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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에 '만약'이란 게 없겠지만, 1860년대 시작된 근대가 우리 힘으로 이뤄졌다면 어땠을까를 늘 생각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우리 근대는 이식된 근대였습니다. 이식된 그 길을 서울에 남아있는 근대건축으로 찾아보려 합니다.[편집자말]
까마득한 기억이지만, 윤정모 소설 <고삐>에서 받았던 충격만큼은 아직도 생생하다. 땅에도 운명이 있다면, 소설 같은 슬픔을 간직한 땅은 얼마일까. 생각 이상이다. 아니 한반도 자체가 그런 운명을 배태한 땅인지도 모른다. 우리 영토지만 우리 게 아닌, 외국 군대가 1백 년 넘게 차지한 땅 이야기다.
 
미군이 촬영한 용산기지. 해방 직후 모습으로 일본군이 사용하던 시설물 윤곽이 확연한 오늘날 미군기지 북쪽 메인포스트에 해당. 남산 산자락 윤곽이 선명함.
▲ 용산기지(1945.09) 미군이 촬영한 용산기지. 해방 직후 모습으로 일본군이 사용하던 시설물 윤곽이 확연한 오늘날 미군기지 북쪽 메인포스트에 해당. 남산 산자락 윤곽이 선명함.
ⓒ 이영천(용산공원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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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은 오래전부터 한양으로 드는 교통요충지다. 마포나루와 양화진이 인접하고, 나루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큰길이 곁에 있다. 여러 이유로 땅은 군사 용도로 최적지였고, 입지적 이점으로 외국인이 거주하며 자유로운 상행위를 하는 개(開)시장이기도 했다. 용산은 둔지산(屯芝山) 부근 1천여 호 가옥과 백만 기 넘는 공동묘지였고, 배 밭이 지천인 이태원이다.
 
만리창으로 상륙한 일본군. 청일전쟁 수행기간 동안 용산은 일제의 조선강압 및 전쟁수행과 후방 물자수탈기지로 활용 되었음.
▲ 청일전쟁 일본군 만리창으로 상륙한 일본군. 청일전쟁 수행기간 동안 용산은 일제의 조선강압 및 전쟁수행과 후방 물자수탈기지로 활용 되었음.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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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땐 왜군이, 병자호란과 임오군란 때는 청이, 갑신정변 이후로 일본군대가 암암리 주둔한다. 청일전쟁 때 만리창(萬里倉)으로 상륙한 일본군이 이곳을 근거지 삼아 전쟁을 수행한다. 또한 경복궁 무력 점령(1894.07)으로 조선을 장악하는 정치·군사 지휘소이자, 전쟁물자를 수탈하는 배후기지로 사용한다. 대한제국은 이곳에 화폐 발행소인 전환국 및 우편·전신취급소, 발전소 등을 설치한다. 궤도를 부설해 전차가 다니기도 했다.

일제가 두 차례에 걸쳐 조성한 병영은 9.074㎢(274.49만 평)다. 한국전쟁 후 미군은 약 3.3㎢(1백만 평)를 사용했다.

용산역과 기지

경인선 개통(1900.07.05)으로 철도 시대가 열렸어도 용산역은 그리 중요한 취급을 받지 못했다. 일제가 경부선(1898)과 경의·경원선 부설권(1903)을 차지하여 한반도 철도를 장악하고, 남만주 철도 연결 문제를 놓고 러시아와 대립하다 전쟁을 일으킨다. 러일전쟁(1904)이다.

그 직후 강압으로 '한일의정서'가 체결된다. 이 조약에 의거 1904∼1906년 용산 땅 300만 평과 남대문 정거장(서울역) 인근 50만 평을 헐값에 징발해간다. 한반도 지배 및 대륙침략을 위한 군사기지 및 철도 용지다. 일제는 경부선 건설을 서두르는 한편, 경의선 건설을 위해 곳곳에서 한국 백성의 노동력과 물자, 토지를 착취해간다.
 
해방직후 용산역과 하얀 모래사장이 지천인 한강 모습. 지금 이촌동과 서빙고동 일부는 1960대 한강 모래를 퍼 날라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생겨난 땅임.
▲ 용산역과 한강(1945.09) 해방직후 용산역과 하얀 모래사장이 지천인 한강 모습. 지금 이촌동과 서빙고동 일부는 1960대 한강 모래를 퍼 날라 공유수면을 매립하여 생겨난 땅임.
ⓒ 이영천(용산공원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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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철도 기점이 경부선 운행개시(1905.01.01.)부터 용산역으로 바뀌고 전쟁 수행 목적으로 역 개발 필요성에 직면한다. 을사늑약 체결 후, 경의선 건설과 동시에 철도역 허브(Hub) 기능을 수행할 조차장(操車場, 출발역 기능을 하며 동일 목적지 화물 열차 연결 선로)으로 용산역을 탈바꿈(1906.11)시킨다. 역 주변 땅을 일본인들에게 나눠주자 '신용산'이라는 거주공간이 형성된다.
 
