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4 17:01최종 업데이트 21.12.25 11:39
  • 본문듣기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16일 오전 서울 여의도 새시대준비위원회 사무실을 나서며 부인 김건희 씨의 '허위 이력' 논란과 관련한 질문을 하는 취재진을 바라보고 있다. ⓒ 공동취재사진

 
승자는 어린아이에게도 사과할 수 있지만, 패자는 노인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못한다.
- J.하비스

미국인 저널리스트 하비스의 말이 새삼 다가온 것은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 때문이다. 부인 김건희씨의 허위경력 의혹이 불거지자 윤 후보는 처음에는 부인했다. "부분적으로는 모르겠지만, 전체적으로는 허위가 아니다"라는 또 하나의 명언을 남기면서. 그 다음에는 역정을 냈다. "제대로 알아보고 보도하라"고. 그러다 김씨가 사과(?)를 하자 한발 물러섰다.
 
여권의 공세가 기획 공세이고 아무리 부당하다 느껴진다고 하더라도 국민의 눈높이와 국민의 기대에서 봤을 때 조금이라도 미흡한 게 있다면 국민들께는 송구한 마음을 갖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대선 후보 부인으로서 과거 처신에 미흡한 점이 있다면 국민 기대에 맞춰 송구한 마음을 갖는 것이 맞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툭하면 정치공작으로 몰아붙이는 윤 후보에게 '기획 공세'의 근거가 뭐냐고 묻는 건 부질없는 짓이리라. 그걸 떠나 이 '사과'의 가장 큰 문제는 자기 사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부인 김씨의 사과를 '객관적'으로 논평했을 뿐이다.

게다가 조건을 달았다. 다들 알다시피 '~한다면' 투의 가정법 사과는 나쁜 사과의 본보기다. 전형적인 회피성 사과다. 그나마 사과 내용도 '잘못'이 아니라 '처신 미흡'이다. 송구하면 송구한 거지, "송구한 마음을 갖는다"는 건 또 뭔가? 아키히토 일왕(日王)의 "통석(痛惜)의 염(念)"도 아니고. 문득 그의 손바닥에 그려진 '왕(王)'자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에 앞선 김씨의 사과도 비슷했다. "사실관계 여부를 떠나 국민께서 불편함과 피로감을 느낄 수 있어 사과드린다"고 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다. 자기한테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국민을 생각해서 사과한다는 뜻이다. 이거 참, '백성을 어엿비(불쌍히) 여겨' 훈민정음을 만든 세종대왕도 아니고...

김씨의 허위경력이 한두 건이 아닌 것으로 드러나면서 여론이 나빠지자 윤 후보는 뒤늦게 "제 아내와 관련된 논란으로 국민분들께 심려를 끼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타이밍을 놓치기는 했지만, 정권교체를 열망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더 고집 부렸다가는 정말 판 뒤집힐 뻔했다. 노회한 김종인 총괄선거대책위원장의 말마따나 사과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의 배우자 김건희씨 ⓒ 연합뉴스


리플리 증후군으로까지 보이는 김씨의 '거짓 인생' 논란과 별개로, "죄송하다"는 표현이 나온 이후 윤 후보 사과 논란은 일단 가라앉은 듯하다. 그런데 나는 이번 소동을 간단하게 보지 않는다. 전에도 느낀 바지만, '검찰공화국 대선후보' 윤석열의 윤리의식에 심각한 결함이 있음을 새삼 확인했기 때문이다.  

'검찰공화국 대선후보'의 윤리의식

'검찰공화국 후보'라고 부르는 이유는 우리나라 검찰이 정부 내 별도의 공화국처럼 존재하고, 그의 삶의 기반이 바로 검찰이기 때문이다. 그가 공정과 상식의 기치를 내건 것도 검사 경력 덕분이다. 국민의힘 선대위에 검사 출신이 10여 명이나 포진한 것도 그 방증이다.

세계적으로 손꼽힐 정도로 검찰권력이 막강한 우리나라에서 검사는 단순히 행정부 공무원이 아니라, 국민의 생사여탈권을 쥔 권력자이자 지배자다. 검사에게 모든 국민은 잠재적 피의자다. 피의자에게 검사는 하늘같은 존재다. 범죄를 처벌할 수도 있고 봐줄 수도 있다. 죄를 찾아내고(수사권) 재판에 넘기는 권한(기소권)으로 국민 위에 군림한다. 이른바 단죄권력이다.

