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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의 손자 항렬 유족 중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황은주 여사가 지난 12일 밤 별세했다. 15일 빈소가 마련된 보훈중앙병원 장례식장 모습.
 안중근 의사의 손자 항렬 유족 중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황은주 여사가 지난 12일 밤 별세했다. 15일 빈소가 마련된 보훈중앙병원 장례식장 모습.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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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후손들이 왜 한국에 머물지 않고 미국으로 갔겠나. 살길이 없으니까 그런 거다."

15일 오후 안중근 의사의 외손녀 황은주 여사의 빈소가 마련된 중앙보훈병원 장례식장에서 <오마이뉴스> 기자와 만난 황 여사의 지인이 한 말이다. 

보훈처에서 공직생활을 한 지인은 황 여사가 2015년께 미국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거처 마련과 병원 치료 등을 도왔다. 또 황 여사가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도록 행정을 도맡아 처리한 인물이다. 그를 두고 주변에서 '황은주 여사 양아들'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애를 썼다. 

그가 전한 황 여사의 삶에는 위대한 독립운동가 집안이 으레 겪는 고단함과 안타까움이 그대로 배어있었다. 

안중근 의거 후 안중근 집안이 겪은 고초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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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생인 황은주 여사는 안중근의 장녀 안현생의 딸로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났다. 일제의 핍박 때문에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외할머니인 안중근 의사 부인 김아려 여사의 손에 자랐다. 

그럴 수밖에 없던 것이 1909년 10월 안 의사가 만주 하얼빈에서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해 의거에 성공했다. 일본제국의 헌법 기초를 마련하고, 초대 및 5대, 7대, 10대 일본제국 내각 총리대신을 역임한 일제의 심장으로 여겨지는 이토를 저격해 사망케 한 것이다. 이토를 보낸 일제가 안 의사와 남은 가족들을 어찌 대했을지 불 보듯 뻔한 상황.

다행히 안 의사는 의거 직전 동료를 통해 남은 가족들에게 편지를 보내 '연해주에 살림을 장만해놨으니 그리로 오라'고 전한다. 의거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당시 안 의사에게는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와 부인 김아려, 딸 안현생(1902년생), 아들 안분도(1905년생), 안준생(1907년생) 등이 있었다. 

안 의사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는 편지를 받고 며느리 김아려와 손주 안분도, 안준생을 연해주로 보낸다. 자신과 손녀딸 안현생은 국내에 남았다. 김아려 여사는 장춘을 거쳐 하얼빈으로 향했다. 힘겹게 도착한 하얼빈에서 김 여사는 남편이 이토를 쏴 죽였다는 소식을 접하고 일제의 손에 잡혀 유치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곡절 끝에 풀려났지만 일제의 위협은 사라지지 않았다. 국내에 남은 안 의사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와 장녀 안현생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 

안정근 및 안공근 등 동생 가족을 포함, 안 의사 가족들은 일제의 위협을 피해 야반도주해야만 했다. 이후 동포들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꼬르지포 인근에 정착하지만, 고난은 계속됐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뤼순감옥에서 순국한 이듬해에 장남 분도가 7살 나이에 비명횡사한다. 낯선 사람이 주는 과자를 먹고 사망한 것인데, 일제의 사주를 받은 밀정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남은 가족들은 1919년 3.1운동 후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안창호와 김구의 도움으로 러시아를 떠나 상하이로 이주하게 된다. 1919년 10월의 일이다. 1920년대 안 의사 장녀 현생은 신흥무관학교 1회 졸업생이자 임시정부 초대 군무부 참사를 지낸 황일청을 만나 결혼했고 1928년 딸 황은주를 낳았다.

일제 기획 '박문사 화해'가 만든 비극
 
이토 분키치(앞줄 오른쪽)를 만난 안준생(앞줄 왼쪽).
 이토 분키치(앞줄 오른쪽)를 만난 안준생(앞줄 왼쪽).
ⓒ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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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의 의거가 일어난다. 이 일로 임시정부는 상하이를 급히 떠나 피난 길에 올라야 했다. 하지만 안 의사 일가는 상하이를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는 상하이에 남은 안 의사 가족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다. 

당장 황 여사의 아버지 황일청은 윤봉길 의거 후 평양으로 끌려가 연금생활을 한다. 황 여사의 어머니 안현생도 이때 남편 뒷바라지를 위해 따라간다. 상하이에 남은 황 여사가 할머니 김아려 여사의 손에 자랄 수밖에 없던 이유다. 하지만 일제의 감시와 압박은 끊임없이 이어졌고, 그 칼날은 안중근의 하나 남은 아들 안준생에게 집중됐다.

정확히 30년을 버틴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일제의 압박에 굴복하고 만다. 1939년 10월 15일 안준생은 이토 히루보미의 아들이자 일본 광업 사장이었던 이토 분키치를  박문사(이토 히로부미 추모 사당)에서 만나 고개를 숙이며 말한다. 

"아버지를 대신해 깊이 사죄드립니다."

안중근의 아들이 이토의 아들을 만나 사죄한 일은 이토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박문사에서 이뤄졌다. 다음날 매일신보 등 친일신문은 '그 아버지들에 이 아들들이 잇다'라는 제목을 써가며 관련 내용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이 사건으로 안준생은 어찌 됐을까. 임정의 수장 김구는 안준생을 '호부견자'라 칭하며 "더러운 변절자는 처단해야 한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했다. 실제 <백범일지>에도 해방 후 중국 경찰에 '안준생을 죽여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 나온다. 

