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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자료 <1961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랑아 수용 현장 촬영>
 국가기록원 자료 <1961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랑아 수용 현장 촬영>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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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괭이자루로 어린 애들을 사정없이 팼다. 그러다 잘못 맞은 애들은 걷지 못하거나 실신했다. 2층 식당에서 1층 방으로 질질 끌려 내려오는 광경을 많이 봤다. 그렇게 맞은 애들만 모아 놓은 방이 있었다. '또라이방'이라 불렀다. 쓰러져 있는 애들로 가득했다. 그 방에서 애들이 계속 사라졌다. 우리끼리 '죽었다' '또 죽었다' 그랬다. 그곳은 살육현장이었다."

안경수(58·가명)씨는 1974년 자신이 감금됐던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회상하며 "그곳은 지옥이었다"고 말했다. 4개월밖에 있지 않았지만 태어나서 그렇게 맞아 본 적은 처음이고, 인간 이하 취급을 받은 적도 처음이었다.

서울 은평구 응암동 산7번지 서울시립아동보호소는 과거 정부가 부랑아 교화를 목적으로 아동·청소년들을 수용했던 시설이다. 1958년경 지어져 1975년까지 운영됐다. 1975년 마리아수녀회가 위탁 운영하면서 서울 소년의 집으로 개명됐고 운영 방식도 바뀌었다. 지금은 서울특별시 꿈나무마을이란 이름으로 다른 민간재단이 위탁 운영 중이다.

"그곳 별관 두 개 동에서 일어난 일들을 들여다 봐주세요. 몇 명의 아이들이 얼마나 장애를 얻었고, 또 얼마나 죽어서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안씨가 47년 후에야 이 기억을 꺼내게 된 이유는 '영보자애원'의 여성 부랑인 강제 수용과 인권 유린 의혹이 언론을 통해 공개된 내용을 봤기 때문이다. "제2의 형제복지원, 제3의 선감학원 같은 부랑인 수용소가 한둘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오마이뉴스>는 11월 말 경기도 부천에서 안씨를 만나 1974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서 벌어졌던 일을 들었다.

"인분과 쓰러진 아이들 방에 가득... 못 걸으면 거기 버려져"
 
안씨가 '부랑인 수용소' 전반의 피해 사례를 조사 중인 박병섭씨에게 보낸 제보 메일 중 일부.
 안씨가 "부랑인 수용소" 전반의 피해 사례를 조사 중인 박병섭씨에게 보낸 제보 메일 중 일부.
ⓒ 손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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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자료 <1961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랑아 수용 현장 촬영>
 국가기록원 자료 <1961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랑아 수용 현장 촬영>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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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와 같이 길거리를 걷고 있었는데 경찰이 우리를 잡아갔다. 우리가 가족이 있는지, 원래 집은 어딘지, 잡아서 어디로 가는지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게 다음 날 도착한 곳이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별관이었다."
 

1974년 그가 12살 때였다. 서울 대림동에서 살았던 그는 국민학교 6학년 때 1년 간 가출을 한 적이 있다. 길거리 생활을 하다 서울 남산 아래 마을까지 가게 된 그는 어느 가을밤 갑자기 남대문경찰서 경찰관들에게 붙잡혀 즉시 시설로 보내졌다.

"보호소는 저녁만 되면 지옥이 따로 없었다. 관리 직원은 밖에서 쇠줄로 매일 문을 잠그고 퇴근했다. 그럼 성인으로 보이는 또 다른 수용자 '대장'들이 '곡괭이 짓'을 해댔다. 밥을 늦게 먹는다, 밥을 10초 셀 동안 다 먹지 못했다, 제대로 안 먹는다, 목소리를 냈다, 방에서 밖을 쳐다봤다, 간질 발작을 한다며 애들을 엎드려뻗쳐 시켜 놓고 곡괭이 자루로 팼다. 한 번 맞아도 몸이 부서질 것 같은데, 몇 대를 때렸고 몸을 구부렸다가 어딘가를 잘못 맞으면 아예 걷지 못하거나 정신이 이상해진 애들도 봤다. 나는 운이 좋아서 어디 안 부서지고 살아남았다."

보호소 생활은 감금과 폭행의 연속이었다. 10대 후반~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수용자 네댓 명이 하루 종일 아이들을 관리하고 폭행했다. 공무원이라 불리는 관리 직원이 1명 있었지만 하루 종일 사무실에만 있었고, 퇴근 전마다 출입문을 잠가 건물을 폐쇄했다. 이들은 오전에 출근하면 '대장질 하는' 이들로부터 보고도 받았다.

"'별관'엔 2층 건물이 두 동 있었다. 2층이 식당 겸 강당이고 1층에 방이 있었다. 방은 좌우로 3개씩 6개였다. 아동 20~30명 정도 들어갈 크기였다. 나는 가장 첫 번째 우측 방에서 잤던 걸로 기억하는데, 바로 맞은 편 방이 '또라이방'이었다. 몸이 성하지 않을 애들을 거기에 다 몰아넣어버렸다. 우리 방에 있다가 맞아서 XX이 돼서 그 방으로 옮겨진 애도 있었다.

