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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선을 앞둔 한국에서는 그 어느때보다도 '청년'의 존재가 뜨겁게 호명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청년 표심을 잡기 위해 각종 청년 관련 정책에 골몰하는 후보들을 보며, 청년이라는 단어가 새정치나 혁신의 상징으로 올라선 현실을 실감한다. 

사회적으로 민중에 대한 억압과 통제가 극에 달했던 제국 일본에서도 청년들은 변혁을 갈구하던 주체였다. 젊은 학생들은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고서 폭력적인 제국 체제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국가는 이들이 요구하는 '새정치'에 귀를 닫고서 투옥과 고문 등 탄압으로 응수했다.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국체사상의 광풍과 거듭되는 대외전쟁 속에서, 청년들이 꿈꾸던 새정치는 설자리가 없었다(관련 기사: 잘 알려지지 않은 '오야코동'의 과거).

시대가 품지 못한 청년
 
여동생 와카나는 오빠 미노루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이에 해병단(일본 해군의 교육훈련 시설) 교관들은 '전의를 상실시킨다'는 이유로 와카나의 편지를 문제 삼으며 미노루를 질책했다. 미노루는 편지까지 검열받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일기에 남겼다.
▲ 여동생 와카나와 함께 여동생 와카나는 오빠 미노루에게 자주 편지를 썼다. 이에 해병단(일본 해군의 교육훈련 시설) 교관들은 "전의를 상실시킨다"는 이유로 와카나의 편지를 문제 삼으며 미노루를 질책했다. 미노루는 편지까지 검열받는 현실에 대한 불만을 일기에 남겼다.
ⓒ 니시와라 와카나(西原若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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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어뢰 카이텐(回天)특공대원이었던 와다 미노루(和田稔) 소위가 남긴 수기는, 입에 재갈이 물린 채 국가에 의해 소모품 취급을 받았던 청년의 비극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는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부터 출전 후 인간어뢰에 갇혀 숨지기까지, 자신이 학교와 군대에서 느낀 감상을 무려 36권에 달하는 대학노트에 기록했다.

청년 미노루는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을 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군사주의로 물든 중고등학교 교육을 비판하고, 종교의 수준으로까지 이어지는 천황숭배에 의문을 표한다. 미노루가 품고 있던 사명감은, 그가 고등학교 입학 3일 뒤에 쓴 일기에 드러난다.
 
"시대의 풍조에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는 것, 현대 전체주의의 강제적 해석에 부화뇌동하는 것, 저급한 군사주의에 가담하는 것은 반드시 배격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자주적으로, 일본민족의 사명을 실현하는 것에 참가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1940년 4월 17일)

그러나 이미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총력전 체제의 제국 일본에서 그는 이상을 펼치기 어려웠다. 국가는 잠재적 동원 대상자인 소년들에게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칠 것'을 당연한 미덕으로서 주입했다. 전쟁이 예찬되고 자유가 억압되는 사회를 살아가며, 미노루는 동요와 방황을 거듭한다. 미노루는 "이 무서운 세상에서 또 하나의 신념이 사라졌다"고 까지 쓴다.

독소전쟁의 개전과 일미 관계의 악화를 지켜보며, 그는 "대학 입시를 보지 않아도 좋다. 그저 죽는 것만이 나의 목적이 돼 버렸다"고 내면의 불안을 털어놓는다. 그러나 폭주의 길을 걷던 제국 일본의 지도부가 이런 청년의 불안에 귀기울였을 리 만무하다.
 
미노루는 학교가 지성을 기르는 곳이 아닌 병정을 만드는 시설로 전락한 현실에 대해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 중학교 졸업, 고등학교 입학 시의 미노루 미노루는 학교가 지성을 기르는 곳이 아닌 병정을 만드는 시설로 전락한 현실에 대해 한탄하는 글을 남겼다.
ⓒ 치쿠마서방(筑摩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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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루는 무책임한 제국의 지도자들을 '이기주의'로 비판하며, 그들이 결국 국민 전체를 사지로 내몰 것을 예상했다. 결국 1941년 12월 8일, 미국과 영국을 상대로 한 새로운 전쟁의 개전 소식이 들려온다.

어두운 시대 속에서도 그는 면학정진을 거듭해 그토록 원하던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입학한다. 그러나 신문지면과 라디오 등을 통해 먼 발치서 전해지던 전쟁의 현실은 어느새 그의 일상으로까지 파고 들어온다. 1943년, 독일군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참패, 에투 섬 일본군 수비대의 전멸, 이탈리아의 무조건 항복 등의 암울한 소식들이 거듭 전해지는 가운데 미노루는 마음의 준비를 한다.

그 해 말 그동안 법·문과 대학생을 대상으로 하던 징병유예가 폐지되면서, 법학부 학생이던 미노루는 결국 학도병으로 동원된다. 그는 자신이 장차 미래에 펼칠 수 있는 수많은 꿈보다도, 지금 당장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가치있게 평가되는 현실에 절망한다(관련 기사: 패전 후 돌아온 일본군 학도병이 어머니께 겨우 한 말).

