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한 해 농사를 무사히 마쳤다.
▲ 양배추 수확 한 해 농사를 무사히 마쳤다.
ⓒ 황승희

관련사진보기

 
김장배추를 뽑는 것으로 한 해 농사를 무사히 마쳤다.

회사 말고 내 밭으로 출근하면 좋은 점이 많다. 그중에 좋은 것 하나는 바로 아침마다 화장을 안 해도 되는 것이다. 더불어 머리도 안 감아도 된다. 대략 며칠을 안 감아봤는지 기록을 따져본 적이 있는데... 그 실상을 알면 독자로 하여금 구토를 유발할 염려가 있어서 안 밝히는 게 좋을 것 같다.

처음 하루 이틀이 가렵지 문제 될 게 없다. 너무 편하다. 샴푸도 아끼고 아주 좋다. 머리만 안 감아도 외출에 걸리는 시간은 4분 23초면 충분하다. 그래서 내 외출 패션의 화룡점정은 모자이며 떡진 머리를 감싸 안아주는 집안에서의 두건은 의복이라 아니할 수 없다. 맨 얼굴, 떡 진 머리 그리고 모자. 성스러운 진격의 삼위일체가 완성되었다.

그러나 화장하고는 달리 선크림은 발라야 한다는 것을 안 지는 얼마 안 되었다. 그것도 잘 까먹어서 맨얼굴로 밭에 다녀오기 일쑤이다. 그렇게 맨얼굴로 텃밭 농사를 2~3년 하다 보니 어느 날,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는데 왼쪽 눈 밑에 거뭇거뭇한 게 있다. 

'이게 말로만 듣던 기미구나.'

기미가 뭔지 모를 때가 있었다. 주근깨는 보지 않아도 말에서처럼 깨라는 형상이 그려지니까 저절로 알 수가 있는데 대체 이 기미란 무엇이란 말인가, 상황이 어떻게 되어가는 것을 느낌으로 알아차릴 때 쓰는 '어떤 기미가 보인다' 할 때 그 기미가 혹 이 기미일까? 암튼.

퇴사하고 밭농사하면 좋은 점 중에 또 하나는 옷이 많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퇴사하면 옷 살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나의 기존 출퇴근복으로는 백수복으로 쓸만한 게 별로 없다는 걸 깨닫는 데는 삼일이면 충분했다. 그래서 퇴사한 첫 해에 엄청 사들인 것은 계절별 일명 '잠바'(점퍼)였다.

막 입기 좋다는 잠바, 막 사는 백수복으로도 딱이다. 텃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잠옷, 평상복, 외출복이 다 동시에 가능하다는 특장점이 있다. 풍성한 허리와 잘록한 가슴, 기골이 장대한 나의 저주받은 체형을 커버해주는 감사한 기능도 갖춘 것이 잠바이다.

여름엔 여름 잠바와 레깅스, 겨울엔 겨울 잠바와 솜들은 절 바지, 이것은 잠바와 기똥차게 어울리는 패션이며 나만의 꿀팁이로다. 잠바에 모자가 달렸다면 아마 대여섯 살은 어려 보일 수도 있으니 주의하기 바란다. 어쨌든 옷장에 풍성한 잠바들을 보고 있자니 이제는 진짜 옷 살 일이 없어서 참 좋다.

얼마 전, 고구마를 캐느라 무리했는지 허리디스크가 다시 재발한 듯 아팠다. 침을 맞고 뒤뚱거리며 나오는데 주차장까지 시장 거리를 걸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주 오래간만에 눈에 들어온 잠바 하나, 침 맞으러 갈 때도 그랬고 나와서도 또 눈에 들어온 아까 그 잠바. 튀지 않는 고~상한 쥐색이 탐났다.

일단 지나쳤다. 이제 차까지는 다섯 발자국 정도 남았나? 고지를 눈앞에 두고는 결국 발걸음을 돌렸다. '딱 이만 원. 이만 원이면 사겠어.' 그럴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사장님은 어느새 나와서 나를 보며 반갑게 서있었다. 마치 한 마리 가젤을 바라보는 아마존 초원 치타의 눈이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다시 돌아설 수는 없는... 올가미에 착 걸린 느낌이랄까? 승패는 이미 갈린 듯한 이 예감을 쳐내지도 못하고 불로 뛰어드는 나는 불나방이었다.

"어서 오세용~"
"음... 얼마예요?"
"3만 원이에용~"
"아... 좀 비싸서..."
"5000원 깎아주께용~. 아침이니까"


지는 싸움에 쨉이라도 날려보았지만 내 손엔 어느새 검은 봉지가 들려있었다. 사장님들은 비싸다고 할 손님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손님이 예상할 금액에다 살짝 얹어서 부르는데 도가 트신 분들 같다.

배고플 때는 장보는 게 아닌데 말이다. 아플 때 역시 아프니까 나한테 더 잘해주자는... 아무 데나 명분을 갖다 붙이는 실수. 하룻밤 자고 아침에 그 잠바를 보는 순간 드는 생각.

'으으으, 저 칙칙한 쥐색. 저걸 나는 왜 샀을까?'

결국 이 잠바의 운명은......? 다음 밭에 갈 때 가져갔다.

"엄마, 엄마 줄려고 작업복 하나 샀어. 이쁘지?"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모자, #잠바, #퇴사, #텃밭농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산에서 두 마리 고양이 집사입니다. 오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고 부모님과 밭농사일을 하고 글쓰기를 합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