똥오줌 냄새가 진동을 했다. 방엔 문이 없어서 서로가 다 보였고 냄새도 다 퍼졌다. 못 움직이는 애들이 많으니 거기서 그대로 용변을 봤던 거다. 치워주는 사람은 없었다. 거품 물고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애들도 있었다. 거기 아이들이 다 바닥에 쓰러져 생활했던 걸로 기억한다. 의사나 약같은 건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안씨는 "이 건물에서 몇 명이 죽어서 나갔는지 모른다"면서 "이름도 나이도 묻지 않고 길거리에서 막 잡아서 가둬, 누가 누군지도 몰랐다"고 말했다.  

'곡괭이 구타' 방 안에 갇혀만 있었던 아이들
 
1977년경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지 내 강당 건물 사진. 안씨는 이 건물이 자신이 갇혀 살았던 '별관'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1977년경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지 내 강당 건물 사진. 안씨는 이 건물이 자신이 갇혀 살았던 "별관"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 안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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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가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지 내부를 설명하며 그린 그림. 강제 수용 문제는 비슷했지만 '별관' 두 동에서 지냈던 아이들이 특히 폭력과 비위생, 감금에 시달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안씨가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부지 내부를 설명하며 그린 그림. 강제 수용 문제는 비슷했지만 "별관" 두 동에서 지냈던 아이들이 특히 폭력과 비위생, 감금에 시달린 것 같다고 설명했다.
ⓒ 손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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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가 '별관 두 동'을 강조한 이유는 자유롭게 생활하는 다른 보호소 아이들을 봐서다. 별관에서 내려다보이는 보호소 본관엔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였고, 숙소로 보이는 건물도 여러 채가 보였다. 건물 문이 잠겨 감금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아침에 눈 뜨면 방에 정자세로 앉아서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앞을 봐야 했다. 서로 얘기하는 소리가 나면 대장한테 곡괭이자루로 맞았다. 문 밖을 쳐다보다가 걸려도 맞았다. 서로 '이름이 뭐냐'는 말도 하지 못해 이름을 아는 사람조차 없다. 밖에 나가 뛰어 본 적도 없다."

그는 그렇게 4개월을 지내다 인근에 신축된 '소년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는 "하루아침에 지옥에서 천국으로 갔다"며 "그곳엔 수세식 화장실에 한 명씩 자는 이층 나무 침대가 있었고 여자 수녀들이 관리도 해줬고 감금 생활도 없었다"고 말했다. 안씨는 여기서 1개월 가량 지내다 나왔고 지옥 같았던 4개월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살아왔다. 그리고 47년이 흘렀다.

'지옥 별관' 사라진 아이들, 어디로 갔을까
 
1958년 제정된 서울특별시립아동보호소설치조례 원문 중 일부.
 1958년 제정된 서울특별시립아동보호소설치조례 원문 중 일부.
ⓒ 국가기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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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아동보호소는 1960~1970년대 서울 인근의 '부랑아'들을 대거 수용한 대표 시설이다. 법적 근거는 1958년 제정돼 1975년 폐지된 서울특별시조례제145호(서울특별시립아동보호소설치조례)에서 확인된다. 목적은 "고아, 기아, 미아, 부랑아 또는 기타 보호를 요하는 아동을 각 보호기관에 이송하기 전까지 임시수용하고 아동보호상담 등 사업을 하기 위함"이다. 조례는 보호소엔 소장, 분소엔 주임 등 각기 필요한 공무원을 두고 소장에게 보호소와 분소 관리감독 권한을 부여했다. 안씨가 말한 '별관 직원'은 당시 서울시 공무원일 가능성이 높다. 

보호소는 과밀상태였다. 그리고 모두가 고아나 부랑아도 아니었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발간 자료(槪況, 1961)에 따르면 1960년 수용인원 1831명 중 824명(약 45%)이 부모가 생존해 있는 경우였다. 1961년 경향신문, 동아일보 등 기사를 보면 당시 보호소 수용규모는 1000명이었으나 수용 아동은 1500명을 넘었다.

보호소는 잡혀 온 아이들을 부모에게 돌려보내주기보다 다른 지역 부랑아 수용소나 강제 노역장으로 보냈다. 실제 선감학원 피해자 중에 서울시립아동보호소를 거쳐 온 사례가 적지 않다. 선감학원 원아대장의 입원 경로를 보면 "놀던 중 행색이 남루해 시경에 의해 시립아동보호소에 수용됐다" "어머니와 서울에 오던 중 어머니를 잃어버리고 경찰에 잡혔다" "누나 집에 가다가 경찰에 의해 단속됐다" "여름 방학 중 고모 집에서 이웃집 대추를 따먹다 주인의 신고로 경찰에 단속돼 아동보호소로 이송됐다" 등의 기록이 확인된다.

