승에 오른 것은 2016년 이후 5년 만이다. 인도네시아는 역대 스즈키컵에서 준우승만 5차례 차지했으나 우승 기록은 아직 없다. 대회 결승에서 우승을 다툴 상대는 태국이다.
 
한편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은 대회 2연패에 도전했으나 라이벌 태국의 벽을 넘지 못하고 4강에서 탈락했다. 베트남은 26일(한국시간) 싱가포르 국립 경기장에서 열린 준결승 2차전에서 0-0으로 비겼다. 이로서 베트남은 지난 1차전 0-2 패배를 극복하지 못해 두 대회 연속 결승 진출에는 실패했다.
 
신태용 감독은 인도네시아에서 지도자 인생의 또다른 전성기를 꽃피우고 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약체로 꼽히는 인도네시아는 지난 대회에서 조별리그 탈락했던 팀이다. 하지만 신태용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이번 대회에서는 확 달라진 모습으로 결승행까지 성공하며 돌풍을 일으켰다. 현지에서는 신태용 매직에 열광하고 있다.
 
신 감독은 프로축구 성남FC, U-20 월드컵대표팀, 2016 리우올림픽 대표팀, 2018 러시아월드컵 A대표팀 감독 등을 거쳐 지난 2019년 12월 인도네시아의 지휘봉을 잡았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 제패, 올림픽 8강, 카잔의 기적(러시아월드컵 독일전 승리) 등 대한민국 지도자로서 최고 수준의 업적을 세운 신 감독이 굳이 축구계 주류가 아닌 인도네시아 대표팀을 맞는 게 커리어의 위상에 맞지 않는다는 시선도 있었다.
 
신 감독은 A대표팀은 물론 20세와 23세 이하 연령대별 대표팀 감독까지 총괄하며 인도네시아 축구 체질 개선에 나섰다. 2023년 U-20 월드컵을 유치한 인도네시아는 클럽과 대표팀을 넘나들며 성인 월드컵을 비롯한 최상위권 대회를 두루 경험한 신 감독의 풍부한 경험에 큰 기대를 걸었다. 시작부터 순탄하지는 않았다. 신 감독은 지원 약속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은 인도네시아 축구협회와 갈등을 빚기도 했고, 같은 한국인 사령탑인 박항서 감독과의 맞대결에서 대패하기도 했다. 신 감독이 코로나 19 확진 판정을 받는 등 우여곡절도 겪었다.
 
하지만 신 감독은 한국 대표팀 시절에도 그랬듯이 우직하게 자신의 소신과 비전을 밀어붙였다. 신 감독은 꾸준한 선수 점검과 전지훈련을 통해 인도네시아 축구의 성장세를 이끌었다. 이번 스즈키컵에서는 젊은 선수들 위주의 세대교체와 체력 향상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스피드-압박축구가 효과를 발휘하며 결승까지 올랐다. 인도네시아는 이번 대회에서 18골을 폭발시키며 최다골을 기록 중이다. 신 감독 특유의 예측불가능한 전술 변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극장골 승부도 한국 축구 팬들에게는 친숙한 모습이다.

인도네시아 현지 언론은 자국 대표팀의 스즈키컵 결승 진출을 '신태용 감독이 인도네시아 국민들에게 선사한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설명하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내친 김에 신태용호가 결승전(1차전은 12월 29일, 2차전은 1월 1일)에서 태국을 꺾고 사상 첫 우승까지 차지한다면 신태용 감독은 인도네시아 축구의 레전드로 등극하게 된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에서 그랬던 것처럼, 신 감독은 동남아에 또다른 '축구 한류'를 일으키는 주역으로 등극했다.
 
'원조 축구 전도사'인 박항서 감독도 비록 대회 2연패에는 실패했지만 디펜딩 챔피언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성과를 남겼다. 박항서 체제에서 몇 년간 급격히 성장한 베트남은 이번 스즈키컵에서 명실공히 최강팀으로 인정 받았다.

베트남은 조별 예선을 3승 1무(승점 10)로 승점 동률을 이루고도 인도네시아에 다득점에서 4골 뒤져 조 1위 자리를 내줬다. 준결승 2차전까지 5경기 동안 조별예선 포함 총 4경기에서 무실점을 기록했다. 최다득점팀인 신태용 감독의 인도네시아도 유일하게 베트남에게만 골망을 가르기는커녕 단 한 개의 슈팅도 기록하지 못했고, 점유율에서는 압도적으로 베트남의 우위였다. 박 감독은 태국을 넘지 못하고 아쉽게 탈락한 이후에도 "베트남이 계속 최고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동남아에서는 어떤 팀과 맞붙어도 자신 있다"며 끝까지 당당한 모습을 잃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박항서 신화가 이제 슬슬 정점에서 내려오는 시점이 되었다는 우려도 나온다.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지휘봉을 잡은 이후 U-23 챔피언십 준우승, 스즈키컵 우승, 아시안게임 4강, 사상 첫 월드컵 최종예선 진출 등 숱한 업적을 이뤄냈다. 박 감독은 베트남을 이끌고 연령대별과 A팀까지 출전할 수 있는 모든 대회를 소화했다. 이제부터는 모두 경험했던 대회의 반복인 셈이고, 과거의 눈부신 성적은 그만큼 높아진 기대치가 되어 앞으로의 박항서 감독에게는 '잘해야 본전'이라는 부담으로 작용할 수밖에 없다.
 
 아쉬워하는 박항서 감독

아쉬워하는 박항서 감독 ⓒ AFP/연합뉴스

 
베트남은 사상 첫 월드컵 최종예선에서 전패를 기록하며 아시아 축구 주류의 높은 벽을 체험하고 있다. 여기에 대회 2연패를 기대했던 스즈키컵마저 아쉽게 탈락하며 실망하는 반응이 적지 않다. 베트남 언론에서는 비록 일부이긴 하지만 박항서 감독의 용병술에 아쉬움을 드러내는 지적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장기 집권에 따른 매너리즘과 높아진 대중의 눈높이는 박항서 감독이 극복해야 할 숙제다.
 
한편으로 이번 스즈키컵은 동남아 축구의 빛과 그림자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아직은 아시아 축구의 변방으로 꼽히는 동남아 국가들에게 스즈키컵은 자존심이 걸린 가장 중요한 국가대항전 중 하나로 꼽힌다. 대회에 임하는 선수단과 팬들의 치열한 열기 하나만큼은 월드컵 부럽지 않다.
 
하지만 그 뜨거운 열정에 비하여 전반적인 대회 수준이나 경기 운영은 아직 아쉬운 정도다. 우승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한 4강전은 경기가 과열되면서 거칠고 폭력적인 플레이가 난무하는가 하면, 심판의 미숙한 판정과 경기운영, 비디오 판독의 부재 등으로 수많은 문제를 일으켰다.
 
현대축구에서 당연한 선수보호나 동업자 의식, 심판 판정의 투명성과 공정성같은 상식이 실종된 무대는 왜 동남아 축구가 이렇게 뜨거운 인기와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축구 변방으로 머무를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극명하게 보여준 무대이기도 했다. 특히 심판 판정과 비매너 플레이의 최대 피해자 중 하나가 됐던 베트남의 박항서 감독은 울분을 애써 삭히는 모습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안타까움을 자아냈다.

한국축구의 명예를 걸고 해외무대에서 최선을 다하는 한국 지도자들의 열정이 경기 외적인 요인으로 피해를 보는 일은 더 이상 없어야 한다. 아시아 축구 전체의 동반 성장을 위해서도 사라져야할 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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