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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9일 제주 4.3사건 희생자에 대한 국가차원의 보상 기준을 규정한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일부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였다. 국가에 의한 폭력은 수천억원의 돈으로 보상한다고 한들 모두 회복될 수 없다. 하지만 당시 제주에서 삶을 살아갔던 이들이 어떤 폭력의 순간들을 통과했는지 우리는 선명하게 기억해야 한다. 1940년에 태어나 1948년 4.3이라는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었지만 삶의 끈을 놓지 않았던 엄마의 삶을 기록으로 남기는 이유이다. 글은 엄마의 시점에서 서술했다.[편집자말]
1948년 나의 유년 시절을 휩쓸고 지나간 4.3사건 당시의 고통스러운 기억들은 오랜 세월 가슴 속 깊이 꽁꽁 묻혀 있었다. 팔십을 넘기면서도 나는 그 당시 이야기에 대해 털어놓은 적이 없다. 역시 4.3 피해자인 남편과도 당시 사건에 대해 전혀 이야기하지 않았고 자식들 누구에게도 한마디 털어 놓은 적이 없다. 고통의 기억들은 한편으로는 두려움 덩어리였다. 4.3에 이어 6.25가 발발하고 남과 북은 원수보다 더한 사이가 된 상황에서 단독선거를 망친 제주는 영원한 빨갱이 섬이었다. 아버지를 따라 가족들 모두 산으로 피신갔었던 사실, 수형인으로 끌려간 언니, 산에서 피신 중에 싸늘한 시체가 되어버린 오빠의 존재는 누가 마음만 먹고 조금만 이야기를 덧붙이면 우리를 폭도가족으로 충분히 둔갑시킬 수 있는 시대였다.

빨갱이 가족으로 내몰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한 편에 있었다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 시간과 기억을 떠올리려는 시도만으로도 몸과 마음이 아팠다. 당시 기억들을 조금이라도 떠올리기라도 하면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심장이 벌렁대면서 내 몸과 마음이 다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당시 아홉 살이었던 나는 어느덧 팔십을 넘긴 나이가 되었다. 나는 딸의 안내로 4.3 트라우마 센터에 다닌다. 이제 나는 조금씩 당시의 기억과 마주할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있다. 하지만 너무 오래 전 기억이어서 기억들은 때로는 순서가 뒤죽박죽 얽혀 버린다. 지난 번 두 번째 피난 후에 수용소에 갔던 이야기, 성을 쌓았던 이야기를 했다. 오늘은 두 번의 피난 사이에 일어났던 시간들을 정리해보려 한다.

내 몸과 마음 곳곳에 새겨진 그 사건 

아무리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 시간, 나의 유년기를 통틀어 가장 강력한 기억으로 내 몸과 마음 곳곳에 새겨진 한 사건이 벌어진 시간. 여전히 그 사건을 떠올리면 몸과 마음 곳곳이 아프다.

해방이 되고 마을 사람들의 염원들이 모여서 1947년 이호국민학교가 세워졌다. 그 전에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꽤 멀리 떨어진 도두국민학교에 다녀야 했다. 이호국민학교가 세워지자 나도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어렴풋이 공회당에서 열렸던 입학식 장면이 떠오른다. 그리고 우리와 같이 공부를 했던 동네의 나이든 어른도 기억난다. 그 분은 선천적으로 걷지를 못했고 다른 또래들과 달리 상급학교에 진학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림을 아주 잘 그렸고 몸이 불편해도 밭일도 열심히 했던 것으로 기억난다.

5.10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며 가족들이 산으로 다 같이 올라가 며칠 살다가 내려왔고 산에서 내려온 후에는 큰 사건 없이 학교를 다녔다. 제주에서만 두 개의 선거구에서 투표가 이뤄지지 않아서 제주도는 빨갱이 섬으로 낙인찍혔다고 하지만, 어린 나로서는 짐작 못하는 어른들의 일이었다.

