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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중 하나인 차이나타운 조계지 계단 옆에는 청나라풍의 이국적인 중국가옥이 자리한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색 벽돌에 청록색 문이 조화를 이룬 고풍스런 가옥이다.
 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중 하나인 차이나타운 조계지 계단 옆에는 청나라풍의 이국적인 중국가옥이 자리한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색 벽돌에 청록색 문이 조화를 이룬 고풍스런 가옥이다.
ⓒ 이덕재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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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대표적인 관광지 중 하나인 차이나타운 조계지 계단 옆에는 청나라풍의 이국적인 중국가옥이 자리한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붉은색 벽돌에 청록색 문이 조화를 이룬 고풍스런 가옥이다.

이 주택은 차이나타운에서 연조가 가장 오래된 건물로 알려져 있으며 건축연도는 1894년~1904년 사이로 추정된다. 대략 120년 정도 된 셈이다. 건축전문가들은 이집을 서양건축이 가미된 '양루(洋樓)'로 보았다.​​

오랫동안 차이나타운과 화교들을 취재하면서 이 집 근처를 늘 지나다녔다. 집을 지켜보면서 어떤 사람들이 살았는지 궁금했었다. 화교들도 자세히 아는 사람은 없었다. 이 집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화교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그 딸은 대만에 거주하며 1년에 한 번 외국인거류신고 때문에 인천에 온다는 소식만 알 수 있었다. 이 집의 내력을 알고 싶어 몇 년간 할머니의 딸과 만날 날을 기다렸다. 올해 여름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전서경집 이야기는 딸과의 인터뷰를 토대로 작성했고, 집 내부는 볼 수 없었다. 집 안을 외부인에게 보여주는 것은 금기처럼 보였다.

차이나타운에 사는 화교들은 이 집을 '상해할머니집' 또는 '국할머니집'으로 부른다. 상해할머니의 이름은 화교 전서경(錢瑞慶, 2019년 작고)이다.

전서경의 아버지 전신인(錢信仁)은 중국 상해에서 인천으로 온 양복기술자였다. 전서경의 딸에 의하면 외할아버지는 인천에 사업차 왔고, 당시 중국에서는 외국으로 나가는 게 유행이었다고 한다. 인천에는 외할아버지가 맨 먼저 왔고, 그 다음에 할머니, 외삼촌들, 이모와 어머니가 뒤따라 왔다.

외할아버지는 신문물을 익힌 엘리트이자 자산가였다. 전신인은 이 집 1층에 순태양복점(順泰西服店)을 열었다. 1층은 양복점이었고, 2층은 살림집이었다. 전신인은 솜씨좋은 양복재단사로 이름을 알리면서 돈을 많이 벌었다. 순태양복점 간판은 1943년 사진에서 발견된다.

6.25 전쟁, 외할아버지의 죽음... 곳곳에 남은 근현대사의 상처
 
1943년도 전서경가옥의 모습. 집 앞에 '순태양복상점'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1943년도 전서경가옥의 모습. 집 앞에 "순태양복상점"이라는 간판이 걸려있다.
ⓒ 아이-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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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경의 아버지 전신인은 중국 상해에서 건너온 양복기술자였다. 그는 솜씨 좋은 재단사로 널리 알려져 양복점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전서경의 아버지 전신인은 중국 상해에서 건너온 양복기술자였다. 그는 솜씨 좋은 재단사로 널리 알려져 양복점을 통해 많은 재산을 모았다.
ⓒ 이덕재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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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서경의 딸에 따르면 외할아버지는 어머니가 살았던 집부터 조계지계단 끝까지, 짜장면박물관 맞은편의 상당한 부분 등 차이나타운 내 많은 땅을 소유했었다고 전했다. 전신인의 그 많던 재산은 아들이 사업을 하면서 하나둘 팔았다. 전서인에게는 아들 2명, 딸 2명의 자식이 있었다.

