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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여러 페미니즘 의제가 가시화됐다. 2017년 'OO계 내 성폭력', 2018년 미투 운동을 경유하면서 끊임없이 이어온 반성폭력 운동과 더불어 오래된 여성운동 의제인 남녀 임금격차, 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유리천장' 문제, 채용 과정상 성차별까지 노동과 관련된 이슈가 꾸준히 제기돼왔다. 앞서 열거한 의제들은 분명, 차별과 폭력에 대한 여성집단의 목소리와 연대를 공고히 했다. 동시에 여성집단이 경험하는 '보편적인' 문제의 제기 과정에서 여성집단 내의 차이, 즉 계급이나 소수자성의 문제는 지운다는 지점 역시 함께 지적돼왔다.
 
강연자인 이현재는 2030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유리천장 깨트리기처럼 개인화된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구조 자체를 바꾸려고 하진 않는다고 해석한다. 또 한편으로는 여성 개인의 성공이 다른 여성(들)과의 연대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강연자는 이 모순적인 행위자성이 “신자유주의적이지만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강연자인 이현재는 2030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유리천장 깨트리기처럼 개인화된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구조 자체를 바꾸려고 하진 않는다고 해석한다. 또 한편으로는 여성 개인의 성공이 다른 여성(들)과의 연대로 이어진다고 보고 있다. 강연자는 이 모순적인 행위자성이 “신자유주의적이지만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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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천장 깨뜨리기'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지난 12월 1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진행된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 '유리천장 깨트리기'와 젠더 정의"에선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세대의 주체들은 어떤 특성을 갖는지, 또한 이들에게 '유리천장 깨트리기 담론'이 왜 부상했는지를 다뤘다. 우선 캐서린 로텐버그의 논의를 빌어, 미국판 유리천장 깨트리기인 '여성리더 담론'의 등장 배경부터 살펴봤다.

2012년 이후 미국에선 '일-가족 균형'과 '행복'을 중심으로 한 여성리더 담론이 급부상했다. 해당 담론은 여성 개인이 가정에 매몰되지 않는 한편 자신의 커리어와 자기계발에도 몰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주요 골자로 삼는다. 여기서 말하는 페미니즘이란 여성이 자유롭게 스스로 인적 자본이 돼 경쟁하는, 신자유주의적 주체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다름없다.

또한 여성리더 담론이 암암리에 주체로 상정하는 집단은 중산층 계급의 여성으로, 이들의 균형은 이주노동자와 저임금노동자 없인 사실상 불가능하다. '돌봄의 외주화'란 문제를 언급하지 않는단 점에서 드러나듯이, 미국의 여성리더 담론은 계급적 전망을 그리기는커녕 신자유주의 체제를 강화한다. 페미니즘이 오히려 자본주의를 강화하는 하나의 전략이 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한국에서도 유리천장 깨트리기는 주요 이슈로, '정상', '야망'과 '성공' 담론을 동반한다. (강연자인 이현재는 해당 월례토론회 및 '신자유주의 시대 젠더정의와 '유리천장 깨뜨리기': 변혁적 논의를 위한 비판 페미니즘의 제안'(2019)에서 김진아의 <나는 내 파이를 구할 뿐 인류를 구하러 온 게 아니라고>(2019)에 나타난 야망 담론을 분석한다.) 미국의 여성리더 담론과 유사하지만, 한국의 야망 담론은 일-가정 균형 대신 '4B 운동(비혼, 비연애, 비출산, 비섹스)'에서 알 수 있듯이 재생산을 거부한다. 즉 재생산은 성공의 방해 요소로써 철저히 거부해야 할 대상이며, 성차별과 재생산이 발생시킨 여러 문제를 거부하면서 여성 '개인'으로 성공하는 게 최대 목표가 된다. 

강연자인 이현재는 해당 현상을 가리켜 2030 여성 페미니스트들이 사회구조가 양산하는 부정의를 인식하고 있지만, 유리천장 깨트리기처럼 개인화된 방식으로 대응하면서 구조 자체를 바꾸려고 하진 않는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이 같은 여성 개인의 성공이 완전한 각자도생의 방식은 아닌데, 이는 여성의 성공이 곧 다른 여성(들)과의 연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믿음에서다. 일견 모순적으로 읽히는 이러한 흐름에 대해서, 강연자는 이 모순적인 행위자성이 "신자유주의적이지만 신자유주의를 뛰어넘는다"고 말한다.

