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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부턴가 변을 보는데 심상치 않았다. 화장지에 핏기가 묻어 나오더니 이제는 핏물이 흥건하다. '설마 아니겠지, 늘 그래 왔듯이 금세 가시겠지' 하는 마음이 이번에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찜찜한 기분이 들었다.

그날부터 유튜브에 '치질'을 검색어로 넣고 온갖 동영상을 찾아보았다. 내로라하는 엉덩이 전문가들이 치질의 종류와 진행 정도를 비롯해 각종 지식을 알기 쉽게 전수해주었다. 1·2기는 좌욕과 연고 같은 약물 처방으로 관리만 잘해주면 나을 수 있지만, 3·4기부터는 수술을 권장한다고 말했다. 나 스스로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한 모양인지 지식을 흡수하는 속도가 빨랐다.

'절대 병원엔 가고 싶지 않아', '수술하면 계획한 일정이 다 틀어질 수도 있어'라는 생각에 내 증상이 3·4가 아니라 1·2기일 거라고 끊임없이 정당화했다. 그러나 유튜브 겉핥기로 얻은 박약한 지식은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했다. 망설임의 시기만 길어졌다. 

나는 약국에서 치질 연고와 혈관을 강화시켜 증상을 개선해주는 먹는 약을 샀다. 환부에 연고를 잘 바르고 주기적으로 좌욕을 하고, 약도 꾸준히 먹었다. 조금 나아지는가 싶었지만, 그때뿐이었다. 어느 날부터는 피부꼬리 같은 늘어진 혹이 만져지는 느낌이 들었다. 아뿔싸. 핵이구나. 그렇다. 나는 부끄러움과 두려움에 자가치료를 해보려다 치료 적기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대부분의 치질환자는 아마도 나 같은 경로를 겪을 것이다.

굴욕 자세와 수술 판정

'이럴 리가 없는데…' 그날 아침까지도 병원에 갈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어렵사리 병원에 갔다. 새해를 기분 좋게 시작하려면 연말에 무언가 매듭을 짓고 가야 할 것 같아 그랬다.

"별거 아닌데요... 그래도 최근엔 증상이 많이 좋아졌고..."

괜히 민망했던 나는 의사 앞에서 횡설수설했다. 테이블에 새우잠 자세로 몸을 뉘었다. 그리고 바지를 저스틴 비버처럼 엉거주춤 내려 엉덩이를 깠다. 무언가 차가운 것이 항문을 통해 몸 안으로 들어오더니 연신 사진을 몇 번 찍었다. 사분할 모니터에 상흔이 보였다.

"만성 치열이네요. 치질도 약하게 있구요. 이 정도는 수술 빼고 답이 없어요. 날짜부터 잡읍시다."

굴욕적인 느낌이 들었다. 의사와 간호사는 의도적인 듯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지만 나는 영 쑥스러웠다. 1년 정도 된 것 같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얼마 전이었던 말년 병장 시절이 떠올랐다.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몰래 한참을 더 변기에 앉아 진중문고(부대에 비치된 책)를 읽다가 생긴 듯했다. 불성실에 대한 대가로 나는 6시 방향에 세로로 길게 찢어진 항문을 갖게 된 것이었다. 피검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생각보다 간단한

수술 당일 한 짐을 캐리어에 이고 병원을 찾았다. 금식이라 아침 점심을 걸렀기 때문에 몹시 배가 고팠다. 재차 굴욕 테이블에 누워 환부를 검진받았다. 몇 번 깠다고 그새 엉덩이를 보여주는 게 익숙해졌다. 잔변 제거를 위해 관장약을 넣었다. 10분은 버텨야 한다고 했는데 3분도 채 버티지 못했다. 

앞으로 2박 3일을 묵을 병실에서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기력 보충을 위한 수액 주사를 맞으며 항생제 반응 검사를 기다렸다. 곧바로 내 이름이 불렸다. 수술실에서 의사 선생님이 척추에 하반신 마취주사를 놓았다. 주사 맞은 부위부터 따뜻해지더니 다리로 번져나가 쥐가 난 느낌이 들며 무감각해졌다. 곤장을 맞는 듯한 자세로 엎드려 누웠다. 청테이프로 엉덩이 주변을 당기는 공사를 했다. 무언가 들어가는 듯 불쾌하지만 미약한 느낌이 들었다.

수술은 채 5분도 넘지 않았다. 고기 타는 냄새와 함께 타닥타닥하는 레이저 소리가 들렸다. 염증 부위를 지지는 듯했다. 분주히 오가는 손길에서 무언가를 자르고 꿰매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정말이지 아무런 느낌도 없었다. 현대 의학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느꼈다. 배변 열상을 방지하고자 괄약근을 조금 느슨하게 만들었다고 했다.
 