나의 할아버지 집안과 외할아버지 집안은 모두 동네에서 인정받는 유지였다. 오도롱의 한 마을인 골왓마을 땅의 삼분의 일 정도가 할아버지 땅이었고 마을에서 종을 부릴 만큼 부유한 편에 속했다. 또한 할아버지는 동카름 동네의 훈장이라고 불리며 동네에서는 나름 존경받는 어른 역할을 하셨다고 한다.
 
나의 할아버지는 여기 땅의 1/3 정도를 소유할 정도로 마을 유지였다.
▲ 1971년 골왓마을 나의 할아버지는 여기 땅의 1/3 정도를 소유할 정도로 마을 유지였다.
ⓒ 제주학연구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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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는 한약방을 운영하셨는데 마을 사람들이 식수원으로 사용하는 용천수인 덕짓물을 개보수할 때도 크게 역할을 하셨다고 들었다. 하지만 좌로 우로 나눠져 나라의 운명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들을 격렬하게 내놓는 불안정한 시기, 유지로서의 위치는 다른 이들보다 더 많은 불안과 위협의 요소를 안고 있었다. 외할아버지는 네 아들을 두고 있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제주도 청년들처럼 그들도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는 남한만의 단독선거가 진행되어서는 안 된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믿음에 따라 행동했다.

나의 큰외삼촌이면서 외할버지의 큰 아들은 어지러운 시국에 마을 이장을 맡고 있었고 똑똑하다는 평을 듣고 있었다. 당시 마을에서 가장 신망을 받고 있던 이가 고칠종이었는데 그는 당시 제주 고등교육의 산실로 불리우는 농업학교 교사였다. 오도롱의 20~30대 대부분의 청년들이 고칠종이 하는 말을 신뢰했고 지지했으며 같이 행동했다. 외할아버지의 네 아들 모두 그 흐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게다가 고칠종과 함께 적극적인 활동을 했던 농업학교 교사 김학림이 친정으로 6촌뻘 친족이었다.
 
48년 6월 16일 제주도 학교들의 남로당 세포들의 연락담당 김학림(Kim Hak-lim)은 제주읍 북초등학교의 남로당 당원인 5명의 교사들에게 그들은 구국투쟁회의 회원이며 그들의 임무는 가능한 어떤 수단을 동원하여 다른 교사들을 회원으로 가입시키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학림은 교사들 중 한 명에게 비좌익 교사들에 보낼 위협 편지의 초고를 넘겨주었다. 김학림과 관련 교사들은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으며 소량의 벌금형과 더불어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3급비밀) (후략)'-미극동군사령부(General Headquarters, Far East Command)민정정보국 정보요약(Civil Intelligence Section, Periodical Summary) (출처: 제주의 소리 2015. 3. 27)
   
4.3 당시 제주농업학교는 도내의 인재들의 몰려들어 수학에 정진했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이곳에는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48년 5월), 2연대(48년 12월), 독립제1부대(49년 7월) 등의 사령부가 줄줄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군 토벌대가 이 곳에 주둔하면서 도내의 내노라하는 유지들과 지식인, 그리고 입산 자수자와 체포자 등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던 한과 눈물의 장소이기도 했다.
▲ 1948년 5월 제주농업학교에 설치된 미59군정중대 본부 4.3 당시 제주농업학교는 도내의 인재들의 몰려들어 수학에 정진했던 유일한 교육기관이었다. 그러나 4.3이 발발하면서 이곳에는 제9연대를 시작으로 11연대(48년 5월), 2연대(48년 12월), 독립제1부대(49년 7월) 등의 사령부가 줄줄이 자리잡았던 곳이다. 군 토벌대가 이 곳에 주둔하면서 도내의 내노라하는 유지들과 지식인, 그리고 입산 자수자와 체포자 등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잡혀와 고문과 취조를 당한 후 처형되거나 육지형무소로 끌려갔던 한과 눈물의 장소이기도 했다.
ⓒ 제주 4.3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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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 단독 선거를 피해 산으로 며칠 동안 피신갔다가 내려오고 나서 봄과 여름 두 계절이 지났다. 아마 늦가을이나 초겨울 즈음 어느 날이었는데 몇 월이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어린 나의 느낌에도 마을 분위기가 좀 어수선했지만 나는 친구들과 놀이하랴 집안일을 도우랴 나로서는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어른들의 세계가 어찌 돌아가든 나는 아침이면 학교에 갔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집안일을 돕고 동생들을 돌봐야 했다. 워낙 몸이 약하신 어머니는 누워 있는 일이 많았기에 우리 집의 맏이인 언니가 엄마 역할을 대신했다. 그리고 나는 늘 동동거리는 언니를 도와 집안일을 같이 했다.
 
