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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술국치날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경술국치날 경복궁에 걸린 일장기
ⓒ 추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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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대 이땅의 백성들은 정신적인 공황에 빠져들었다.

무능하고 부패한 왕조이지만 그래도 제나라의 군주이고 왕조였다. 임진왜란으로 무수한 인명이 살상되고 국토가 쑥대밭이 되었지만 임금이 있었고 나라는 존재했었다. 병자호란으로 삼전도의 굴욕을 겪었으나 군주는 있었고 강역은 우리 것이었다. 박동완이 신앙생활과 <기독신보> 등 종교매체에 열정을 바치게 되는, 1910년대 조선사회의 실상을 알아본다. 

경술국망은 4천년 역사에서 초유의 사태였다. 군주가 살아 있지만 허수아비였고 나라 이름조차 빼앗겼다. 일제는 합방과 더불어 토지 수탈작업에 착수하였다. 

조선총독부는 1912년 8월 30일 제령(制令) 제2호로 토지조사령을 발표하여 전국적인 토지조사사업을 벌였다. 토지조사령 제4조는 "토지 소유자는 조선총독이 지정하는 기간 내에 그 토지의 사위경계에 지목자 번호, 씨명 등을 기입한 표목(標木)을 수립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즉, 길이 4척 이하의 말뚝에 군, 면, 리, 평(坪), 자호(字號), 지번, 지목, 두락수, 결수(結數), 소유자, 관리자, 소작인의 주소와 성명을 기재한 다음 그 말뚝을 1척 이상 땅 속에 박도록 한 것이다. 

조선에서는 오래 전부터 토지 거래나 소작 관계를 특별히 문서로 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당사자가 구두로 약정하고 마을에서 이를 인정하면 되는 불문율이 있었다. 그런데 총독부의 조치는 농민들에게는 생소한 뜻밖의 일이었고, 관보에나 실린 토지조사령의 내용을 아는 농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 관리들은 욕심나는 땅이거나, 소유주가 서류상으로 불명한 토지와 임야 하천부지는 총독부 소유의 말뚝을 깎아서 박았다. 이렇게 하여 빼앗은 땅이 전국적으로 수천만 평이나 되었다. 농민들은 옛날의 관례만 믿고 있다가 하루 아침에 땅을 빼앗긴 경우가 수두룩 하였다.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본 저작물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것을 이용했으며, 해당 저작물은 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조선총독부 청사 전경. 1926년 경복궁 내에 준공된 조선총독부 신청사의 모습이다. (본 저작물은 "서울역사박물관"이 공공누리 제1유형으로 개방한 것을 이용했으며, 해당 저작물은 museum.seoul.go.kr에서 무료로 다운받으실 수 있습니다.)
ⓒ 서울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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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의 토지조사사업으로 조선 농민의 대부분이 토지의 소유권은 물론 소작권을 상실한 채 반봉건적인 악덕지주와 친일파, 일본인 지주의 소작농이 되거나 유이민화하고 임금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그리고 소작농들은 고율의 소작료와 각종 세금으로 이중 삼중의 수탈을 당해야 했다.

제국주의자들의 식민통치 방식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군사력과 자본을 투입하는 것은 상식적이고, 종교는 물론 심지어 아편, 창기, 유곽까지도 이용했다. 영국은 중국에 식민지를 개척할 때에 주로 아편을 이용하다가 아편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일제는 조선 식민정책으로 아편과 창기, 매춘을 통해서 조선 청년들의 심신을 파멸시키려고 하였다. 

일제가 조선에서 아편을 유통시키고 대량의 아편 중독자를 만들어내는 데는 중국인들의 역할이 필요하였다. 영국과 중국의 아편전쟁 과정을 지켜보아 온 일제는 영국과는 달리 지극히 노회한 수법으로 조선에 아편을 보급시켰다. 중국인들을 통해 조선에서 아편을 판매하고 유통시키도록 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전국 각 도시에 중국인들이 백주에 공공연히 판매하는 아편흡수기를 방임할 뿐만 아니라, 아편 수입으로 인한 재화의 해외 유출을 우려하여 국내에서 양귀비의 재배를 묵인, 장려하였다. 아편이 인체에 치명적인 화를 초래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조선인들은 총독부의 묵인하에 아편을 피우거나 주사용기를 통해 추입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이것은 크게 전파되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나라를 잃은 아픔에다 계속되는 일제의 수탈과 탄압, 직장이라 해도 급료가 일본인에 비해 4분의 1 이하인 차별대우 때문에 극심한 좌절과 상심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처지에서 아편을 통해 순간적인 향락으로 자포자기에 빠져 아편 상습자, 중독자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또한 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심신을 파괴하고 도덕적으로 타락하도록 만들기 위해서 창기와 유곽을 적극 권장하였다. 창기란 우리 전통적인 기생과는 달리 갈보, 매춘부, 매소부, 창부, 창녀, 매음녀, 논다니 등을 포괄하는 명칭으로 해석되는 매춘을 전업으로 하는 창녀와 같은 것이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기생제도가 있었지만, 이것은 매음과는 전혀 다르고, 매음 행위는 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용납하지 않았다. 일제는 1904년 10월 서울 쌍림동에 제일루라는 유곽을 조성하였으며 병탄과 함께 공창제도를 만들었다. 

공창제도가 시작되면서 창녀촌과 유곽이 날로 번성하여 전국 각지에 생겨났다. 창녀촌과 유곽이 늘어나면서 각종 성병이 만연하고 국민의 윤리도덕이 날로 퇴폐하였으며, 청장년들의 유곽 출입으로 가정파탄이 끊이지 않았다. 창기조합이 결성되어 관헌의 보호를 받는 기이한 현상도 있었다. 

총독부는 1916년 3월 31일 경무총감 부령 제4호(창녀취제규칙)를 발포하여 공창제도를 합법화시키면서 이를 적극 보호하였다. 총독부가 창기 조합까지 결성시키면서 이것을 '호보 육성'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① 조선의 전통적인 윤리도덕을 파괴함으로써 일본에 동화시키며 ② 망국지한(亡國之恨)의 울화에 견디지 못하는 우국지사들을 청루로 끌어 들이고 ③ 갈 길을 몰라 방황하는 청년자제들을 주색에 빠뜨리려는 계략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전국 각지에 일본인이 경영하는 요정과 유곽, 매음굴이 수천 군데가 생기고, 땅을 빼앗긴 조선인 처녀들은 생계 수단으로 유곽으로 모여들어 대도시는 물론 지방 도시에까지 창녀촌이 번창해 갔다. 조선 총독부의 이와 같은 추악한 '인육시장' 보호정책은 다른 어떠한 억압이나 고문, 재산상의 수탈에 못지 않은 잔학하고 악독한 행위였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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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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