일제가 조성한 조차장 기능이 아직 살아있는 1984년 용산역 모습. 겨울 한강은 얼어있고, 공사 중인 63빌딩 모습이 보임.
▲ 용산역(1984) 일제가 조성한 조차장 기능이 아직 살아있는 1984년 용산역 모습. 겨울 한강은 얼어있고, 공사 중인 63빌딩 모습이 보임.
ⓒ 서울역사 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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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역이 제 모습을 갖추자 기지 공사를 서두른다. 조선을 지배하려는 통감부의 무력 기반 구축이다. 사령부(1906)를 비롯해 야전 부대 등 제반 군사시설과 아방궁 같은 조선총독관저(1909)가 들어선다. 필동에 있던 '한국주차군사령부'가 이전(1908)해 오고, 사격장 및 제반 부속시설을 건설(1913.11)함으로써 1차 조성이 완료된다. 총면적 3.9㎢(118만 평)다.

2차 조성

일제는 러일전쟁 승리에도 불구하고 러시아를 늘 경계해 왔다. 시베리아횡단철도가 완성(1916)되자 한반도에서 러시아를 경계할 2개 사단 상시주둔군 편제를 준비한다. 일본 육군은 본국 부대와 1∼2년마다 교대해야 하는'한국주차군'체계를 탐탁하지 않게 여긴다.

1차 세계대전 발발(1914)로 세계적 경제 위기에 일본도 예외가 아니어서, 긴축재정이 불가피한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엄청난 재정 소요를 유발하는 한반도 상시주둔군을 일본 정부가 반대하자, 육군은 갖은 방법으로 정부에 저항한다. 이에 일본 의회는 부득불 2개 사단 상시주둔군체계를 승인(1915)한다.

이를 '조선군'이라 부르며 편성을 시작(1916.04)한다. 도중에 3·1 운동이 일어나, 조선군은 물론 본토 병력까지 동원해 만세운동을 진압한다. 용산에 주둔하는 제20사단은 5년 후 편성을 완료(1921.04)한다.

제19사단은 3년 후 편제(1919.02)하여 함경도 나남에 사단 본부를 설치 이전(1919.04)한다. 러시아를 염두에 둔 전진 배치로 호시탐탐 대륙침략을 노리며, 이들에 의해 한·만 지역 수많은 독립군이 타격을 입는다. 하도 악랄하고 사나워 '호병단(虎兵團)'이란 칭호가 붙을 정도다.
 
남산자락 아래 용산 모습. 사진 중앙이 삼각지 로터리로 둥근 구조물이 보임.
▲ 용산일대(1984) 남산자락 아래 용산 모습. 사진 중앙이 삼각지 로터리로 둥근 구조물이 보임.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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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사단 주둔으로 용산기지 확장이 불가피하다. 2차 확장공사(1916.12)에 들어가 6년 후 완료(1922.03)된다. 이때 둔지산 자락 둔지미 마을주민이 보광동 쪽으로 강제 이주 된다. 농토와 분묘 등이 또 훼손된다. 가련한 백성들 삶의 터전이 송두리째 앗긴다.

수탈 지휘소

대공황(1929)이 일본 지배체제에 균열을 일으킨다. 군부 극우 세력은 경제불황 타개책으로 식민지 확장을 꾀해, 관동군이 꾸민 자작극으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1932.03)을 세운다. 곧이어 5·15 사건(1932)이 일어나 만주 침략에 반대하는 총리를 암살하고, 의회를 전복시켜 정부를 장악하는 일이 벌어진다. 만주 점령으로 서구 열강의 압박이 거세지자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1933), 만주를 발판삼아 본격적인 대륙침략에 나선다.

몇 년 후 젊은 장교집단이 내각 원로대신들을 살해하는 2·26 사건(1936)이 일어나고, 그해 11월 나치와 손잡는 방공협정을 맺어 파시즘 체제로 전환, 중일전쟁(1937)이 본격화한다. 군부는 천황을 신격화하는 한편, 전쟁 수행 최고기관인 '대본영(大本營)'을 부활시켜 전권을 장악하고 모든 힘을 전쟁에 쏟을 '국가총동원법'을 공포(1938.04)한다. 나아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1941)함으로써 미국과 맞서는 '태평양전쟁'을 일으킨다.
 
