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12.27 06:08최종 업데이트 22.03.27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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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관계는 식민지배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갈등과 대립을 계속 노출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제까지 한일관계는 대체로 그럭저럭 유지돼온 편이다.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이나 역사교과서 문제 혹은 위안부·강제징용 문제 등으로 비판 발언들이 오고 갈 때도 있었지만 비교적 별 탈 없이 이어져왔다.

식민지배로 인해 상처와 피해를 준 나라가 영토에까지 욕심을 내게 되면, 정상적인 경우라면 유혈 분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나기 쉽다. 식민지배를 한 적이 없는 나라가 영토에 욕심을 내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무력 충돌을 수반하는 인도와 중국 사이의 국경 분쟁은, 일본의 독도 영유권 주장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강경하게 대처할 경우에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결과 중 하나를 시사한다.


하지만 1965년 이후의 한·일 두 정부 사이에서는 이따금 비판 발언만 오고 갈 뿐, 인도·중국 영토분쟁 같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영토분쟁은커녕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같은 군사적 협력체제가 유지되고 있다.

2019년 7월 일본의 경제보복으로 관계가 잠시 험악해진 적은 있지만, 양국은 어느새 미국과 함께 대북·대중국 압박 체제하에서 협력하고 있다. 강제징용 판결과 관련해서도, 한국 국민들의 정서와 관계없이 금년 1월부터 한·일 두 정부가 공동보조를 맞추고 있다.

이달 6일 기시다 후미오 총리는 국회 소신표명 연설에서 한국을 '중요한 이웃나라'로 언급했다. 립서비스에 그치는 발언이 아니라, 실제의 한일관계를 반영하는 발언이었다. 한국이 돌아서면 일본은 북한·중국·러시아에 이어 한국의 압력까지 받게 돼 국가 명운이 위태해진다. '중요한 이웃나라'라는 언급은 상당 부분은 진심을 담은 말이다.

과거의 식민지배 문제에 더해 현재의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있기 때문에 정상적인 경우라면 적대관계 혹은 준적대관계가 됐어야 할 한·일 양국이 '중요한 이웃나라'가 돼 있다. 이렇게 된 최대 요인은 미국의 영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양국을 때로는 압박하고 때로는 중재해온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이상한 65년 체제

그에 더해, 양국을 묶어두는 시스템의 역할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른바 '1965년 체제'가 그것이다. 1965년 체결된 한일기본조약과 부속 협정들이 지탱하는 이 체제가 분쟁을 억눌러 왔다고 말할 수 있다.

65년 체제는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위안부·강제징용 등과 관련해 '1965년 협정으로 다 해결됐다'는 주장이나 '그 협정에서 그것은 규정되지 않았다'는 주장의 공통점은 1965년 협정을 하나의 준거로 인정한다는 점이다. 이런 주장들이 양국 정부나 법원에서 계속 나오고 있다는 것은 65년 체제가 아직 살아 있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65년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한일기본조약 및 부속 협정들에는 분쟁을 제어해줄 결정적인 장치가 결여돼 있다. 식민지배 문제보다 폭발력이 크면 컸지 결코 작지 않은 독도 영유권에 관한 합의가 빠져 있다. 독도는 한국 영토이며 일본이 더 이상 문제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합의가 들어 있지 않다. 이것이 결여된 채 65년 체제가 작동해왔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그것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는 65년 체제 이전의 현상에서도 증명된다. 1947년 4월에는 일본 어민들이 독도에 상륙해 '이곳은 우리 구역'이라며 한국 어민에게 총격을 가했다. 2개월 뒤부터 일본 정부는 미국과 연합국을 상대로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는 홍보 책자를 배포했다.

1948년 1월 6일 케네스 로이얄 육군장관의 성명을 계기로 미국이 일본을 동맹국으로 승격시킨 뒤인 그해 6월 8일, 미군 폭격기들이 독도와 그 주변에서 한국 어민들을 폭격했다. 이로 인한 사망자는 150명 혹은 200명으로 알려져 있다.
  

독도 ⓒ 조정훈

 
2016년에 <독도연구> 제20호에 실린 이태우 영남대 연구교수의 논문 '1948년 독도 폭격사건의 경과와 발생 배경'은 당시 미군이 일본 어민들에게 '오늘은 독도로 가지 말라'는 사전 통보를 했다고 설명한다. 이런 폭격은 1952년 9월 15일에도 있었다. 해녀와 선원을 포함한 20여 명이 조업하는 현장에 미군이 폭탄 4발을 투하했다.

일본 정부는 1952년 7월 26일에는 '군용시설과 구역에 관한 협정'을 미국과 체결했다. 이 협정을 통해 독도를 미군 훈련장으로 제공했다. 그해 5월 23일 이시하라 간이치로 외무성 정무차관은 독도를 미군 훈련장으로 제공해야 한국으로부터 가져올 수 있다고 발언했다.