1939년 10월 변절하고 상하이로 돌아온 안준생을 본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여사는 "고생했다"라는 한마디를 건넨다. 일제는 이후 안준생에게 고급주택을 건네며 물질적으로 안락한 생활을 보장한다. 하지만 1945년 일제는 패망하고 안준생 역시 중국 공산당에 밀려 홍콩으로 이주한다. 안준생은 아내 정옥녀와 아들 안웅호와 안연호를 미국으로 보낸 뒤 1951년 한국전쟁 와중에 혼자 국내로 들어온다. 부산 피란지에서 폐결핵을 앓았던 안준생은 부산 앞바다에 정박한 덴마크 적십자선에서 사망한다.

1939년 안준생을 통해 박문사 화해극을 이끌어낸 일제는 시선을 돌려 안중근의 장녀 안현생과 사위 황일청을 대상으로 삼았다. 1941년엔 안현생과 황일청도 '만선 시찰단'이라는 이름의 행렬에 끼어 박문사를 찾아 이토에게 분향 배례하는 상황을 맞게 된다.

황 여사가 불과 17세였던 1945년 12월, 아버지 황일청은 광복군 출신 인사의 총에 맞아 절명한다. 주된 이유는 황일청이 평양에서의 압류 생활 후 장쑤성 쉬저우에 끌려가 '조선인 교민회장'으로 활동했다는 것. 반강압에 의해 끌려갔지만 결과적으로 '조선인 교민회장'을 하며 일제가 주는 녹을 먹었다. 이곳에서 황 여사와 가족들은 해방을 맞이했다. 귀국선을 기다리며 황일청은 집 아래층에 교민 자녀를 위한 '서주 한국 중학교'를 열고 조선 학병들로 교사진을 꾸렸다. 

당시 쉬저우에는 충칭에서 상하이로 내려온 40여 명의 광복군도 있었다. 이들과 쉬저우에 남아있던 학병들 사이에서 적지 않은 갈등도 발생했다. 그리고 1945년 12월 3일 밤 10시께, 광복군과 학병 출신 인사들이 함께 있던 황 여사 아버지 방에서 '꽝' 하는 굉음이 울렸다. 황일청은 머리에 총을 맞고 절명했다. 그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남긴 친일인명사전에도, 정부가 남긴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도 오르지 않았다.

혼자 남은 황은주는 어찌 살았나
 
안중근 의사의 손자 항렬 유족 중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황은주 여사가 지난 12일 밤 별세했다. 15일 빈소가 마련된 보훈중앙병원 장례식장 모습.
 안중근 의사의 손자 항렬 유족 중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황은주 여사가 지난 12일 밤 별세했다. 15일 빈소가 마련된 보훈중앙병원 장례식장 모습.
ⓒ 김종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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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떠나보낸 황은주는 불과 석달도 안 된 1946년 2월 할머니 김아려도 떠나 보낸다. 할머니의 나이 69세. 남편과 어머니를 연달아 잃은 황은주의 모친 안현생은 충격으로 몸져누웠다. 그러나 악재 속에서도 가족들은 살아남아야 했고 황은주는 아버지 친구였던 이범석 장군 일가의 도움을 받아 1946년 5월 부산에 도착한다. 이후 황 여사의 어머니 현생도 서울에 도착했고 먹고살기 위해 전구 장사를 하며 버텼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대구로 피난을 떠나야만 했다. 그곳에서 안 의사의 남은 가족들은 허위 장군 후손의 도움을 받으며 버텨냈다. 이후 어머니 현생이 효성여대(현 대구가톨릭대 전신) 불문과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어머니 현생 역시 1959년 고혈압으로 쓰러졌고 1960년 4월 사망했다. 

이화여대 음대를 나온 황은주 여사는 군인 남편을 만나 슬하에 네 명의 자식을 뒀다. 남편이 군생활을 마무리한 1970년대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 달라"라는 안 의사의 유언을 받들지 못한 사실과 어머니 곁에 묻히고 싶다는 이유로 1980년대 중후반 홀로 한국에 돌아왔다. 이후 학생들을 가르치며 생활을 이어갔지만 남은 가족들의 요청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고 그렇게 매해 안 의사와 관련된 행사가 있으면 오고 가기를 반복했다. 2010년대 들어 한국에서의 생활을 그리워했고 2015년 영구 귀국했다.

한국에 돌아온 황 여사는 경제적으로 여유 있지 않았다. 안 의사의 직계 후손임에도 외손 등이라는 이유로 직접적인 혜택을 받지 못했다. 안 의사의 직계 3손 중 김영삼 정부 들어 뒤늦게 안준생의 아들 안웅호(토니 안)가 혜택을 받았지만 2013년 사망해 다른 직계로 이어지지 못했다. 

독립유공자예우에 관한 법률에는 안 의사처럼 순국선열의 경우 독립유공자의 손자녀 1명만 보상금을 받을 권리가 주어진다. 보상금을 받을 권리는 다른 손자녀에게 이전되지 아니한다고 명시됐다.

안중근의사숭모회가 <오마이뉴스>에 밝힌 내용에 따르면 17일 진행되는 황 여사의 발인식 추도미사는 천주교 서울대교구장 염수정 추기경이 맡을 예정이다. 황은주 여사의 장지는 용인천주교공원묘원으로 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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