변혁적 페미니즘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이현재는 낸시 프레이저의 정의론을 통해 '변혁적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경제적 분배와 연관돼있는 계급이나 문화적 무시와 연관돼있는 섹슈얼리티와 달리 여성이란 젠더 집단의 부정의는 '사회의 정치-경제구조와 문화 평가적 구조 양자와 연관'돼 있다. (이현재(2019), '신자유주의 시대 젠더정의와 '유리천장 깨뜨리기': 변혁적 논의를 위한 비판 페미니즘의 제안', 젠더와 문화, 12(2), p.47)

즉 젠더 부정의 문제를 볼 때, 계급과 섹슈얼리티를 분리하는 방식으론 젠더차별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밝힐 수 없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돌봄·서비스 노동을 들 수 있다. 그간 돌봄·서비스 노동은 주로 여성이 해왔기 때문에 그 가치가 평가 절하돼왔고, 이는 다시 여성노동자의 저임금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을 만들어냈다.

여성노동자의 노동 가치 절하와 저임금 문제에 있어, 고위직 여성의 비율 늘리기 등 유리천장 깨뜨리기식 대응 역시 일정 부분 효과를 낼 순 있다. 하지만 이는 결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진 못한다. 낸시 프레이저의 말을 빌리자면 "근본적 집단 분화와 이를 유지시키는 틀에 손대지 않은 채 결과를 보전하는 긍정적 개선책"에 불과하다.

차별을 만드는 근본적인 원인과 틀은 그대로 유지한 채, 그 결과만 일정 부분 교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혁적 개선책의 마련과 실행은 어떻게 이뤄질 수 있을까. 사실 변혁적 개선책을 현실에서 대대적으로, 한 번에 실현하는 일은 쉽지 않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건, 이러한 문제의식을 통해 여성운동과 여성노동건강운동의 방향성을 새로이 설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여성노동건강운동은 무엇을 해야 하나

유리천장 깨트리기로 대표되는 오늘날 한국사회의 페미니즘에 대한 현상 분석을 통해, 여성노동건강운동을 의제로 삼는 우리는 무엇을 고민해야 할까. 페미니즘 운동 내부에서 다양한 진단이 필요하겠지만, 필자는 다음의 두 가지 고민을 함께 나누고 싶다. 

우선 일터에서 경험하는 차별과 폭력 경험을 여성노동자들이 어떻게 대응해나가고 있는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성들은 성차별로 인해 구조적 모순을 경험하고 이를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이에 대한 집단적 대응은 요원한 편이며, 이를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개개인의 전략을 모색하는 경우가 많고, 개인화된 흐름은 성공 담론의 이면에서 주변화된 여성노동자들을 더욱 양산하게 된다. 여성 집단 내의 다양한 경험을 살펴보고 공유함으로써, 개별적인 대응과 전략을 넘어선 집단적 대응과 전략을 모색할 수 있어야 한다.

다음으로 이미 사회화된 의제들의 범위를 넓혀나가는 일이 필요하다. 가령 '일-가족 양립', '유리천장', '채용 성차별' 등 현재 가시화된 페미니즘 의제들은 정상성을 전제로 한 삶의 형태와 중산층 계급의 노동과정을 염두에 둔 것들이다. 그러나 해당 의제들이 반드시 중산층 계급만의 문제는 아니다. 대표적인 저임금 직종인 서비스직에서 대다수는 여성노동자이지만, 관리자인 매니저는 남성이 맡는 일이 부지기수다.

또한 대기업이나 공기업을 중심으로 채용 과정상 성차별 문제가 가시화됐으나, 채용 과정에서 여성의 능력을 평가절하하거나 외모·나이를 문제 삼는 관행은 직종이나 고용형태를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 의제의 설정과 의제가 사회화되는 방식이 지닌 한계를 비판하며, 여성 집단 내부의 차이를 상상하고 새롭게 의제화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의 운동이 여성 개개인의 능력주의에 매몰되지 않는, 기존의 틀을 변혁하는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지난 12월 1일 연구소에서 개최된 여성노동건강권 월례토론회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 유리천장 깨트리기와 젠더 정의(강연자: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 연구소 교수​​​​​​​ 이현재”에 참여한 후기로, 강연자의 강연 내용과 참여자들의 의견을 요약 및 재구성한 것이다.

이 글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의 회원이신 김지안이 작성하셨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에서 발행하는 잡지 <일터> 12월·1월호(합본호)에 연재한 글입니다.


태그:#유리천장깨뜨리기_젠더정의, #이현재, #변혁적페미니즘, #여성노동건강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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