내면의 소용돌이와 안타까운 마지막

그의 수기에는, 나라를 위해 죽어야만 하는 스스로의 운명을 납득하고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 노력들이 엿보인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그에게, 무의미한 죽음은 견딜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죽음이 일본 공동체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의 소용돌이는 잠재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늘 날에는, 국가에 대한 신뢰가 큰 사람의 죽음을 아름답게 그려준다. 나는 꼭, '어머니'나 다른 무엇인가를 부르는 일 없이 죽으러 갈 것이다. 다만 그 죽음이, 나의 생애를 의미있게 해주는 것인지 아닌지, 그것만을 절규하며 갈 생각이다."(1943년 10월 9일)
 
미노루는 일상화된 죽음을 접하며 고뇌의 나날을 보냈다.
▲ 카이덴 기지에서의 미노루(중앙) 미노루는 일상화된 죽음을 접하며 고뇌의 나날을 보냈다.
ⓒ 치쿠마서방(筑摩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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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에 입대한 뒤, 미노루는 '군인 정신'이 철저하게 주입되던 환경 속에서도 삶과 죽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자문한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옥쇄'나 '전사' 소식은 그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못박는 것만 같았다. 그러던 와중, '체격' 문제로 항공병과 지원에 탈락하고 좌절하던 그에게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 
 
"어뢰정이라는 것은, 2분대 토무라 대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렇게 위험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지금까지 가장 전사율이 높은 것은 비행기, 그 다음이 구축함이라는 것으로, 아직 정말로 활약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긴 하겠지만, 어뢰정 대원의 사망률이 무척이나 낮은 것 같다." (1944년 5월 26일)

죽음에 대한 고뇌가 이어지던 일기 속에서, 처음으로 삶에 대한 희망이 엿보인다. 스스로 죽음의 운명을 납득하고자 노력하던 그는 어뢰정의 생존율이 높다는 이야기에 반색하는 듯하다. 이 희망의 끈을 잡고 싶었던 것인지, 그는 결국 어뢰를 다루는 수뢰학교에 지원해 합격한다. 그러나 이때의 선택이 결국 그의 생사를 좌우하고 말았다.

극단적으로 악화되던 전황 속에서, 결국 탑승원의 자폭을 전제로 하는 '특공'이 실시되기에 이른다(관련기사: "충성 빛나리"... 자국민 죽음 내몬 일본의 끔찍 '신화'). 어뢰정을 선택한 그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출격시 100% 사망하는 '인간어뢰 카이텐'이었다. 미노루는 체념한 듯 카이텐 특공에 지원한다. 카이텐 지원 후, 미노루는 부모님을 생각하며 자신의 심정을 적어내려간다. 
 
"어머니의 아들이 전쟁에 나가, 거기서 저의 작은 목숨으로 적을 격침시키는 큰 공을 세운다면, 그때는 저를 어머니의 아들이라기보다도 조국의 아들로서 돌아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반드시 제가 어머니 아버지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부르짖으며 죽어가게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1944년 10월 18일)

카이텐 기지에 배속된 이후, 죽음은 일상화된다. 함께 지내던 전우들이 공습을 맞고, 훈련 중 사고를 당해, 특공에 나가 목숨을 잃는 날들이 이어진다. 그 죽음들을 지켜보며, 미노루는 자신의 생명도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해군군인'으로서 특공의 각오를 다지던 그는, 결국 카이텐 출격 직전에 이르러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일기장 위에 고백한다.
 
일본군은 특공 출격에 앞서 국가신토적 의식을 행하며 특공대원의 사기를 북돋고자 했다. 미노루는 적을 발견하지 못해 귀항할 수 있었지만, 두달 뒤 훈련 중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 카이텐 출격 당일 단검을 수여받는 미노루 일본군은 특공 출격에 앞서 국가신토적 의식을 행하며 특공대원의 사기를 북돋고자 했다. 미노루는 적을 발견하지 못해 귀항할 수 있었지만, 두달 뒤 훈련 중 사고로 목숨을 잃게 된다.
ⓒ 치쿠마서방(筑摩書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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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자신이 없다. 부모님의 얼굴을 뵈면 무엇이든 다 털어놓고 싶은 기분이 돼 견딜 수가 없다. 부모님은 뭐라고 생각하실지, 뭐라고 말씀하실지."(1945년 5월 15일)

천만다행이도, 미노루와 인간어뢰를 실은 어뢰정은 적 함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기지로 복귀한다. 그러나, 사망률 100%에 이르는 카이텐 출격을 피했음에도 결국 그는 자신이 고뇌하던 죽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1945년 7월 25일, 모의 카이텐을 타고 훈련 중이던 그는 기기 이상으로 바닷속에 가라앉게 됐다. 때마침 벌어진 미군의 공습으로, 기지의 동료들은 그를 구조하지 못했다.

바다에 가라앉은 미노루는 10시간 이상을 어뢰 안에서 살아 있었고, 결국 심해의 어둠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질식사했다. 천황이 항복을 선언하기 불과 20일 전의 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9월에 이르러서야 수습돼 화장됐다고 한다.

한때 세상을 바꾸겠다는 열정으로 가득했던 청년은 체제의 폭력 아래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고, 그 침묵은 죽음으로 영원히 이어지게 됐다. 만약 당시의 제국 일본이 미노루와 같은 청년들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였다면, 무모한 침략전쟁과 비극적인 패전의 역사는 달라질 수 있었을까? 청년 미노루가 침묵 속에 갇혀 펼치지 못한 꿈을 생각하며, 청년 정치의 의미에 대해 곱씹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 인용된 미노루의 글들은, 미노루의 유족들이 그의 일기장과 편지를 책으로 엮은 <와다츠미의 목소리 사라지는 일 없이>(わだつみのこえ消えることなく, 1967, 筑摩書房)에서 담아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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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인의 전쟁체험에 관한 연구에 정진하고 있는 오사카 거주 유학생입니다. 한일친선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편견과 혐오 너머로 새로운 지면을 여는 데 기여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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