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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보성전문학교 본관 스케치와 고딕양식에 대한 기사
 1933년 동아일보에 실린 보성전문학교 본관 스케치와 고딕양식에 대한 기사
ⓒ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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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말 내장원경이던 이용익은 1882년 임오군란으로 명성황후가 경기도 장호원에 은신했을 때 고종과의 사이에 연락을 잘한 공로로 왕의 신임을 받아 탁지부대신에 올랐다. 

그는 민영환ㆍ이상재 등과 개화당을 조직한 데 이어 친러파의 수령으로 활동하고, 한일의정서 조인에 반대하다가 일본으로 납치되고, 1905년 귀국할 때 들여온 인쇄기로 보성사 인쇄소를 차리면서 보성학원을 설립하였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다가 한때 일본 헌병대에 연금당했다가 풀려나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 1907년 그곳에서 사망했다. 페테르부르크에서 암살당했다는 설도 전한다. 

보성학원은 이용익의 망명으로 손자 이종호가 잠시 맡았으나 그 역시 해외로 망명하면서 심각한 경영 위기에 빠지게 되었다.  

보성학원은 이용익이 설립하였으나 보호자는 고종이었다. 일제가 1906년 이상설ㆍ이준ㆍ이위종 등 헤이그특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면서 보성학원에 대한 지원도 끊겼다. 주인이 없는 보성학원을 이끌고 있던 윤익선이 손병희를 찾아가 지원을 간청했다. 
 
3.1혁명을 실질적으로 엮어내고 주도한 천도교 3세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 선생
▲ 의암 손병희 선생 3.1혁명을 실질적으로 엮어내고 주도한 천도교 3세 교주이자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손병희 선생
ⓒ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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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병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명문 보성학원의 문을 닫게 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고, 1907년 12월 21일 보성학원을 천도교에서 인수하였다. 막대한 부채를 안고 인수한 것이지만 보성전문학생 중에는 특정 종교재단에서 인수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에 대해 손병희는 학교에서 일체의 종교적 색채를 강요하지 말 것을 담당자들에게 각별히 당부하였다. 그때 손병희가 보성학원을 인수하지 않았다면 오늘의 고려대학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방 후 고려대학은 교정 한 구석에 손병희의 동상을 세웠다.

박동완이 입학하기 전 배재학당은 학생들의 자치기구로서 협성회(協誠會)를 조직하였다.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의 강의에 자극을 받은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1898년에는 회원이 300명까지 늘었다고 한다.

초기회장에 양흥국, 부회장에 노병선, 서기에 이승만이었으며, 그 뒤 이익채ㆍ유영석ㆍ이승만ㆍ한치유 등이 돌아가며 회장을 맡았다. 회원들은 자주 토론회를 열었다.

토론회 주제는 자주독립ㆍ자유민권ㆍ자강개혁 등이었다. 50여 차례에 걸쳐 진행된 토론회에는 일반 시민도 많은 관심을 갖고 참여하고 다른 사회단체와 지방에도 영향을 끼쳐 토론이 대중화ㆍ다양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협성회는 토론의 내용을 홍보하기 위해 기관지 <협성회보>를 발행했다. 
 
서재필(1864-1951)
 서재필(1864-1951)
ⓒ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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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필(1866~1951)은 18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국비로 일본 도쿄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여 이듬해 졸업했다. 다시 조선으로 돌아와 고종에게 사관학교 설립을 진언하며 조련국 사관장이 되었다. 20세 때 김옥균ㆍ홍영식이 일으킨 갑신정변에 참여해 정부를 전복시켰으나 3일 천하로 끝나면서 일본을 거쳐 미국으로 망명하게 된다.

가족은 역적으로 몰려 부모, 형, 부인은 자결하고 동생은 참형당했으며, 2세 된 아들은 굶어 죽었다. 미국에 귀화한 서재필은 워싱턴대학 의과대학에 입학하고, 졸업 후 세균학을 연구하여 박사학위를 받았다. 1894년 갑오개혁 때 귀국하여 독립협회를 창립하고, 1896년에는 <독립신문>을 창간하는 등 개화ㆍ개혁의 선각자 역할을 하곤, 배재학당에서 변화된 서양사 등을 강의하였다.

협성회는 1888년 4월부터 주간으로 <협성회보>를 발행하였다. 배재학당 구내에서 발행되던 이 회보는 1889년 3월 19일 주간에서 일간으로 늘리면서 제호를 <매일신문>으로 개제하였다. 우리나라 최초의 일간신문이 되었다. 발행부수는 1천여 부 내외였다.
 
보성전문학교 개교 30주년 기념도서관으로 개관했다. 현존하는 대학도서관 건물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설계자는 건축가 박동진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도서관의 시공은, 후지타 겐이치(藤田源市)가 맡았다. 도서관 연면적은 873평이다. 이 도서관이 개관하자마자, 초대 관장을 맡은 사람이 손진태다.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구관 보성전문학교 개교 30주년 기념도서관으로 개관했다. 현존하는 대학도서관 건물 중 가장 오랫동안 도서관으로 쓰인 건물이다. 설계자는 건축가 박동진이다. 고딕 양식으로 지은 도서관의 시공은, 후지타 겐이치(藤田源市)가 맡았다. 도서관 연면적은 873평이다. 이 도서관이 개관하자마자, 초대 관장을 맡은 사람이 손진태다.
ⓒ 백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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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한글체의 언문일치 문장을 사용함으로써 회원은 물론 백성들의 사랑을 받았다. 1898년 5월 15일자 1면에 러시아와 프랑스 양국이 대한제국 정부에 토지와 탄광 등의 이권을 요구해온 외교문서를 폭로하는 등 시종 민족주의적인 내용으로 일관하였다. 경영난이 겹쳐 1899년 4월 4일자(제279호)를 종간호로 문을 닫았다. 

박동완이 입학했을 때는 이미 사라진 신문이었지만, 학당에는 선배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신문이 보관되고 있었으며, 이와 관련 많은 사연이 전해졌다. 그가 사회활동에 나서면서 신문ㆍ잡지일을 택한 것은 장인의 직업과, 배재학당의 선배들이 만들었던 <협성회보>에 이은 <매일신문>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다.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민족대표 33인 박동완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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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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