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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정확히 언제쯤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 20대 언제쯤, 나는 붓글씨를 배우고 싶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졌다. 왜 뜬금없이 붓글씨였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마도 중학생 시절, 미술 숙제로 책을 보고 따라 그린 난초 그림을 칭찬받은 좋은 기억이 작동을 한 게 아닐까 생각 한다(역시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언젠가 배워보겠다는 바람만으로 인사동에서 샀던 붓과 종이와 먹물은 직장 생활을 하고 이사를 다니고 결혼을 하고 나서도 한동안 내 짐 한모퉁이에 자리잡고 있었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도 짐정리할 때 눈에 보이면 차마 버리지 못하고 다시 집어 넣고 하기를 30년. 주인을 잘못 만난 그 문방사우는 빛을 보지도 못하고 보자기 안에서 겨우겨우 연명을 하고 있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장렬히 전사한 상태로 미라가 되어 있었다. 
 
30년도 전에 샀던 초보자용 종이, 먹물, 붓들. 붓은 손만 대면 털이 빠져 날리지만 그의 오랜 기다림을 기리는 마음에서 버리지 못하고 있다.
 30년도 전에 샀던 초보자용 종이, 먹물, 붓들. 붓은 손만 대면 털이 빠져 날리지만 그의 오랜 기다림을 기리는 마음에서 버리지 못하고 있다.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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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나 붓글씨를 배워보고 싶다는 바람은 결심으로 꽃을 피워 인터넷을 검색하고 주변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작한 캘리그라피가 3년을 접어들고 있다.

오랜 세월을 묵힌 바람이었지만 시작하고 나서도 일상에 밀려 생각만큼 몰입하기는 쉽지 않다. 수업 일정에 떠밀려 겨우겨우 따라가는 상황, 그래도 어찌어찌 하나 둘씩 작품이 나오기 시작했고 그런 작품을 볼 때마다 웃음이 나오곤 한다. 글씨나 그림 실력을 떠나서 30년 묵힌 막연한 희망이 현실이 되었다는 것이 인생사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나간것은 다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지나간것은 다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음을...
ⓒ 이경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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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알게 또 모르게 많은 씨앗을 뿌리며 살아간다. 어떤 씨앗은 뿌린 것도 까맣게 잊고 지나가기도 하고 어떤 씨앗은 애지중지 키워보겠다며 물과 양분을 주지만 싹을 틔우지 못하기도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많은 씨앗들은 우리가 완전히 포기 하지만 않는다면 자기 위치에서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고 때를 기다려 열매를 맺는다.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어서 땅속에 있거나 내가 준비가 안 되어 물을 주지 못했을 뿐이다. 싹을 틔우지 않는 그 시간들이 실패나 좌절이나 잘못을 의미 하지는 않는다. 

나는 삭아서 흩어지는 붓을 버리지 않고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 나조차 잊고 있었던 이 붓이 참아온 세월을 기억해 주고 싶어서다. 2021년도 벌써 연말이 되었다. 내가 살아온 시간들이 의미없이 지나간 것 같이 느껴질 때도 실은 땅 속에서 싹을 틔울 준비를 하고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라고 믿는다. 한해를 열심히 살아온 모든 이들이 그런 위로를 받는 연말이 되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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