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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마을 무등산 자락에 세워진 운암서원
 광주광역시 북구 화암마을 무등산 자락에 세워진 운암서원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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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사람들 중에서 포충사, 충장사, 충민사, 경열사를 모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광주의 3 충신'과 고려말 명장을 추모하는 이른바 '광주의 4대 사우(祠宇)'로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학생들의 소풍 장소와 유치원 유아들의 체험학습장으로 애용되는 곳이라서 웬만한 사람들은 이곳의 추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무등산 북쪽 기슭에 자리한 원효사와 옛 무등산장으로 가는 길은 풍광이 수려할 뿐만 아니라 광주의 역사문화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문화유적들이 즐비하다. 임진왜란 때 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충성의 대가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김덕령 장군을 기리는 '충장사'가 있고 충장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조선 수군의 시조(始祖)'라 할 수 있는 정지 장군을 봉향하는 '경열사'가 있다.

1970년대 광주 사람들의 젖줄이었던 제4 수원지와 김삿갓도 쉬어 갔다는 청풍 쉼터를 지나면 '충민사'가 있다. 충민사는 정묘호란 때 죽음으로 나라를 구한 전상의 장군을 기리는 사당이다. 지금은 시민들의 오해가 풀렸지만 한때는 성이 같다는 이유로 전두환 조상으로 오해받았던 광주의 충신이다.
 
운암서원은 해광 송제민의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708년 숙종 34년에 광주 북구 운암산 아래 황계 마을에 건립됐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에 재건됐다
 운암서원은 해광 송제민의 사후 100여 년이 지난 1708년 숙종 34년에 광주 북구 운암산 아래 황계 마을에 건립됐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 1994년 지금의 자리에 재건됐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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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아래 화암마을에 도착하면 이곳이 신성한 곳임을 알리는 홍살문과 함께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기와집 몇 채를 만날 수 있다. 입구에 서 있는 커다란 표지석은 이곳이 '운암서원(雲巖書院)'임을 알려준다. 운암서원, 어떤 곳일까. 아무래도 근처에 있는 충민사나 충장사에 비해 덜 알려진 곳이라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을 성싶다.

운암서원은 조선 중기 학자이자 임진왜란 때 호남·충청 지역에서 의병 종사관을 지냈던 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 1549~1602)과 아들 화암 송타(花菴 宋柁 1567~1597), 사위 석주 권필(石洲 權韠 1569~1612)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문장·천문·지리·역학에 밝았던 비운의 천재

해광 송제민. 호남·충청 의병사에 빼놓을 수 없는 업적을 남겼지만 널리 알려진 인물이 아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각종 역사서나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혔던 선생의 행적이 최근 들어 후손들을 중심으로 한 여러 연구를 통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호남·충정 의병사의 숨은 거장, 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 1549~1602) 영정
 호남·충정 의병사의 숨은 거장, 해광 송제민(海狂 宋齊民 1549~1602) 영정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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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와 당쟁이 극에 달하던 조선 중기. 전라도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장동 마을 홍주(洪州) 송씨 가문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홍문관 정자(弘文館正字)였던 아버지 송정황(宋庭篁)은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제하라'는 뜻으로 아들의 이름을 '제민(濟民)'이라 지었다.

홍주(洪州) 송씨 시조 송계(宋桂)는 고려말 현재의 국무총리 격인 '문하시중'을 지낸 인물로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개국 하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충신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의 충절을 지킨 '두문동 72현' 중의 한 사람이다.

뼈대 있는 명문가 출신의 송제민은 일찍이 스무 살 이전에 조선의 글다운 글은 모두 읽어 문장·천문·지리·역학 등 다방면에 해박한 지식을 갖췄으나 어디에 속박되기 싫어하는 자유롭고 호방한 성격 탓에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서원의 외삼문. 숭의문
 서원의 외삼문. 숭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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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욱이 아홉 살 때 당시 권력 실세였던 문정왕후의 동생, 윤원형의 미움을 산 아버지가 객지에서 비명횡사하게 되자 이에 충격을 받은 송제민은 아예 벼슬과는 담을 쌓고 살아간다. 권력에 대한 불신과 트라우마가 얼마나 깊었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20대의 자유로운 영혼, 송제민은 전국의 명산대천을 두루 돌아다니며 지역의 유지들과 교유한다. 그러던 중 충청도 한산에 은거하던 토정 이지함을 만나 그의 문하생이 된다. 이때 호서(湖西) 지방에서 조헌과 박춘무 등을 만나 의기투합하여 세한계(歲寒契)를 맺고 국정쇄신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린다.

1589년 조헌이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서서 정치개혁을 주장하는 이른바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리다 유배를 당하자 송제민은 절망한 나머지 세상을 등지고 전라도 무안 땅으로 내려와 스스로 호를 '해광(海狂)'이라 짓고 정처 없이 이 섬 저 섬을 유랑했다. 해광이란 '바다에 미친 사람'이라는 뜻이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영모재가 자리하고 있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영모재가 자리하고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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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깃발을 높이 들다

43세가 되던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해광은 더 이상 바다에 머무를 수만은 없었다. 그해 6월 나주의 의로운 선비 양산룡, 양산숙 등과 함께 수원 부사를 역임하고 향리에 내려와 있는 김천일을 찾아가 함께 거병을 할 것을 요청한다.

