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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후는 본래 용인일대의 원과 길을 관리하던 무승이었다. 그는 처인성 전투 승리의 주역이 되었고, 이후 장수로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 김윤후 초상화 김윤후는 본래 용인일대의 원과 길을 관리하던 무승이었다. 그는 처인성 전투 승리의 주역이 되었고, 이후 장수로서 길을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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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1231년 8월, 세계를 사실상 좌지우지했던 몽골제국의 말발굽이 한반도에도 닿기 시작했다. 본디 중국 대륙 북쪽에 위치한 몽골은 본래 각 부족들끼리 분열해 끊임없는 전쟁을 펼치던 혼돈의 땅이었다.

1189년 보르지긴 씨 출신의 테무진이 몽골계 주변 민족을 통합하고 1206년 몽골고원을 통합하고 칭기즈라는 칭호를 받아 칸에 오르면서 세계는 큰 소용돌이 속으로 빠지게 된다. 중앙아시아의 부유한 국가인 호레즘 제국도, 수백 년 동안 이슬람 세계의 종주국 지위에 있었던 아바스 왕조도, 중국 대륙의 금나라와 송나라도 몽골제국 앞에선 힘없는 양 한 마리에 불과했다.

처음에는 고려와 다소 동떨어진 곳에 세력을 집중하던 몽골이었으나 급속한 팽창을 거듭하며 북중국, 만주 일대를 지배하에 두면서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형국이 되었다. 처음에는 몽골에 쫓긴 거란 유민들이 고려를 침공하게 되고, 그들을 격퇴하는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는 등 처음엔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처인성은 평지 언덕에 자리한 작은 토성이지만 몽골의 2차 침입에 맞서 승리한 기적의 현장이다.
▲ 몽골의 2차 침입에 맞써 승리한 기적의 현장, 처인성 처인성은 평지 언덕에 자리한 작은 토성이지만 몽골의 2차 침입에 맞서 승리한 기적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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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몽골은 거란 격퇴를 구실 삼아 해마다 막대한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하였다. 고려 내부에서는 공물에 부담을 느낀 데다가 오랑캐에 굴복하여 머리를 조아렸다는 불만이 팽배했는데 1225년 고려를 방문한 몽골 사신 저고여가 압록강 근교에서 피살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둘 사이의 전쟁은 이제 돌이킬 수 없었다.

몽골은 서하 원정과 칭기즈칸의 사망으로 고려 원정을 일단 뒤로 미뤘지만 1231년 8월 살리타이의 군사 3만이 고려를 침공하면서 기나긴 여몽전쟁의 막이 올랐다. 몽골은 처음에 의주, 철주 등을 함락시켰지만 고려군의 반격도 만만치 않아 박서, 김경손 장군의 활약으로 귀주성, 충주성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다. 개경을 포위했던 몽골군은 강화를 맺고 돌아간다.
 
처인성의 내부는 협소한 편으로 전투 당시에는 100명의 승군과 부곡민 밖에 없었다고 한다.
▲ 처인성의 내부 모습 처인성의 내부는 협소한 편으로 전투 당시에는 100명의 승군과 부곡민 밖에 없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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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우를 중심으로 한 고려 조정은 장기전을 대비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했고, 분노한 몽골은 살리타이를 앞세워 침입했다. 이번의 기세는 더욱 매서웠다. 재빠르게 서경(평양), 남경(서울)을 함락한 몽골은 개경 조정에게 항복을 권고했지만 강화해협의 빠른 물살에 의지한 고려는 결코 항복하지 않았다.

수전에 약한 몽골군은 일단 한반도를 초토화시키기로 결심한다. 그 공격 대상 중의 하나가 용인에 위치한 처인 부곡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일명 향, 소, 부곡(鄕所部曲)이라 해서 광업과 수공업에 종사한 천민들의 집단 거주지가 있었다. 그들은 조세와 노역의 부담도 훨씬 컸고, 거주 이전의 자유도 없었다.

살리타이는 용인 구성동에 위치한 용구 현성을 무혈입성하여 함락시켰고, 눈앞에 보이는 것은 둘레 425미터도 채 되지 않은 작은 토성, 처인성이다. 성안에 피신해 있던 사람들은 정규병력 100여 명, 승려 100명, 그리고 다수의 부곡민뿐이었다. 

이런 작은 성을 굳이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살리타이는 정작 용인 본성에서는 허탕을 쳤고 처인성에 군량이 있다는 정보를 받자마자 나름 분풀이 대상으로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살리타이는 처인성에 도달하자마자 본대에서 500기의 기병들을 직접 데리고 처인성 주변을 점령해 포위 공격에 들어가기 시작했다.
 