전신인이 운영했던 순태양복점은 직원을 여러명 둔 꽤 큰 양복점이었다. 양복점은 전용 주방장을 두고 직원들의 식사를 챙길 정도로 직원이 많았다. 외할아버지는 양복 정장, 조끼, 셔츠 등을 맞춤으로 제작했다.​

외할아버지와 관련한 일화도 전했다. 일제 때 일본인이 일본칼을 들고 이 양복점을 강탈하려고 난동을 부린 적이 있었는데 할아버지께서 최고급 실크로 셔츠를 만들어 주니 실크셔츠에 굉장히 흡족해 하며 돌아간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전서경 집은 6.25 전쟁 당시 폭격으로 상당한 피해를 입었다. 당시 미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면서 인천일대에 엄청난 폭탄을 투하했고, 전서경의 집도 이때 폭격을 받아 지붕의 반이 날아가는 비극을 겪었다. 이때 참혹한 현장을 보여주는 사진도 남아 있다.

집안의 우환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폭격으로 인해 전서경의 언니가 집안에서 사망하는 사고를 당했고, 이에 놀란 가족들은 더 이상 인천에 남아 있을 수 없어 부랴부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다. 피난지에서도 가족에게 불운이 잇따랐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지 얼마 돼지 않아 외할아버지 전신인도 이 세상을 뜨는 슬픔을 맞았다.

6.25 전쟁 중에 외할아버지 전신인이 사망하자 고급 양복기술은 뚝 끊겼다.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업을 잇지 않았다. 큰 외삼촌은 인천에서 사망했고, 둘째 외삼촌은 중국으로 들어간 뒤 중국이 공산화되자 인천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집은 청나라풍의 이색적이고 독특한 가옥 모습 덕분에 1950~1970년대 영화촬영의 배경이 됐다. 주로 인천 관련 내용이나 역사물의 배경컷이었다.​

영화촬영으로 불행한 일도 벌어졌다. 영화컷 중 장례식을 촬영한 장면이 있었는데 그 영화 이후 편찮았던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일이 발생했다. 그 사건을 계기로 이 집에서 카메라는 금기의 단어가 됐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카메라 노출을 싫어하는 계기가 됐다는 게 딸의 이야기다.​
 
1950년대 초 차이나타운 모습. 전서경 가옥의 지붕이 폭격을 맞아 뻥 뚫려 있다.
 1950년대 초 차이나타운 모습. 전서경 가옥의 지붕이 폭격을 맞아 뻥 뚫려 있다.
ⓒ 손장원 인천 재능대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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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서경 가옥의 지붕은 원래 기와였다. 전쟁으로 폭격을 맞은 이후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전서경 가옥의 지붕은 원래 기와였다. 전쟁으로 폭격을 맞은 이후 슬레이트로 바뀌었다.
ⓒ 이덕재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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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지만 화교사회와 가까워지지 못한 전서경 집안
 

상해할머니 전서경은 기독교 신자였다. 당시 중국인들에게 기독교는 흔치 않았다. 원래는 천주교해안성당을 다녔고 나중에는 기독교로 바꿔 인천기독중화교회 신자로 활동했다. 전서경이 다녔던 천주교해안성당은 원래 화교 천주교 신자들을 위해 설립됐던 성당이었지만 화교신자들이 감소하고 한국인 신자들이 늘자 한국인들을 위한 해안성당으로 바뀐 사연을 갖고 있다.

전서경의 딸에 따르면, 어머니 전서경은 중국 상해 출신이었지만 아버지는 산둥사람이었다. 딸은 부모로부터 엄격한 중국식 교육을 받았다. 김치는 전혀 먹지 않았고, 매운 것도 먹지 못했다. 집에서 한국말을 하면 아버지에게 무척 혼이 났다고 한다.

집에는 식사와 청소를 하는 도우미가 있어 어머니는 살림을 하지 않았다. 대신 산둥 출신의 아버지가 중국음식을 잘 만들었다고 전한다. 아버지는 산둥식 빵인 '빠바'와 맛탕을 딸에게 만들어주었다.