윤 후보는 그런 단죄권력을 평생 누린 사람이다. 단죄권력은 절제와 겸손이 따르지 않으면 오만해지고 무도해지기 쉽다. 심판자는 우월하고 예외적이고 모호한 존재다. 사과 따위는 하찮은 피의자나 하는 거다. 검사 사전에 사과란 없다. 우월감과 선민의식의 발로다.

그러다 보니 '내로남불'에 둔감하다. 검사 출신 이연주 변호사가 폭로했듯이, 낮에는 성매매 범죄자들을 잡아다 조사하고 밤에는 고급 술집에서 성 접대를 받는 이중생활이 가능한 이유다. 수사 대상자한테 룸살롱에서 술 접대를 받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이유다. 

라임사태 때 수사 대상 기업인과 현직 검사 세 사람의 술자리를 주선한 사람은 윤 후보와의 친분설이 제기된 검사 출신 이주형 변호사다. 당시 검찰총장이던 윤 후보는 국정감사장에서 검사들이 접대 받은 의혹이 제기되자 사과 용의를 밝혔다. "수사결과가 나오면 필요한 조치를 하고, 국민께 사과드릴 일이 있으면 사과하겠다"고. 하지만 이후 총장직을 내던지고 대선후보가 된 지금까지 그 문제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사과할 일이 아니라고 여기거나 국민을 우습게 아는 거다. 달리 해석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윤 후보는 그의 장모 최은순씨에 대해 갖가지 비리 의혹이 쏟아질 때 측근 의원을 통해 "우리 장모는 누구한테 10원 한 장 피해준 적이 없다"며 적극적으로 감쌌다. 그런데 최씨가 불법 요양병원 관련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 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되자 정의의 수호신처럼 말했다. "법 적용에 누구나 예외가 없다"고. 옳은 얘기지만, 전형적인 유체이탈 화법이자 논점일탈 오류다. 이런 경우 사과부터 하는 게 도리이자 상식이다. 그런데 남 일처럼 말한다. 더욱이 누구처럼 장관 후보자도 아니고 대선후보가 말이다.

고발사주 의혹 사건 때도 사과하지 않았다. 직제상 총장한테 보고하지 않거나 지시를 받지 않고는 업무를 수행하기 어려운 자리에 있던 검사(손준성)가 막 검사를 그만두고 총선에 출마한 사람(김웅)과 공모해 야당에 총장 부인의 명예를 훼손한 정치인, 언론인 등에 대한 고발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나왔는데도, "모르는 일"이라고만 했다. 언론 보도를 여권 공작이라고 주장하면서. 그런데 재임 중 자신이 직접 지휘하던 검찰 간부가 연루된 비리라면 사과부터 하는 게 도리이지 않을까? 믿기지 않지만, 설사 상관의 뜻과 무관한 부하직원의 일탈이라 쳐도 도의적 책임을 지고 사과하는 게 자연스럽지 않나? 이른바 지휘책임이다.
 

고개숙인 윤석열 국민의힘 윤석열 대선 후보가 17일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배우자 김건희씨를 둘러싼 각종 논란과 관련해 “국민 여러분께 심려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사과한 뒤 고개숙여 인사하고 있다. ⓒ 남소연


다른 검사들도 마찬가지

사과하지 않는 건 김웅 의원이나 손준성 검사도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유력한 증거 앞에서도 발뺌하거나 모른다거나 기억나지 않는다는 둥 법률가답지 않은 변명을 늘어놓기에 바빴다. 법적 방어권이야 국민 누구에게나 있으니 그렇다 쳐도 일단 형식적인 사과라도 하는 게 공무원의 도리이지 않나? 하다못해 "사실 여부를 떠나 국민께 불편함과 피로감을 끼쳐 죄송하다"는 김건희식 사과라도.

하긴 룸살롱에서 접대 받은 사실을 처음에는 부인하다가 뒤늦게 인정한 검사들도 사과하지 않았으니 두 사람만 뭐라 할 일도 아니다. 그들의 휴대전화는 검찰 수사가 시작되자 일제히 사라졌다. 갑자기 잃어버리거나 깨졌다고 했다. 보안 문제로 바꿨다는 사람도 있었다. 앞으로 검찰 조사를 받는 일반인이 그렇게 하면 뭐라 할지 궁금하다.