송제민을 종사관으로 삼은 김천일 장군의 나주 의병은 금성관에서 출병식을 열고 수원성을 탈환하기 위해 진군한다. 300명으로 출정한 의병은 5천을 넘기며 수원으로 입성했다. 그러나 오합지졸 관군들의 잇따른 패배로 고립상태에 빠지게 된다.

이에 김천일 장군은 송제민이 충청도 지역에 연고가 있고 지역 사대부들과 친분이 있는 점을 감안하여 충청 지역 의병을 모집할 것을 권한다. 송제민은 곧바로 충청도로 내려가 과거 토정 이지함의 문하에서 동문수학했던 조헌과 박춘무를 만나 의병 봉기를 촉구했다.
 
서원의 중심건물인 운암사. 해광 송제민과 아들 화암 송타, 사위 석주 권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서원의 중심건물인 운암사. 해광 송제민과 아들 화암 송타, 사위 석주 권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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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식간에 2천 명이 넘는 의병이 모였다. 송제민은 조헌을 추대하여 좌의병장으로 삼았고 박춘무를 우의병장으로 삼아 금강 이남의 왜적과 경기 일대의 왜적들을 축출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를 기화로 호남지방에 격문을 보내 흩어진 의병들을 다시 모았다. 이 격문이 임진왜란 의병사 연구에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닌 '소모호남의병문(召募湖南義兵文)'이다.

호남과 충청 의병들이 고군분투에도 불구하고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 대군의 왜병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해 여름, 금산전투에서 고경명 장군에 이어 형제처럼 지내던 조헌이 순국했다. 설상가상으로 이듬해 김천일 장군마저 진주성 전투에서 순절하자 실의에 빠진 해광은 무등산으로 들어가 은거한다.

충장공 김덕령 의병장과의 만남

그러나 마냥 칩거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1593년 해광은 고경명 장군의 담양 회맹군 의병에 참여했다가 어머니 상을 치르기 위해 고향에 돌아와 있는 외종 사촌 동생 김덕령을 찾아가 "집안일보다는 나라일이 먼저다"라며 기병할 것을 촉구했다. 각 고을에 격문을 띄워 의병들을 모아 의병장으로 추대했다. 손수 제주까지 가서 군마 30여 필을 구해오고 병기를 지원하며 출정을 도왔다.
 
운암서원 묘정비
 운암서원 묘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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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3년 후 김덕령 장군마저 그의 공훈을 시기하던 조정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이몽학의 난'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쓰고 옥사하고 말았다. 소식을 들은 해광은 통곡하며 비분강개했다. 해광은 이때의 일들을 '와신기사(臥薪記事)'라는 저술로 남겼다.

7년간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닿을 즈음, 명나라의 중재로 일본과 굴욕적인 화친 조약이 시작됐다. 해광은 이를 반대하며 '척왜만언소(斥倭萬言疏)'를 올렸으나 대신들의 농간으로 상소문은 묵살됐다. 또다시 절망한 해광은 '세상을 다스려 백성을 구제하라'는 뜻을 펴지 못했으니 '평민과 다를 것이 없다'라고 자책하며 '제민(濟民)'이라는 이름을 '재민(齊民)'으로 바꾸고 다시 무안으로 내려온다.
 
서원 옆에 세워진 해광 선생 묘비. 해광 송선생 지천이라 새겨져 있다.
 서원 옆에 세워진 해광 선생 묘비. 해광 송선생 지천이라 새겨져 있다.
ⓒ 임영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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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광은 "나라의 원수를 갚지 못한 사람은 죄인과 다름없다"라고 스스로 죄인 임을 자처하며 바닷가에 은거했다. "내가 죽거든 박장하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1602년 54세를 일기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그렇게 해광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 졌다.

그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1708년(숙종 34년)에 호남 유림들의 청원으로 광주 북구 운암산 아래 황계 마을에 운암서원을 건립하여 해광 송제민과 아들 화암 송타, 사위 석주 권필 등을 배향했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 훼철됐다가 1994년 지금의 자리에 재건됐다.

경내에는 신주를 모시는 사당과 내외삼문·장판각·묘정비·영모재 등이 있다. 서원 옆에 '해광선생지천'이라 새겨진 묘비가 서있다. 후손들은 그의 문적들을 모아 <해광집(海狂集)>을 간행했다. 이때 만들어진 목판본이 2020년 7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1호로 지정됐다.
 
2020년 광주시 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된 '해광집목판‘
 2020년 광주시 유형문화재 31호로 지정된 "해광집목판‘
ⓒ 광주광역시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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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동문화재단 문화재 돌봄사업단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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