1948년 10월11일에는 제주도경비사령부(사령관 김상겸 대령, 부사령관송요찬소령)가 설치되어 대대적인 군경합동토벌작전이 전개되었다. 제9연대장 송요찬이 10월17일에 내린 포고령에 따라 제주도 중산간지대 민간인들에 대한 소개령이 내려지고 대대적인 진압작전이 전개되었다. 작전의 대상에는 무장대뿐만 아니라 마을에 거주하는 일반 주민도 포함되었다. 더욱이1948년 11월17일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었는데, 계엄령이 해제된 12월31일까지 제9연대는 "모든 저항을 없애기 위해 모든 중산간마을주민들이 유격대에 도움과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는 가정 아래 마을 주민에 대한 '대량학살계획'을 채택했다.  (출처: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위원회, 2003)

학교 운동장 밖에 박수소리... 꽁꽁 묶여 있던 외할머니 

그날도 나는 평소와 다름없이 아침에 학교로 갔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목소리를 놓치지 않으려고 귀를 쫑긋 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창 밖으로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에 교실에서 수업을 듣던 아이들이 우르르 창가로 몰려갔다. 운동장은 어느새 마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대부분 여자 삼촌들이었고 핏기 없는 하얀 얼굴로 잔뜩 긴장하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그들 주변에는 총과 몽둥이를 들고 있는 젊은 남자들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자세로 무섭게 서 있었다. 군인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고 그냥 옷을 입은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의 서슬에 겁을 먹은 여자 삼촌들이 억지로 박수를 치고 있었고 일제히 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나도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으로 시선을 따라갔다. 그들 앞에 서 있는 이는 바로 외할머니였다. 외할머니의 두 손은 뒤로 꽁꽁 묶여 있었고 당시 그 표정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다. 외할머니의 두 눈에 드리워진 심정이 무엇이었을까? 나는 지금까지도 외할머니의 표정을 외면하고 싶다.

사람들의 박수소리는 점점 커졌다. 그들 주변으로 몽둥이와 총을 들고 서 있는 남자들이 박수소리를 높이라고 협박하고 있었다, 박수소리와 함께 '탕' 하는 총성이 울렸다. 그리고 외할머니의 가슴에서 붉은 피가 솟기 시작했고, 어느새 붉게 물든 할머니의 몸뚱이는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할머니의 몸은 피범벅되며 쓰러졌지만 박수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운동장을 둘러싸고 서 있는 약하디 약한 사람들은 같은 동네에서 정을 나눴던 이의 죽음 앞에서 차가운 총구의 위협을 감당 못하고 억지로 억지로 박수를 끌어내고 있었다.
 
이호국민학교가 있었던 자리. 현재 이호국민학교터의 일부는 제주공항 활주로로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호국민학교가 있었던 자리. 현재 이호국민학교터의 일부는 제주공항 활주로로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밭으로 이용되고 있다
ⓒ 김순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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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비극의 순간이 나의 어린 시절을 관통했지만 외할머니의 죽음만큼 선명하게 나의 기억을 붙들고 있는 것은 없다. 외할머니의 몸에 속절없이 박힌 총탄. 지금도 나의 깊숙한 곳에 큰 상처로 똬리를 틀고 있지만 이제야 나는 조금씩 그 장면과 그 시간을 들여다 본다.

어린 나의 눈에도 동네분위기는 점차 살벌해졌다. 강한 충격을 남겨준 이호국민학교는 두 번째 피난 이후 찾아가 보니 형체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건립된 지 2년도 안된 학교는 학살터라는 원치 않는 역할을 수행했고, 결국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자취를 감췄다. 현재 그 터의 일부는 제주공항 활주로로 일부 편입되었고 나머지는 밭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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