그랬던 일본이 65년 체제 하에서는 독도에 대한 공격적 도발을 자제하고 있다. 이따금 일본에서 험악한 망언만 나올 뿐, 1947년·1948년·1952년과 같은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가장 큰 화약고인 독도에 관한 것이 합의되지 않았는데도 65년 체제가 작동해왔고 독도에서 더 이상 충돌이 일어나지 않았으니,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독도 밀약

이는 한일기본조약 체결 당시에 독도에 관한 이면합의가 있었다는 독도밀약설의 개연성을 높여주는 일이다. 2006년 6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전 총리가 언론인 노대니얼과의 인터뷰 때 언급해 널리 알려진 독도밀약이 사실일 가능성을 높여준다. 밀약의 내용은 '한일협정 5개월 전 독도밀약이 있었다'라는 제목의 <월간 중앙> 2007년 4월호 등을 통해 한국에 잘 알려졌다.

시마모토 겐로 <요미우리신문> 서울 특파원과 함께 밀약의 실무 책임자가 되어 정일권 총리와 고노 이치로 건설대신의 밀약 체결을 도운 것으로 알려진 김종락(김종필의 형)씨도 독도밀약이 실제 있었다는 점을 2007년 3월 19일 자 <중앙일보> '42년 전 한·일 독도밀약 실체는 ···'에서 증언했다.

독도밀약은 (1) 독도를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 한·일 양국이 상호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2) 어업 수역을 설정할 때 독도가 양국 공동수역에 포함되도록 한다 (3) 한국이 독도를 점거하는 현 상태를 유지하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세우지 않는다 (4) 양국은 이 합의를 계속 지키되 비밀을 유지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간의 한일관계를 돌아보면 이 밀약이 문자로 그대로 철저히 지켜졌다고는 볼 수 없으나 대체로 이행됐다고는 볼 수 있다. 일본 정부가 독도에 대해 노골적으로 욕심을 표하는데도 한국 정부가 적당히 몇 마디 항의를 한 뒤 슬며시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양국의 역대 정부들이 이 밀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이제껏 한국 정부가 일본의 영유권 주장에 대해 보다 확실하게 대처하지 않은 원인이 어디에 있는지를 시사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 독도에 관한 명문의 합의가 없었는데도 65년 체제가 작동될 수 있었던 이유를 추론케 하는 것이기도 하다.

치고 나오는 일본

그런데 조만간 독도문제가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지 모른다는 전망을 낳게 하는 조짐이 있다. 이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로 갖고 가자는 움직임이 일본 내에서 점점 강해지는 것도 그런 조짐 중 하나다.

국제 재판을 받자는 것은 독도밀약을 연상케 하는 그간의 '적당한 대처법'에서 탈피하자는 뜻이 된다. 양국 정부가 상대방을 적당히 비판하면서 위기를 억눌러온 그간의 상태가 종결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에 편승해 일본 극우세력 내에서는 베이징 올림픽에 대한 외교적 보이콧을 이것과 연관 짓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지난 7월 30일 마크 램지어 교수의 서문이 들어간 <위안부는 모두 합의계약을 했다>라는 책을 통해 '위안부가 과연 피해자이며 희생자인가'라는 의문을 제기한 아리마 데츠오 와세다대학 교수가 그중 하나다.

아리마 데츠오 교수는 지난 16일 트위터에 쓴 글에서 "아메리카에 일본의 다케시마 문제 국제사법재판소 제소에 대한 지원을 호소해봅시다"라고 제안했다. 미국의 요구에 응해 베이징 올림픽 외교적 보이콧에 참가하는 조건으로 독도 영유권이 국제사법재판소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미국의 협조를 요청하자는 제안이다.

눈여겨볼 또 다른 조짐은 일본이 독도와 관련해 미국의 눈치를 덜 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965년 이전만 해도 일본은 독도에 대해 훨씬 강경했었다. 미국이 일본과의 양해 하에 독도를 폭격한 사실, 일본이 독도를 미군 훈련장으로 제공하려 한 사실 등은 일본이 독도에 대해 얼마든지 폭력적으로 나올 수 있음을 잘 보여줬다.

그런 일본이 1965년 이후로는 '다케시마는 일본 땅'이라고 주기적으로 주장하면서도 한국을 크게 위협하지는 않았다. 이는 기본적으로 미국의 개입 때문이었다. 한일관계가 망가지면 한·미·일 삼각협력체제로 북한·중국을 견제하는 미국의 전략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10일 오후 헬리콥터편으로 강릉을 출발, 울릉도를 거쳐 이날 오후 2시쯤 독도에 도착한 이명박 대통령은 경찰 독도경비대장으로부터 업무보고를 받고 짧은 독도 현황 소개 영상을 시청했으며, 경비대원들을 격려했다. 2012.8.10 ⓒ 청와대 제공

 
그래서 자제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이 지난달 17일에는 김창룡 경찰청장의 독도 방문을 빌미로 워싱턴 한·미·일 외교차관 협의 직후의 공동기자회견을 '보이콧'했다. 11월 16일에 있었던 경찰청장 독도 방문 직후에 일본 정부가 한국 정부에 강력한 항의를 제기한 뒤였는데도, 미국이 주최하는 전략회의에까지 찬물을 끼얹은 것이다.

이는 미국의 개입 하에 암묵적으로 유지돼온 그간의 상태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으며 일본이 조만간 새로운 단계로 치고 나갈 가능성이 커지고 있음을 시사한다. 일본이 미국의 눈치를 덜 보기 시작했다는 것은 한국 역시 종전의 수세적이고 모호한 태도에서 신속히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될 필요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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