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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뒤라스의 말> 앞표지
 책 <뒤라스의 말> 앞표지
ⓒ 마음산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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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에서 피력된 주저하지 않는 '말하기'는 당혹스러울 만큼 솔직했다. 열여섯 소녀의 가난과 고립, 이로 인한 수치심과 애정결핍 그리고 마침내 성에 대한 욕망과 내밀한 경험까지, 어떻게 이렇게 생생히 그리고 담담히 써 내려갈 수 있을까? 이런 고백은 용기일까 아니면 광기일까.
 
소설 <연인>의 작가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알게 된 건, 1992년 개봉(2017년 재개봉)했던 영화 <연인>을 통해서였다. 당시는 이 영화가 원작에 바탕한 영화이고, 원작자가 꽤 저명한 여성 작가라는 정도를 알고 있었다. 어떤 이는 이 영화를 보고 아름답다거나 사랑에 관한 영화라고 했는데,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화를 본 내 지배적인 감정은 불쾌함이었기 때문이다.
 
불쾌감을 자아낸 감정의 근간은 이랬다. 아직 소녀티가 역력한 여자아이를 띠동갑도 훨씬 넘어 보이는 나이 든 남자가 탐한다는 것이 역겨웠다. 소녀를 탐한 것이 맘에 걸린 남자의 보잘것없는 양심은,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것이 명백하게 드러난 소녀의 알몸 앞에서, "아직 너무 어려"라며 잠시 주춤하지만, 섹스를 재촉하는 소녀에게 쉽게 무너진다.
 
성에 눈뜨는 소녀의 욕망을 그린 콘텐츠 자체가 불쾌하거나 이를 이해하는 것이 불가해한 일은 아니다. 문제는 영화가 단지 섹스하는 소녀의 몸만을 관음했을 뿐, 소녀의 욕망 근원을 탐색하는 데 무능함으로써, 포르노 이상의 가치를 담지하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소녀의 성과 백인 인종성을 이용하는 엄마와 가족이 보이는 교활함과 비루함은 섹스의 불쾌함을 초과하는 타격이었다. 대체 가족은 무엇이며, 특히 엄마가 딸에게 무엇까지 요구할 수 있는 지를 목도하다 몸서리가 쳐졌다. 불쾌한 기억이 가득한 영화 <연인>을, 아니 어찌 보면 원작자 마르그리트 뒤라스를 다시 이해하게 된 건, 그의 인터뷰 집 <뒤라스의 말>을 읽으면서다.
 
<뒤라스의 말>, 욕망을 말하기
 

마르그리트 뒤라스는 이미 많은 작품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1984년 소설 <연인>으로 공쿠르 상을 수상하며 작가로서 부동의 입지를 다졌다. <뒤라스의 말>은 그의 공쿠르상 수상 이후 이태리 저널리스트 레오폴디나 팔로타 델라 토레가 1987년부터 1989년에 걸쳐 인터뷰한 내용이다.

인터뷰는 그의 생애 전반에 걸친 작품 활동을 중심으로 사회가 내린 판단과 마르그리트 자신이 확보하고 있는 진실 사이를 오가며 생동감 있게 전개된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작품과 작가를 분리하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 그리고 작가란 결국 자신의 이야기에 복무하는 사람이라는 것 그리하여 마침내 독자가 책을 끝냈을 때 끝난 것은 책일 뿐, 책을 쓴 사람의 이야기도, 책을 읽은 사람의 이야기도, 끝나지 않고 삶 속으로 잇대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의 글쓰기를 관통하는 일관됨은 '욕망을 말하기'에 있다. 그는 "인간 존재는 그저 단절된 충동들의 한 묶음일 뿐이에요. 문학은 그 상태 그대로를 복원해야 하죠"라는 주장을 실천하는 글을 썼다.

소녀 시절의 욕망, 사랑받고 싶었지만 결코 채워지지 않던 엄마를 향한 애정의 갈구, 우쭐하고 싶었지만 가난한 백인이 누릴 수 없었던 찌그러진 우월감, 이제 막 망울을 터뜨리려는 몸이 재촉해대는 성을 향한 호기심과 갈망 등이 식민지 베트남이라는 이국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탄생한 것이 바로 <연인>이었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 엄청난 성공을 가져다준 책 <연인>에 대해 저자는 여러 질문을 던진다. <연인>은 내밀한 경험을 다룬 자전적 이야기임을 밝힌 책이기에, 저자는 책을 통해 전달하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와 영화 <연인>에 대한 평가를 묻는다.

그는 "소설은 어둠-내가 유년 시절을 처박아 두었던 어둠-속에서 나왔고 순서도 뒤죽박죽이었"지만 <연인>을 끝낸 후 "어느 정도의 행복감"을 느꼈다고 말한다. 소녀 시절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욕망, "감정을 넘어 비인격적이고 맹목적인" 감정을 표현하고 싶었던 그는, "철저히 모호한 우리 관계에 자극받아 번번이 타오르는 그의 에로티시즘이 좋았"다고 고백한다.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이 원작인 영화 <연인> 스틸컷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소설 <연인>이 원작인 영화 <연인> 스틸컷
ⓒ (주)엔케이컨텐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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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연인>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그의 중요 관심사는 "섹스가 아니라, 에로티시즘의 기원인 욕망"이었으나, 영화 <연인>은 "익숙한 이야기의 형태로" 상투화되어, 욕망은 사라지고 섹스만 남게 되는 결과를 낳았다고 말했다. 영화에 대한 그의 의견을 통해 비로소, 오랫동안 영화 <연인>에 대해 가졌던 내 께름했던 생각이 말끔히 해소됐다.
 