후배 검사를 상습적으로 폭행해 자살에 이르게 한 김대현 전 부장검사. 그에게 징역 1년 실형을 선고한 1심 재판부는 "잘못을 인정하거나 피해자에게 미안하다고 표현하지 않았고, 가족에게도 진심 어린 사과를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질타했다. 그는 "사과할 마음이 없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검사의 사과가 '하늘의 별 따기'라는 건 10월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도 확인됐다. 국정원 간첩 조작사건의 피해자인 탈북자 유우성씨를 보복 기소했다는 의심을 받은 이두봉 인천지검장은 의원들의 사과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 10월 대법원의 공소기각 판결로 기소 자체가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는데도 그는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윤석열 사단'으로 분류되는 그의 이름이 세간에 거론된 것은 지난해 대전지검장 재직 시 월성원전 수사를 강행하면서다.

매우 드문 사례지만, 잘못한 수사에 대해 사과한 검사도 있다. 12월 15일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해 사건 피해자 최모씨는 진범을 풀어줬던 김훈영 검사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취하했다. 김 검사가 진심으로 사과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검찰 내부망 이프로스에는 김 검사의 사과에 공감하고 응원하는 글이 쏟아졌다고 한다.

당당한 것과 뻔뻔한 것은 다르다

윤 후보는 '공익의 대표자'라는 검사들의 명예를 생각해서라도 사과하는 법부터 배워야 할 것 같다. 단죄권력에 취해 도무지 사과라고는 모르는 검찰공화국 후보라는 그다지 명예롭지 않은 평에서 벗어나려면 말이다. "결혼 전 일이라 모른다"는 해명은 더는 통하지 않는다. 부인의 전시기획사 코바나컨텐츠가 기업들로부터 미심쩍은 후원/협찬을 받은 일과 장모의 파주시 불법 요양병원 비리, 성남시 도촌동 땅 은행 잔고증명서 위조사건 등은 모두 2012년 결혼 이후 벌어진 일이다.

주가조작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는 도이치모터스와 김건희씨의 인연은 김씨가 결혼한 후에도 이어졌다. 김씨는 2009년 8억 원어치 주식을 장외 매수한 이후 2013년 자회사 도이치파이낸셜 비상장주식 40만 주를 매입하고 2014년 도이치파이낸셜에 10억 원을 빌려주는 등 구속된 권오수 도이치모터스 회장과 특수한 거래를 지속했다.

최근 개발부담금 면제 등으로 논란이 된 양평 공흥지구 개발사업도 결혼 후 일이다. 양평군이 윤 후보 처가의 부동산개발회사 이에스아이앤디(ESI&D)에 사업권을 내준 것은 결혼한 지 8개월이 지난 2012년 11월이었다. 당시 서울중앙지검 특수1부장이던 윤 후보는 그로부터 5개월이 지난 2013년 4월 그 일대를 관할하는 여주지청장으로 부임했다. 양평군이 이에스아이앤디에 사업기간 연장, 개발부담금 면제 등 특혜를 베풀 당시 군수였던 사람은 현재 국민의힘 선대위에서 활동하는 국회의원이다.

윤 후보가 사과의 기술을 배우지 않으면 이번 대선에서 번번이 발목 잡힐 것이다. 앞으로도 사과할 일이 파도처럼 밀려들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지난번 전두환 망언 사태 때처럼 '오기'로 버티다가는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 막게 될 터다. 골수 지지자들은 모르겠지만, 중도층은 돌아설 수 있다. 아무리 문재인 정권이 미워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이재명 후보한테 한 수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욕설 동영상'을 두고 "아픈 가족사"라고 변명하고 하소연하던 이 후보가 어느 시점부터 "부족함에 용서를 바란다"며 참회 모드로 돌아선 것은 진정성을 떠나 현명한 처사였다. 아들 도박 문제에 대한 발 빠른 사과도 그렇다. 사과하면 비난이 덜해진다. 사과하지 않으면 비난이 오래간다. 당당한 것과 뻔뻔한 것은 다르다. 승자가 되려면 사과를 두려워 말아야 한다.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의 장모 최은순씨가 23일 오전 의정부지방법원에서 '통장 잔고증명 위조' 관련 1심 선고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 받고 법정을 나오고 있다. ⓒ 이희훈


12월 23일 장모 최씨가 또 유죄를 선고받았다. 이번에는 은행 잔고증명서 위조와 부동산 차명 소유 등의 혐의다. 징역 1년 실형이지만 현재 보석 상태인 점을 감안해 법정구속하지는 않았다. 판사에 따르면, 최씨 부탁을 받고 잔고증명서를 위조한 김모씨는 김건희씨와 서울대 경영전문대학원(EMBA) 과정에서 알게 된 사이다.

윤 후보는 이번에도 사과하지 않을 건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26,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독자의견


다시 보지 않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