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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완도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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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완도 청산면 여서리에 위치한 낚시의 천국 여서도. 여객선을 타면 3시간가량 걸리는 여서리 천혜의 자연경관이 사람들을 반긴다. 거친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높은 돌담이 특색있고 섬 주변에 다양한 어종이 살고 있어 낚시인들에게는 그야말로 천국의 섬으로 알려진 곳.

전국 낚시동호회 회원들이 낚싯배를 빌려 타고 여러 명 무리 지어 여서도에 도착하면 당일치기나 며칠간 섬에 머물면서 만족할만한 낚시 조과를 얻는다. 가끔 대물을 걸어 SNS에 인증샷을 올려 주변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곤 한다. 꾼들에게 나름대로 정해놓은 낚시 장소가 있다. 일명 포인트라 부르는 곳에 그들만이 알고 있는 바닷속 비밀이 숨겨진 듯하다.

포인트 많은 낚시천국 여서도

여서도 본섬과 떨어진 성여는 독립여로써 날씨가 좋아야만 진입 가능하단다. 감성돔과 큰 벵에돔이 자주 출몰해서 짜릿한 손맛을 안겨주기에 포인트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볼락이 많이 잡히는 볼락개, 서너 명 내려서 낚시를 즐기는 해남나리, 수심이 얕고 파도가 적당한 날에 조과를 보이는 홋개, 크고 작은 여가 발달해 있는 높은나리, 무내미, 수중여가 넓게 퍼져 있고 포말이 발생할 때 조과를 보인다는 거시나리, 급경사를 이루며 조류가 매우 빠르고 조금때에 조과가 있는 큰무생이, 썰물 때 수심이 1~2m 정도 낮아 잔잔한 날보다 파도가 조금 있을 때 조황이 있는 대평, 작은개와 큰무생이 사이 조류 흐름이 원활해서 좋은 큰북, 꾸준한 조과를 보여 자리다툼이 치열한 딴여, 갯바위에 돌김이 많이 붙어 미끄러운 노루목, 야영이 가능하고 사리물때에 조황이 좋아서 꾼들이 많이 찾는다는 작은개, 작은떡바위, 큰떡바위, 바람 부는 날에 인기가 더 좋다는 멀개 등 마니아들은 바다의 속사정까지 이미 꿰뚫고 있다.

그중에서도 여서도를 대표할만한 포인트는 이진여. 평균 수심 7m 안팎으로 주변에 크고 작은 수중여가 발달해 포인트로서의 여건이 가장 좋은 편이란다.

국내 낚시 100년의 변천사
 
ⓒ FTV 한국낚시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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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낚시 100년사를 펴낸 사람이 있다. 낚시기자 30년 세월 취재기록을 엮은 도서 출판 예조원의 김국률 대표이다. 그는 해방 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국내 낚시역사의 흐름을 파악하여 지난 2018년 책을 냈다.

그해 일산 킨텍스에서는 한국국제낚시박람회를 개최했다. 한국낚시 100년사를 기념하는 행사였다. 낚시박람회는 낚시와 관련한 역대 최대규모 전시행사가 펼쳐졌고, 행사내용 중 사진으로 보는 국내 낚시변천사는 전국 낚시인들의 관심을 끌었다.

1945년 서울에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낚시점이 등장한다. 윤수겸씨가 운영한 제1호 낚시점은 명동파출소 옆 황해상회였다. 같은 시기 을지로 3가에는 공영어구상회가 문을 열었고, 남대문 2가에는 미도파어구점이, 그리고 남대문 3가에는 망구어구점이 줄줄이 등장한다.

그곳에서는 낚시 도구만 파는 게 아니라 각종 어구를 판매해서 낚시점보다는 어구상이나 어구점으로 간판을 달고 전국 유통망을 형성했다. 일제강점기 일본인이 운영한 것을 이어받은 게 대부분이었다고. 

순차적으로 국내 최초의 낚시동호회가 결성되어 백승천, 김성국, 최영달, 이병일 등이 해방 후 국내 낚시 문화를 이끌었다. 이때는 강가나 습지에서 주로 낚시가 이뤄졌다.

1950년대 이르러서는 통대나무 낚시가 유행했고, 대나무 낚시는 항구 주변 바닷가에서 오랫동안 이어졌다. 1957년 을왕리 저수지에서 서울신문 주최로 제1회 전국낚시경기대회가 열렸다. 사회 저명인사들이 대거 낚시인에 포함됐고 우승자에게는 대통령 표창을 수여했다.

비슷한 시기 <한국일보> 주최로 수원 원천저수지에서 제1회 전국낚시선수권대회를 개최했고 500여 명이 참여하여 성황리에 마쳤다. 점차 낚시 인구가 늘어나자 업체는 새로운 낚시 도구를 개발했다.

1960년대 이르러서는 대나무를 잘라서 이어 꽂는 이음식 낚싯대가 인기를 끌면서 한성근씨가 만든 한작, 보령에 사는 주정기씨가 만든 주작, 타 업체의 용작, 성작 같은 낚싯대가 주를 이루며 시판됐다.

그러다가 1968년에 유리섬유 소재인 글래스로드 낚싯대가 만들어졌다. 70년대에는 일명 출조파가 줄을 이으면서 가족 나들이 출조 문화가 성행했다. 글래스로드 등장 이후 마침내 바다낚시가 인기를 끌었다.

전국의 갯바위 낚시가 활기를 띠면서 도시 사람들은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까지 원정 출조했다. 그들은 제주도 문섬에서 혹돔을 잡거나 사수도 출조에 이어 추자도의 잿방어 낚시에 빠져들었다. 1970년대 이르러서 새로운 장르로 바다낚시의 서막을 올렸다.
 
ⓒ FTV 한국낚시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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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서도 바다낚시 누가 먼저 시작했나

바다낚시가 활기를 띠면서 1979년 이동식씨가 추자도에서 227m 저립(재방어)을 낚아 올려 전국 매체에 소개됐다. 낚시인들은 열광했다. 1982년에는 배용수 씨가 240m를 기록했고, 같은 해 오부일 씨가 129kg의 다랑어를 낚아 올려 세계공인 기록을 세웠다고 한다. 추자도 인근과 완도의 여서도가 전국에 있는 낚시인들에게 알려지게 된 배경이다. 

1987년 정부는 운동화, 도자기, 컬러TV, 냉장고, 낚싯대 등을 10대 품목에 선정해 국내외 시장을 공략했다. 이때 카본낚싯대 출시와 함께 크릴새우 미끼가 등장해 본격적으로 바다낚시 대중화 시대가 열렸다. 여러 가지 출조 방식과 함께 대상 어종이 다양해졌으며, 승합차의 등장으로 전국각지에서는 바다낚시가 유행처럼 번져 국내 레저문화로 자리 잡았다.

그런데, 지난 2005년 여서도에서는 선사 시대 유물인 동물 뼈로 만든 골각기가 출토되면서 작살 도구와 함께 결합식 낚싯바늘이 다량 발견됐다. 역사학계 반응은 뜨거웠다. 때 묻지 않은 섬, 오래전 여서도에서는 누군가 낚시를 하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어디에서 왔으며 무엇을 하며 이곳에 정착한 것일까?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완도신문에도 실렸습니다. 글쓴이는 다큐사진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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