치질
 치질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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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반신만 마취되었을 뿐인데, 뭐랄까 몸을 가눌 수 없었다. 이송 침대에서 병실 침대로 그대로 데구루루 굴러서 누웠다. 머리가 높은 곳에 있으면 마취약이 두통을 일으킬 수 있어 하룻밤 동안 베개를 벨 수 없었다. 같은 자세로 누워있으니 몸도 뻐근하고 고개를 들면 금세 어지러워져서 그게 제일 힘들었다. 누워서 핸드폰을 하는데 큰 핸드폰을 쓰는 게 처음으로 원망스러웠다. 주사를 꽂은 한 손이 묶여있어서, 한 손으로만 사용하기 무겁고 힘들었다. 

마취는 다섯 시간 정도 더 지속되었다. 점차 다리에 쥐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면서 감각과 움직임이 돌아왔다. 마취가 풀린 뒤부터는 이온음료를 마실 수 있었다. 갈증과 허기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마취가 깨자 무통 주사기를 달았는데, 반나절 정도는 '참을 순 있지만 무시할 순 없는 정도'의 쓰라림이 찾아왔다. 괄약근이라는 곳이 그렇게 힘이 쉽게 들어가는지 처음 알았다. 기침을 해도, 소변을 봐도, 재채기를 해도 힘이 들어가 따끔했다.

올빼미 성향인데도 그날따라 일찍 잠들어 베개 없이 하룻밤을 꼬박 개운하게 잘 수 있었다. 같이 병실을 쓰는 사람의 코골이가 너무 심해 잠을 설칠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기력 소모가 컸던 모양이다. 다음 날 아침부터는 정말 통증이 극히 미미해졌다. 아침에 첫 밥으로 죽을 먹는데, 변변치 않은 심심한 밥상에도 정말 감동적인 맛이 느껴졌다.

주기적으로 좌욕을 했고, 식이섬유제를 먹었다. 한결 나아진 기분이 들었다. 딱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수직으로 앉는 게 가능해졌다. 거동도 자유로워졌다. 거즈를 삼각형으로 접어서 주기적으로 갈아주었다. 번거롭지만 환부에 영그는 핏물과 진물 관리를 약 2주 정도 지속해야 한다.

베개 하나를 벨 수 있을 뿐인데 삶의 질이 확 올라갔다. 하루정도 더 쉬고 나는 퇴원을 했고 첫 배변에 성공했다. 경험자들의 우려와 달리 불행 중 다행으로 크게 아프지 않아 다행이었다. 

굴욕은 잠시, 해방감은 오래

처음 이 고민을 주변 지인에게 알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소위 '치밍아웃'을 했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이미 핵을 보유하고 있었다. 내가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자 주변에서는 "사실 나도..." 라고 운을 떼기 시작했다.

이미 수술을 치른 이는 경험담을 이야기해주었고, 수술을 망설이고 있는 이들은 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항문 하나가 얼마나 삶의 질을 망가뜨리는지 공감하고 있었다. 

항문 질환은 젊은 사람도 많이 앓고 있었다. 병실은 노년과 청년이 반반이었다. 육식도 많이 하고 오래 앉아있는 현대인들에게 치질은 어쩌면 피할 수 없는 병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다들 병원 가기가 무섭고 수치스러워 병을 숨기며 키우고 있었다.

이야기를 해보니 관리 가능한 시기를 넘겨 뒤늦게 자가 치료를 해보다 병을 키운 나 같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만약에 용기를 내어 일찍 병원에 갔다면, 약간의 굴욕만 얻고 약과 연고와 좌욕 정도로 충분히 들어갈 치핵이었을 것이다. 병원에 빨리 갈수록 치핵도 작고 예후도 좋고 고통도 덜하고 빨리 아문다고 한다. 더불어 식습관과 배변 습관도 고칠 계기가 될 수 있다. 나도 조금만 일찍 갈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치질은 항문 질환이지만 치질을 드러내지 못하고 병을 키우게 되는 사회적 조건은 사회병리적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글을 쓴 이유도 최대한 상세한 경험담을 써서, 더 많은 사람이 시기를 놓치지 않고 치료를 받아 최대한 고통을 줄일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내 경험에 병원에는 빛이 있었다.

따라서 비밀리에 핵개발 중인 여러분께서는 하루빨리 의학의 외과적 도움을 받아 CVID(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핵폐기)로 인간의 존엄을 되찾아 해방되시길 바란다. 약간의 용기만 낸다면, 현대의학의 도움을 받아 삶을 뒤흔드는 고통을 너무나도 쉽게 그리고 굉장한 정도로 단축시킬 수 있다. 굴욕은 잠시이고 해방은 오래간다. 앞으로의 세상은 치밍아웃에 용기를 굳이 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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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생.『젊은 생각, 오래된 지혜를 만나다』의 저자, 정치학 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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