남산에서 촬영한 용산기지 모습. 멀리 한강이 보이고, 높은 건물이 적어 윤곽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음.
▲ 용산기지(1979) 남산에서 촬영한 용산기지 모습. 멀리 한강이 보이고, 높은 건물이 적어 윤곽이 비교적 잘 드러나 있음.
ⓒ 서울역사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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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군사령부는 이때 국가총동원법을 근거로 한반도에서 인력과 물자를 갈취하는 총 지휘소 역할을 한다. 총독부를 앞세워 사회를 통제하고 강제징병 및 징용, 식량을 공출해가는 전시통제체제를 시행한다. 청년을 전장으로 내몰고, 남녀노소를 징용하여 노동력을 징발·착취한다. 젊은 여성을 강제로 끌어다 군 위안소를 차린다. 천인공노할 만행이다.

미군 기지로

섬나라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일본이 항복하고, 남한에 미군이 진군한다. 맥아더는 제1호 포고문 '조선 인민에게 고함(45.09.07)'을 통해 점령군으로서 정체성을 드러낸다. 미군은 용산기지를 '캠프 서빙고'라 명명하고, 미 7사단 사령부로 삼아 각종 부대를 주둔시킨다. 7사단이 미군정청 전위 무력 조직인 까닭이다.

미군 병사들의 생활 습관은 필연적으로 기지 시설변화로 연결된다. 한마디로 기지 내에 미국 타운(Town)이 생긴 것이다. 미군은 기지를 둘러 높은 '철조망 담장'을 설치한다.

민족이 분단되고 한국 정부가 수립(1948.08)된다. 뒤이어 군대가 창설되자, 주한미군은 군사고문단(KMAG) 472명을 용산기지에 남긴 채 철수(1949.06.29)한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텅 빈 기지는 북한군 지휘소가 된다. 1·4후퇴와 서울 재 탈환(1951.03) 과정에서 막대한 공습으로 용산기지 피해가 극심해진다.
 
전쟁기념관 인근 용산기지 북쪽 미군 메인포스트 항공사진임. 1945년 당시와 비교해 엄청나게 변화한 주변 대비, 기지 내부는 큰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음.
▲ 현재 용산기지 전쟁기념관 인근 용산기지 북쪽 미군 메인포스트 항공사진임. 1945년 당시와 비교해 엄청나게 변화한 주변 대비, 기지 내부는 큰 변화가 없음을 알 수 있음.
ⓒ 이영천(용산공원 전시물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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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은 파괴된 기지 복구에 착수, 휴전협정 체결 전(1953.01) 대략 완료하여 동숭동 서울대에 있던 8군사령부를 이전(1953.09.15)해 온다. 이듬해 1월 잔여 공사가 마무리되어 그들만의 배타적 공간이자, 동북아를 향한 냉전 시대 최첨단 지휘소가 세워진다.

우리는 미군 주둔기지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미제(美製)는 무조건 최고라는 맹목은 우리 생각에 각인된 보통명사였고, 미군들이 버린 잔반을 가져다 펄펄 끓인 '꿀꿀이죽'은 이제 부대찌개로 변모하였다. 보세로 대표되는 옷가지는 한때 우리 패션과 유행을 선도했으며, 환치기 달러 장사로 지하경제가 생겨났고 미8군 클럽을 무대 삼아 가수들이 성장하던 시대도 있었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건 '양공주'로 대표되는 이식된 퇴폐공간의 범람이다. 심지어 독재 권력은 공공연하게 '달러벌이'를 내세우며, 이런 공간을 확대재생산 해내기도 했다. 점령지나 다름없는 공간에서 벌어진 미군 범죄행각은 이루 헤아릴 수조차 없다. 우리 정신마저 이들에게 유린당하고 팔려버린 건 아닌지. 소설 '고삐' 속 두 자매처럼 말이다.
 
최근 개방된 미군 장교 숙소. LH공사가 지어 미군에게 임대한 공간을 몇년 전 인계 받아 일반에 공개하고 있음.
▲ 미군 장교 숙소(용산공원) 최근 개방된 미군 장교 숙소. LH공사가 지어 미군에게 임대한 공간을 몇년 전 인계 받아 일반에 공개하고 있음.
ⓒ 이영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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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 반환 약속은 시한을 넘겨 현재 극히 일부분에 그친 수준이나, 머지않아 우리 품으로 돌아온다. 슬픔으로 운명지어진 땅이 이를 극복해내고, 우리 혼이 담긴 천년 가는 공간으로 되살아나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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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레 타인과 소통하는 일이 어렵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도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소통하는 그런 일들을 찾아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보다 쉽고 재미있는 이야기로 서로 교감하면서, 오늘보다는 내일이 더 풍성해지는 삶을 같이 살아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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