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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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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을 웃고 울리는 해조류가 미역이다. 가장 가까우면서도 가장 치열하게 우리의 의식주 중 하나로 자리한 대표 해조류이다. 미역에는 철분과 칼슘, 아이오딘 함유량이 많아 신진대사를 촉진하는 작용이 있어서 오래전부터 미역국을 산후조리용 음식으로 이용했다. 또한 알길산이 다량 함유된 대표 해조류이기에 초장에 찍어 먹을 경우 소화작용에 큰 도움이 되어 변비에도 좋다고 한다. 

보통 건조된 형태로 유통되어 보관 기간이 길고 가격도 저렴해서 채소가 부족한 시기에 주로 사람들에게 무기질과 섬유질 공급원이 되어준다. 과거에는 구내염이나 입술 주변과 손발의 작은 상처, 화상 등에 드레싱이나 일회용 밴드처럼 마른미역이나 젖은 미역 조각을 덮어 상처를 보호하는 데 쓰이기도 했다고 전한다. 미역은 파와 상극이다. 파에 들어 있는 인과 유황 때문에 미역에 있는 칼슘이 제대로 흡수되지 않고 서로 방해하여 미역국에는 파를 넣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건미역은 그냥 먹지 않아야 한다. 조그마한 양도 물을 넣으면 팽창하여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한중일을 제외한 다른 나라에서는 거의 먹지 않는 것일까. 한국을 중심으로 한 이웃 나라에서만 예로부터 의식주 하나로 식용한 것 같고 특히, 청해진제국에서 미역이나 다시마는 소금 대용 염분공급용과 선원건강식으로 상당히 유용하게 사용된 것 같다.

완도를 두고 과거에 자주 회자되던 말 중 하나는 "완도는 개도 5백 환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있다.

1961년에 고액권 5백 환이 발행됐는데 지금으로 따지면 5만원권이다. 1950~1960년대 일본으로 수출하던 김은 당시 우리나라 국가재정의 바탕이었다. 한국전쟁과 군사 쿠테타로 살길이 막막하던 우리에게 국민의 재정적 부담을 덜어준 국가의 효자산업이 바로 완도를 중심으로 한 김 수출이었다. 이러한 김 수출의 호황이 완도에서는 개도 500환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소리가 나오게 했다.

일본에서는 김을 해태(海苔)라고 한다. 바다의 이끼란 말이다. 바다의 옷이라 하여 해의(海衣)로 부르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일본은 1910년 우리나라를 강점했고 우리의 해조류를 본격적으로 일본에 가져가려고 일본 국내법을 적용해 우리의 산물을 일본으로 반출하기 시작했다.

일본으로 반출된 제품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보완하려고 1913년 5월 14일 조선총독부령 49호로 '해조검사규칙'을 정하여 식산국에서 담당하고 검사소는 세관에 편입시켰다. 1914년 수산물 검사소를 만들고 '검사에 합격한 제품만 일본으로 수출하도록 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 업자들이 직접 완도에 들어와 국립해태시험장(현 완도군농촌지도소 자리)을 운영하면서 완도 어업인들에게 김 생산을 적극 권장하고 독려했다. 

그 결과 1918년 김 총생산량이 137톤이었던 것이 1942년에는 2723톤으로 25년 만에 20배 늘어났다. 당시 일본 수출용 김을 주로 생산했던 곳은 완도였다. 전국 생산량의 80%를 완도에서 생산하여 전량 일본으로 수출했다. 

1945년 해방이 되었다. 6.25 전쟁 중에도 완도에서는 해태를 생산하여 일본으로 수출했다. 1946년 생산실적이 206만 7277속이었던 것이 1967년도에는 521만 9988속을 생산하여 97%를 일본으로 수출했던 것. 이때 완도에서는 "개가 5백 환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우스개 말이 나온 것이다. 1961년 5백 환짜리는 지금으로 따지면 10만 원을 약간 넘는다.

이렇게 완도의 김 수출은 국가재정에 크게 기여했다. 이승만 정권이 미국에서 원조를 받아 나라 살림을 꾸려가던 때였다. 외화는 스스로 벌어야만 했다. 그러나 외화를 벌어들일 재원을 당시에 찾기가 힘들었다. 

군외 김봉민 조합장 이승만에게 생산자금 요청

유일하게 완도에서 생산된 김 수출만이 외화벌이가 되었던 때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완도의 김 수출이 우리나라 경제기반을 좌우했기에 김 수출을 담당하는 수산국을 상공부 산하에 두고, 수산국은 경무대 맞은편에 사무실을 얻어주어 대통령이 수시로 점검할 수 있도록 하는 조치를 취했다. 

'김 생산은 곧 돈'이라는 개념에 이승만은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 상공부 수산국을 만들었다. 그때 완도에서는 김 생산을 위하여 9개의 조합을 운영했다. 완도, 군외, 신지, 고금, 약산, 금일, 금당, 소안, 노화이다. 이 완도의 조합장은 수시로 대통령을 독대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돼 상공부장관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통령과 면담이 가능했다. 

당시 군외조합장 김봉민 씨는 전도금 관계로 이승만 대통령을 면담하고 생산자금을 지원해 주도록 요청한다. 대통령은 즉석에서 상공부장관을 불러 군외조합이 원하는 전도금을 지원해 주도록 하명했다. 김봉민 조합장은 이 이야기를 사석에서 자랑삼아서 자주 했다. 정영래 전완도문화원장은 "당시 군외조합은 큰 조합이었다. 다른 조합장 앞에서 자랑할 만도 하였다"라며 당시의 상황을 회상했다고.

완도에서 생산된 김을 수출하려면 지구별로 조합에서 수집하고, 수산물검사소에서 검사를 마치면 수협에서 부찰하여 수출상사를 통해 일본으로 수출했다. 

1960년대 김 수출을 주도했던 회사는 삼성, 금성, 효성, 대한전선, 영풍상사 등으로 김 수출이 지금의 대 재벌그룹을 만들어낸 초석이 된 것. 완도의 김은 대한민국의 재정기반이 되었고 한국 대그룹의 성장기반이었다. 

완도의 대일수출용 김 검사는 1924년부터 조선총독부령 제84호에 의거하여 검사가 실시됐다. 1917년 설립된 완도해태수산조합은 1922년에는 업종별 수산조합을 지역별 해태어업조합으로 명칭을 바꾸면서 완도에는 '해태어업조합연합회'가 발족하게 된다. 

이는 현재 수협중앙회의 소속이며 중앙회의 제일 큰 조직이었다. 어업조합연합회 아래는 지구별 어업조합을 두었다. 수협중앙회(어업조합연합회)가 대도시 이전계획에 따라 목포와 여수로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완도수협 건물을 완도중학교에 기증했다.  <계속>

완도신문 해양역사문화 포럼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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