처인성은 둘레가 400미터 밖에 되지 않은 작은성이라 몽골군이 들어올 수 있는 루트는 한정되어 있고 이 성문밖에서 살리타이가 사살되었다. 근래에 건설된 역사교육관이 눈앞에 보인다.
▲ 살리타이를 사살한 동문의 터 처인성은 둘레가 400미터 밖에 되지 않은 작은성이라 몽골군이 들어올 수 있는 루트는 한정되어 있고 이 성문밖에서 살리타이가 사살되었다. 근래에 건설된 역사교육관이 눈앞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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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전 세계에서 가장 무시무시하고 잔혹한 학살을 일삼았던 몽골군에게 상대가 되지 않았을 게 뻔했기 때문에 항복은 당연지사였다. 하나 처인성의 부곡민들은 끝까지 항쟁하기로 결심한다. 때마침 무(武) 승 출신의 승려 김윤후가 이들의 지휘를 맞게 되었고, 백성들에게 무기를 나눠주면서 그들을 하나로 결집시켰다.

그리고 몽골의 주요 침입 루트로 예상되는 처인성 동문에 김윤후 본인과 저격수들이 화살을 가지고 대기하고 있었다. 하늘이 도왔을까? 그 루트로 살리타이를 비롯한 몽골군이 쳐들어오기 시작했고, 김윤후는 정확히 화살로 살리타이를 명중시킨다. 적장의 급사로 몽골군은 사기를 잃고 승병과 부곡민들은 일제히 몽골을 공격해 큰 승리를 거둔 것이다.

그 계기로 몽골군은 서둘로 고려조정과 강화를 맺고 철수하였고, 차별을 받던 처인 부곡은 처인현으로 승격하였다. 그리고 승려였던 김윤후는 환속하여 장군의 길을 걷게 된다. 현재도 처인이란 이름은 처인구로 남아있고, 처인성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재 용인 남사읍에 위치한 처인성은 몽골군보다 무서운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있다. 하지만 근래에 새롭게 정비를 하여 처인성 주위를 산책로로 조성하였고, 이 길을 따라 걷기만 해도 그 당시 처인성에서 있었던 치열한 전투에 대한 설명을 바닥에 그려진 그림으로 쉽게 접할 수 있다. 

언덕 위에 봉긋 솟아있는 자그마한 토성, 처인성은 남아 있는 높이도 기껏해야 6미터 밖에 안 되고 성 내부도 100명이 들어차면 가득 찰 정도로 협소하지만 전쟁을 이기게 하는 건 웅장한 성곽도 최첨단 무기도 아닌 사람이란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다. 처인성의 입구에는 웅장한 한옥 역사관도 개관할 예정이니 용인에 오시면 꼭 방문하시길 바란다. 여기서 머지않은 곳에 눈길을 줄 만한 여행지가 하나 더 있다.
 
용인 이동저수지 한편에 자리한 동도사는 용인팔경의 하나인 어비낙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 용인팔경, 어비낙조의 풍경 용인 이동저수지 한편에 자리한 동도사는 용인팔경의 하나인 어비낙조를 볼 수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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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 8경 중 하나인 어비낙조를 감상할 수 있는 곳으로 이동저수지의 한편 언덕 위에 자리하고 있는 사찰인 동도사다. 절 자체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금단사의 유물을 어비리 주민들이 수습하여 세웠지만 1963년 저수지 조성으로 수몰될 위기에 처하자 다시 옮겨 세운 절이라 딱히 눈길이 갈 곳은 없다.

다만 신라 말~고려 초에 세운 어비리 삼층석탑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절 뒤편 삼신각으로 올라 저수지를 바라보면 호수와 절의 조화가 제법 일품이라 할 수 있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치열했던 오늘 하루를 마무리 짓는다.

덧붙이는 글 |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1권 (경기별곡 1편)이 전국 온라인, 오프라인 서점에 절찬리 판매 중 입니다. 경기도 각 도시의 여행, 문화, 역사 이야기를 알차게 담았으니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경기도는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와 함께 합니다. 강연 문의 ugz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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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문학 전문 여행작가 운민입니다. 현재 각종 여행 유명팟케스트와 한국관광공사 등 언론매체에 글을 기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모르는 경기도 : 경기별곡 1편> 저자. kbs 경인 <시사인사이드> 경인방송 <책과 사람들> 출연 강연, 기고 연락 ugzm@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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