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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는 비상구가 필요하다.
 관계에는 비상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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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기 쉬운 남자 만나야 돼."

친한 여자 선배가 나에게 했던 연애 조언이었다. 이유가 무엇인지 더 물을 필요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여성분이라면 그 말뜻을 쉽게 이해하시리라.
  나는 서로 죽고못사는 사랑보다 원한다면 언제든 문을 열고 나갈 수 있는 연인관계가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사랑은 열린 문'이라는 노래도 있지 않나. 교제 시에 일어나는 폭력은 마치 재난과 같다. 대개 전조현상이 있기지만 '설마, 설마, 에이 아닐거야' 하다가 불시에 터진다.
비상구 앞에는 위급상황을 대비해 물건을 적재하거나 장애물을 설치하는 행위가 금지된다. 그렇다면 폭력적인 연인으로부터 탈출하는 문 또한 막아두면 안되지 않을까?

하지만 그 관계가 벽으로 둘러싸였는지, 문이 열려있는지, 미리 알 방법이 없다. 빠져나갈 문을 찾고자 했던 여자들이 결국 남성에 의해 목숨을 잃거나 다친 사건이 인터넷뉴스 란에 끊이지 않는다.

11월 17일, 서울 서초구에서 한 남성이 이별 통보를 받았다는 이유로 여자친구를 흉기로 여러차례 찌르고 베란다 밖으로 떨어뜨려 살해했다.
11월 19일, 김병찬은 경찰의 신변보호를 받던 전 연인을 흉기로 살해했다. 접근금지 명령과 스마트워치 등 조치는 살인을 막을 수 없었다.
11월 29일, 충북 옥천에서도 여자친구에게 흉기를 휘둘러 다치게 한 남성이 살인미수 혐의로 체포됐다.
12월 12일, 이석준은 신변보호를 받던 전 여자친구의 어머니를 살해했다.


근 몇 주 동안 크게 보도 된 굵직한 '교제살인' 사건만해도 세 건이다. 한 사람은 목숨을 잃었고, 두 사람은 겨우 살아남았지만, 한 사람의 어머니가 살해당했다. 피해자들은 단지 헤어지기 위해서 공권력에 도움을 구해야 했으며 그마저도 소용없었다.

교제살인 사건을 전부 파악하기도 힘들었다. 며칠 전 친구들과 모여 대화 하는데 우리는 서로 각자 무슨 사건을 이야기하는지 몰랐다. "그게 이 기사야? 아님 이건가?"같은 말을 반복하며 한참을 헤맸다.

"지난주에 단톡방에 공유했던 기사 있잖아. 신변보호 받던 여자 분 살해한 남자 잡혔더라."
"어? 나는 그 피해자분 사망하신 거 아니라고 뉴스에서 본 것 같은데."
"두 개가 다른 사건이야. 죽은 사람도 있고, 살아남은 사람도 있어."
"두 개 아니고 세 개일걸?"
"…그래?"


너무나 많이 죽고 다쳐서 이제는 그게 그 사건인지, 이 사건인지도 혼란스럽다.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할 때도 똑같은 느낌을 받았다. 지난주 강의에서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화가 나서 여자 죽인 판례를 본 것 같은데, 오늘 또 배우네? 같은 판례인가? 아니구나. 사건번호가 달랐다.

판례들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줄줄이 나왔다. '만나주지 아니하다는 이유로 화가 나... 상해를 가하였다', '헤어지자는 말을 듣고 격분하여... 사망에 이르게 한 사건에서', '연인관계를 유지할 것을 요구하며... 사망의 결과를 발생케 함', '헤어진 이후 앙심을 품고... 거주지에 찾아가 불을 지르고...' 너무 잔인한 대목은 말줄임표로 생략하여 표시했다.

죽은 여자들 혹은 죽을 뻔한 여자들의 살생부

책상 위에 놓인 형법각론 교과서는 살생부처럼 보였다. 내 말을 검증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굳이 책을 찾아 펼쳐보지 않아도 된다. 간단한 판례 검색만으로도 알 수 있을 것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Violence Against Women)을 저지른 남성들이 대한민국 형법 법리를 발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법학과에선 그 모든 죽음을 건조하게 요건과 사실로 나누어 사안을 정리하고 쟁점을 제시하는 답안쓰기만 가르쳤다. 이때 사회적 맥락은 완전히 삭제해야 한다. 누가 얼마나 끔찍하게 죽은 사건이든 간에 시험범위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근데 나는 그걸 못했다. 자꾸만 '을(乙)녀', '병(丙)녀' 등 판례 속 이 익명의 여성들에게 '문(門)'이 있었는지 궁금했다. 판례 전문을 찾아보고, 부족하면 원심 판결문을 구해 읽었다.

을녀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돈을 벌러왔다. 한국어는 거의 할 줄 몰랐다. 남자는 그녀가 말귀를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로 자동차 트렁크에 가뒀다. 병녀는 남자와 나이 차이가 너무 많이 났다. 헤어지면 이 바닥에서 매장시키겠다는 협박을 듣고 탈출구를 찾을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이가 어리고, 외국인이고, 꼭 약자인 사람들만 피해자가 된 게 아니다. 정(丁)녀는 미국에서 유학했고, 전문직이고, 돈이 많았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도 그녀에게 안전한 문을 열어주진 않았다. 남자는 문을 열고 나가고자 했던 그녀를 창문 밖으로 밀어 떨어뜨렸다.

계급을 불문하고 여자들에겐 탈출로가 없었다. 비상구 문턱에서 푹 고꾸라지듯 죽어갔다. 누군가 문을 열어줬다면 어땠을까, 문 바깥 세상이 있음을 말해주고 손을 내밀었다면 달랐을까.

나는 "헤어지기 쉬운 남자 만나라"던 선배의 말을 다시 내 주변 친구들에게 전했다.그리고 말을 하나 더 이어붙였다. 이런 말을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지 않다고.

"가정폭력에 시달리다가 남편을 살해한 여성에게 판사가 왜 문을 열고 도망가지 않았냐고 물었다고 해요. 데이트폭력도 마찬가지잖아요.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그 남자와 왜 안 헤어졌니?'라고 묻잖아요. 피해자에게 '문'이 있는 게 아니라 '벽' 밖에 없는 이 상황을 전혀 모른다는 뜻이죠.
왜 우리는 벽을 만드는 데 기여하는 그 말을 재생산하고 있냐는 겁니다."
- 이주연, 이정환 지음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교제살인, 그 108명의 죽음> 中

 
 책 "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이주연·이정환 저) 표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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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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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지자고 했을 뿐입니다 - 교제살인, 그 108명의 죽음

이주연, 이정환 (지은이), 오마이북(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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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자는 우리가 특별히 만나야 할 어떤 인물, 어떤 계층이 아니다. 그는 기준에 벗어나는 모든 순간을 만들어내는 우리 자신이다." _진은영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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