안씨는 자신이 감금됐던 '별관 두 동'은 수용규모를 초과한 아동을 임시로 모아놨던 곳이라고 추측했다. "그래서 지원 물품이나 적절한 시설도 없었고 공무원은 애들을 통제하려고 문을 계속 잠가 밖을 못 나오게 했고, 청년 수용자에게 관리를 다 맡겨놓고 폭력과 야만을 방관했다"는 것이다.

"시체실에서 1년 60~70명 죽었다" 증언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있었던 이들이 만든 친목 목적의 온라인 다음 카페 게시판 중 관련 글 갈무리. 이 회원은 '시체실이 있었고 1년에 60~70명이 죽었다'고 글을 썼다.
 서울시립아동보호소에 있었던 이들이 만든 친목 목적의 온라인 다음 카페 게시판 중 관련 글 갈무리. 이 회원은 "시체실이 있었고 1년에 60~70명이 죽었다"고 글을 썼다.
ⓒ 손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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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씨와 같은 증언자는 두 사람이 더 있다. 한 명은 아동보호소 출신들이 모인 친목 온라인 다음 카페 회원이다. '김○○'이란 이름을 쓴 회원(63)은 2013년 5월 26일 자유게시판에 "곡괭이자루로 맞고 원산폭격도 받고 보트타기 기합도 받았던 기억이 난다"며 "식당 위에 시체실을 늘 열어보고 확인하곤 했는데 모두 기억한다"고 글을 썼다. 그는 "시체실에 1년간 죽어 나간 사람은 아마도 60~70명 이상으로 기억한다"며 "1개월에 1~4회 시신을 석고붕대에 습을 해서 구급차로 이송한 것으로 기억한다"고 밝혔다.  

안씨로부터 가장 처음 제보를 받았던 박병섭씨도 지난 10월 또 다른 보호소 출신 김아무개(68)씨의 전화를 받았다. 박씨는 2017년 '서울시 노숙인 생활시설 인권실태 전수조사' 민간조사원으로 영보자애원을 조사했고, 최근 영보자애원을 둘러싼 국가폭력 문제를 공론화하며 모든 부랑인 수용소의 피해 사례를 제보 받고 있다.

김씨는 전화 통화에서 "(초등학교) 4학년 때쯤 경찰이 잡아갔고 몇 달 후 도망쳤다가 또 붙잡혔다. 대여섯번 끌려갔다"며 "구타가 심했다. 닥치는 대로 얻어맞아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 결국 선감학원이란 곳을 가서 6~7개월 정도 있었다"고 밝혔다.

안씨의 관심사는 그 별관의 정체가 무엇이고, 누가 어떻게 관여했으며, 몇 명이 죽고 다쳤는지 등이다. 다만 자신도 보호소에 부모님이 있는지, 어디 사는지, 여기 왜 왔는지 등을 밝힌 적이 없다며 다른 수백 명 아이들도 기록이 없을 가능성이 있다고  안타까워했다. 다만 그는 "당시 공무원들, 그리고 '대장질'을 했던 사람들이 그 때를 기억할 것이고, 나처럼 고통을 당했던 수 백명이 있을 것"이라면서 "진실이 드러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부랑인 수용시설' 전수조사해, 국가폭력 밝혀야" 

지난 5월 활동을 시작한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진실화해위)는 1960~1980년대 부랑인 강제수용소의 국가폭력 및 인권유린 문제를 조사 중이다. 부산 형제복지원, 서산개척단(대한청소년개척단), 경기 안산의 선감학원 등에서 국가에 의해 이뤄진 강제 노역, 납치, 가혹행위가 조사 대상이다. 

일각에선 당시 '부랑인 수용시설'로 등록된 기관을 전수조사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국가폭력이 자행됐다는 고발이 이 3곳에 그치지 않고 계속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영보자애원과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등이 그 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는 지난 11월 진실화해위 건물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감금·납치·가혹행위 등의 의혹이 제기된 영보자애원의 강제입소자 피해도 진상규명해달라고 촉구했다. 

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와 함께 과거 부랑인 수용시설 전반의 피해 사례를 조사 중인 박병섭씨는 "과거 국가폭력 문제를 제대로 반성하고 피해자를 구제하려면 국가가 선제적으로 부랑인 수용시설에 대한 전수조사를 해야 한다"면서 "먼저 정부·지자체가 보유해놓고 공개하지 않는 기록들을 투명하게 공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덧붙이는 글 | 과거 국가에 의해 신체적 자유를 빼앗긴 피해자 혹은 피해자 친족들은 전화(02-2043-6910)나 이메일(energypark@naver.com)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개인정보는 보호됩니다.


태그:#서울시립아동보호소, #국가폭력, #부랑인 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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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가영 기자입니다. 제보 young@ohmynews.com / 카카오톡 rockyrkdu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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