영화는 소녀가 성에 대한 욕망을 실현하고 그 과정에서 희열을 느낀다고 말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듯했다. 관람자인 나는 소녀가 열어젖힌 욕망의 문을 함께 넘어서지 못하고 문고리를 붙잡은 채 망설이고 있었고, 소녀에 비해 턱없이 큰 남자의 압도하는 몸이 작고 얇은 소녀의 몸에 겹쳐지는 것이 끔직해 영화 내내 진저리가 쳐졌으니 말이다.

그때의 불쾌감의 또 다른 뿌리에, 섹스 장면에서 무자비하게 발겨 벗겨져 드러난 아직 채 자라지 않은 메마르고 가난한 소녀의 몸이 가여웠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의 말을 들으며 이해할 수 있었다.

지금, 욕망과 직면한 여성들을 위한 책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개인사와 이와 한 끈에 매달려 있는 그의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 역시 놀라우리만치 솔직하다. 어릴 때 독특한 외모가 준 쑥덕거림과 이로 인한 신경증이 약한 광기를 불러왔던 상황들, 때로 열정이 자기 파괴로 이어지기도 했던 알코올 중독과 중단 그리고 반복, 짧은 동성애 경험, 손자뻘 되는 남자 얀과의 인연과 동거, 끊임없이 써왔던 작품과 작품 속 인물에 대한 견해, 문학에 대한 입장, 그리고 여성으로서의 글쓰기까지, 총 망라된다.
 
2019년 국내에 출간된 그의 에세이집 <물질적 삶>에서도 드러나듯, 강렬하면서도 충격적이었던 욕망 좇기는 알코올 탐닉(중독)이었다. 마흔쯤 늦게 시작한 술은 뜻밖에도 그를 새로운 정신의 지형으로 데려갔다. 과거 현재 미래를 무람없이 시간 여행하게 하는 술의 영토에서 그는 무한한 확장성과 해방감을 경험한다. 그곳에서 한껏 고양된 그는 욕망을 날것 그대로 감각할 수 있었다.

"알코올은 이곳에 없는 '타인'을 대신해 주고, 오래전, 어느 날, 우리 안 깊숙이 팬 구멍을 메워주죠."

술의 영역에서 그는 자기가 오가고자 했던 시공간을 자동 로그인으로 연결하며 그때 누군가에게 다하지 못한 이야기를 쏟아냈을 것이다. 돌아가고 싶은 그때 그 순간에 완벽히 젖어들어 희로애락의 욕망에 푹 빠질 수 있었지만, 강렬함만큼 대가는 혹독했다. 그의 몸이 매우 위태로워졌다. 그리될 줄 알면서도 멈추지 않은 그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자기 파괴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욕망은 늘 잠재된 형태로 삶에 함께 존재했다. 욕망의 근원에 천착한 그에게, 여성이란 지위는 그를 어떤 상태로 위치시켰을까.

"나는 어떤 면에서는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고통을 경험했어요."

정상성의 전범인 결혼제도에 정착하려 했을 때 그는 뭔가 잘못되어간다고 느꼈다. "집에서 나간 남자들의 빈자리가 좋아지기 시작"했고, 남편의 뒷바라지에 열을 올려야 하는 아내의 역할이 심드렁해졌다. 어떤 욕망도 해갈되지 않는 일상과 도돌이표로 반복되는 가사노동 속에, 식탁을 책상으로 바꿔써가며 고작 부엌을 자신의 문학적 산실 삼아야 했던 완고한 현실은 매일 욕망의 광맥을 더듬어 채굴하고 제련하려는 거장에게 지나치게 억압적이었다.
 
저자는 욕망을 탐색하며 살아온 마르그리트 뒤라스에게 페미니스트의 강한 면모를 기대하지만, 페미니즘에 대한 입장은 그의 삶만큼 급진적이지 않다. 성불평등의 최전선에서 여성의 권익을 주창해왔고 실천해 온 그에게 페미니즘은 어떤 신념체계라기보다 그저 삶을 향한 태도였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이 끼진 영향을 그에게 묻는다면, 그보다 앞서 혹은 동시대에 끊임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말하고 쓴 여성들에게 강한 동지애를 느끼는 정신인데, 그가 후대 여성들에게 그런 존재로 우뚝하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페미니즘은 떳떳하지 않을까.

"의식이 있고 정보가 있는 여성은 그 자체로 당연히 정치적인 여성이에요. 자신의 육체를 대표적인 순교지로 만들면서, 게토 속에 틀어박히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말이에요."

마르그리트 뒤라스다운 말이다. 지금도 들끓는 욕망과 직면하고 쓰고 또 쓰고 있을 여성들에게 <뒤라스의 말>을 가만히 전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에도 실립니다.


뒤라스의 말 - 중단된 열정,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하여

마르그리트 뒤라스, 레오폴디나 팔로타 델라 토레 (지은이), 장소미 (옮긴이), 마음산책(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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