전서경의 남편인 국진원(鞠振遠)은 일제 강점기 인천의 최대 화교 무역상이었던 만취동(萬聚東)의 최대주주이자 경영자였고, 인천화교협회 이사로도 활동한 인물이다.

전서경의 가족은 인천 화교사회와 가깝게 지내지는 못했다. 인천화교 대부분이 산둥 출신인 반면 이들 가족은 중국 남쪽 상해에서 왔기에 말이 통하지 않았고 문화가 달랐다. 또 전신인은 상당한 재력을 갖췄고 생활수준도 높았기에 화교들의 질시를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집은 예전에 건축한 상태에서 거의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는 1년에 한 번씩 집수리를 했고, 지금은 자신이 인천에 올 때마다 부서지거나 망가진 곳을 찾아 고치고 있다.

전서경의 집은 벽돌과 나무로 건축된 중국 가옥이다. 1층 방에는 중국식 구들인 칸토우가 있었는데 어머니가 아프자 편리한 생활을 위해 구들을 들어내는 수리를 했다고 한다. 올 여름에도 그녀는 집의 굴뚝을 수선하고 있었다. 집은 1, 2층 합쳐 원룸식 방이 5개, 부엌 1개가 있고 집 뒤쪽에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창고가 있는 구조다.
 
전서경 가옥은 1894~1904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집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 보존돼 있다.
 전서경 가옥은 1894~1904년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집의 모습은 옛날 그대로 보존돼 있다.
ⓒ 이덕재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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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안한 집으로 남기를 바라는 마음

전서경의 딸에 따르면 예전에 중구청으로부터 집을 등록문화재로 지정하자는 요청을 여러 번 받은 적이 있는데 어머니가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 집에서 평생을 살았기에 편안하고 자유롭게 지내기를 원했다고 밝혔다.

어머니는 이 집에 굉장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대만에서 와병 중에도 항상 인천의 집을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딸도 어머니의 생각과 같았다. 지금은 대만에 거주하고 있지만 퇴직 후 부모님의 체취가 묻어 있는 이곳에 언제든지 편하게 찾아오고 싶다는 바람을 밝혔다.​

전서경의 딸은 사람들로 인해 매우 불편했던 기억도 갖고 있다. 사람들은 특색 있고 이국적인 집에 단순히 호기심과 관심을 갖는 걸 넘어, 살림집을 창문으로 원숭이 구경하듯이 들여다보고 문을 아무 때나 두드렸다. 심지어 들어오려는 사람들 때문에 괴로웠던 적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참 예의가 없었다"고 했다.

전서경 가옥 1층에서 가게를 했던 화교 왕청덕(王靑德)씨는 전서경에 대해 '매우 예의바르셨지만 고집도 있던 사람'으로 기억했다. 다른 사람이 주는 물건은 절대 받지 않았지만 사람 따듯하게 대했던 분으로 추억했다.

전서경 가옥은 도도하지만 외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인천 차이나타운 내 중국전통 가옥들이 하나둘 허물어질 때도 꿋꿋이 전통을 지켜왔지만, 고집스레 지켜왔던 역사와 전통 때문에 깊은 외로움과 상처를 간직한 듯 느껴진다.

글 이용남 i-View 편집위원, 사진 이덕재 자유사진가
 
전서경 가옥은 도도하지만 외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인천 차이나타운내 중국전통 가옥들이 하나둘 허물어 질 때도 꿋꿋이 전통을 지켜왔지만 고집스레 지켜왔던 역사와 전통 때문에 깊은 외로움과 상처를 간직한 듯 느껴진다.
 전서경 가옥은 도도하지만 외로운 사람처럼 보인다. 인천 차이나타운내 중국전통 가옥들이 하나둘 허물어 질 때도 꿋꿋이 전통을 지켜왔지만 고집스레 지켜왔던 역사와 전통 때문에 깊은 외로움과 상처를 간직한 듯 느껴진다.
ⓒ 이덕재 자유사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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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천시 인터넷신문 'i-View'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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