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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이 지난 12월 1일 국회 정문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국가보안법폐지국민행동이 지난 12월 1일 국회 정문앞에서 "국가보안법 폐지 촉구" 기자회견을 진행하고 있다.
ⓒ 서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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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일전쟁 후 1900년에 일본에서 제정된 치안경찰법과 1928년 치안유지법은 사회주의와 노동운동을 제한하면서 국가권력을 우선으로 하려 한 대표적인 법률이다. 일본통치하의 조선도 이러한 반사회주의와 반공주의의 영향하에 있었고, 이는 해방 후 오늘날까지도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해방 뒤 자유민주주의를 강조하면서, 한미협력, 한미일공조를 자연스러운 외교관계로 받아들이려 한 것은, 이미 조선식민지시대에 나타난 현상이 해방후에도 관성으로 나타난 결과다. 특별히, 식민지시대 경찰 등 사정기관에서 사상을 통제하는 기술을 익힌 친일부역자들이 해방 후에도 그대로 경험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통일보다 분단을 조장하는 세력이 뒷배가 되었기 때문이다.

식민지조선에서 반공은 일본보다 더욱 철저하게 강조되었다. 공산주의에 얼마큼  경도되어 있는가를 사유재산제에 대한 태도로 가늠하려고 했다. 사유재산제에 반대하는 자를 공산주의로 간주하여, 무자비하게 탄압하려고 했다. 한편, 봉오동전투 이후, 조선 북부에 더 많은 일본군과 경찰을 투입했는데, 독립군과의 전쟁 뿐만이 아니라, 조선 북부를 근거로 한 독립군과 공산국가 소련과의 연계를 차단시키기 위함이었다.

지난 호에서는 일진회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일진회에는 많은 군과 경찰이 가담하고 있었는데, 일진회가 해산된 뒤 이들 중 일부는 만주로 건너가 직업경험을 살리려고 했다.

해방 후 세대를 건너뛰면서 이들은 다시 남한으로 돌아와, 친일파 중에서도 군과 경찰은 일제식민지에 미군정을 덧붙여 가는 가운데 사회 곳곳에서 뿌리내리면서 생존이 가능하게 된다. 제헌국회에서는 1948년 9월 반민족행위처벌법이 통과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 의해 친일파를 재판에 회부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부가 다수 기용한 친일파에 의해 활동이 부진하였고, 1949년 6월 특별경찰대가 해산되어 사실상 기능을 상실하였다. 반민특위의 활동이 부진하였던 배경에는, 1948년 12월 반국가단체를 규제하기 위해 제정된 법률 국가보안법이 있다.

국가보안법은 대한민국 내에서 자유민주적 질서를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단체의 활동을 규제하기 위해 제정되었는데, 일제시대의 치안유지법과 보안법을 기반으로 제정된 법률이다. 국가보안법에 의존하며, 일제시대 군과 경찰에서 종사한 친일협력자들은 익숙한 직업경험을 배경으로 해방 후 활용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하게 된다. 해방 후 시작하는 냉전에 맞물려 군과 경찰출신자들의 반공탄압 경험을 살릴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사상검사와 특고의 팀플레이

특별고등경찰이라면, 줄여서 특고라고 부른다. 일제시대 국체호지(国体護持)를 위한다며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및 국가 존재를 부인하는 자 등을 사찰하고, 감독하는 것을 목적으로한 비밀경찰이다. 우리의 기억으로는 독립운동가를 탄압한 악명높은 경찰을 떠오르게 한다.

사상검사는 이들 특고와 함께 치안유지법을 운용하는 두 축의 하나가 된다. 특고가 더 두려운 존재로 부각되었던 것은, 치안유지법의 사법처리는 사상검사가 사법경찰관을 지휘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실질적으로는 특고경찰이 치안유지법을 적용시켜, 사상범을 취조하는 독무대가 되었던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물론 공판이 개시된 이후에는 사상검사가 주도권을 쥐게 된다.

패전전 일본국내에서 치안유지법으로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된 경우, 기소처분이 되는 것은 1할 정도로 6600건인데 비해, 식민지조선에서는 기소율도 높았지만 유죄판결을 받은 실제 인원은 일본과 비슷했다. 한편 일본에서 1936년부터 실시된 사상범 보호관찰제도에 의해 보호관찰의 대상이 된 인원수는 5300명(44년 6월까지)이었는데, 식민지조선에서 보호관찰 대상은 4100명이었다.

패전 직후, 특고경찰은 최대인원이 9000여명이었는데, 사상검사는 최대시 78명에 지나지 않았다. 특고경찰의 역할을 사상검사와 구분하여 보면, 특고경찰이 폭력으로 사상범을 취조하고 있는데 비해, 사상검사는 송치된 사상범에 대한 '전향'에 힘을 기울였다.

1945년 10월 연합군사령부의 지시에 의해 일본에서는 치안유지법은 폐지되고, 특고출신 경찰은 일시적으로 공직에서 추방된다. 하지만, 사상검사는 그대로 남아 공안부문을 담당하게 된다. 냉전이 심화되고, 공직추방이 해제되면서, 특고출신 경찰관도 경시청과 공안조사청 등로 복직되면서, 좌익운동의 확산을 막는 일선에 투입된다.

높아진 사회적 면역력

미군정과 정부를 수립하여 가는 과정에서, 일본과 한국에서 특고출신의 삶이 유사하게 보이는 것은, 해방후 냉전이라는 시간적인 배경이 바로 뒤따라 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에서는 이들의 경험이 한국에서와 같이 비난이나 추문을 당하지 않고, 고위직으로 오르거나, 정계에 발을 디디는 경우도 나타나고 있다.

해방후 국가보안법을 일본보다 더욱 철저하게 반공주의에 입각하여 적용하려 했던 것은, 원래 식민지시대에 일어난 탄압이 일본보다 훨씬 강도 높게 나타났던 것의 연장선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자유민주주의가 훼손당할까? 국가보안법을 폐지하면 사유재산제가 침해당할까? 그대로 두면 남남갈등을 유발시키는 논쟁거리가 되는 것은 아닐까? 이미 그 정도 수준의 선택에 대한 사회적 면역력은 갖추어 있기 때문에 폐지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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